달라이 라마 망명수기 <13> 인도순례

티벳 불교 총수이며 국가원수인 비구 달라이 라마의 망명 수기 : 내 나라, 내 겨레

2008-03-03     달라이 라마

제8장 인도순례

 시킴왕자가 나를 데리러 라사로 왔다. 그의 방문이 바깥 세계의 한 줄기 동정이었다. 나는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고 성지를 돌보려 70년전 창립한 인도 대각회의 초청을 받았다.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나는 가고 싶었다. 그 행사는 불교계의 일대 쾌거다. 또 티벳 사람은 일생중 성지순례를 꿈꾸고 있다. 불교문화 발상지요, 수백년전 우리 산속에 지혜를 준 원천이다. 지금은 종교나 사회가 달라졌지만 아직도 티벳은 인도 문화권이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정치적으로 잠시나마 중공과 다투지 않을 좋은 기회로 보였다.

 또 간디의 이념을 따르는 네루와 다른 나라에게 충고를 청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고립을 과장하지 않더라도 나 자신 국제정치에 경험이 없고 우리나라 사람이 다 그랬다. 우리는 한가지도 몰랐다. 본능적으로 대응할 뿐이었다. 우리는 동정적 충고를 애타게 갈망했다.

 또 다른 인도방문 목적도 있었다. 오래도록 영국과 유다가 있었고 유일한 서방국가였다. 그런데 인도에서 물러간 뒤 멀어졌다. 나는 다시 두 나라 사이를 새롭게 튼튼하게 하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가고 싶었는데 정부에서도 가라고 했다. 그들은 나에게 여러가지 설명으로 인도방문을 수락하도록 밀었다. 그러나 우선 중공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들이 안된다면 그대로 될 뿐이다.

 나는 중공사령관에게 승인을 요청하니 처음부터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제시했다. 한심한 일이었다. 안전문제로 불가하고 준비위원회 일이 싸였고 정부초청이 아니니 대리를 보내도 된다고 거절했다. 나는 실망치 않고 초청국에 회답도 안했다.

 4개월이 지난1956년 10월 중순 장성은 대리자를 선임하라고 하며, 나를 가르친 선생님을 지명했다. 그러자 11월 1일인지 2일에 장성이 찾아와 10월 1일 인도정부에서 판첸과 함께 초청했으니 북경서 보낸다고 가겠으면 가라고 했다. 사실은 라사 주재 인도 총영사가 소문을 퍼뜨려 중공에 압력을 준 결과다.

 출발에 앞서 중공군은 나에게 길고 긴 강의를 시작했다. 그들이 뜻하는 바는 뭐든 관계 없고 항가리니 폴란드니 제국주의자가 선동한 작은 사고를 소련이 즉각 해소시켰다는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 반동분자들이 항상 살생을 저지르나 사회주의 국가들이 단결하여 막강해서 어느나라건 격퇴할 수 있단다. 결론은 티벳도 딴 생각 말라는 소리다. 종교행사라 하지만 중공도 유네스코 때문에 참석하는데 대만이 올지 모르니 인도 미리 말해 두었지만 대만이 있다면 즉시 철수하라 잔소리는 중공대사가 인도에서 들려준다. 인도 지도자가 인도 티벳 국경문제를 꺼내면 북경 외무당국에 물으라 대답하고 티벳 문제는 기자나 하급관리가 물으면 약간 문제가 있었다 하고 네루나 고위층 경우는 어떤 지방만 그렇다고 하랬다, 가서 할 연설문은 자기들 보는 데서 만들라면서 준 원고는 인도 도착하자 마자 내가 다시 썼다.

 도로는 전용으로 확장되어, 국경까지 이틀가면 될 거리만 옛날 그대로였다. 예전에 수 주일 걸리던 거리를 며칠로 단축 시켰다. 인도 국경근방 강변에 도착하니 판첸이 합류했다. 나흘째는 조랑말로 히말라야를 넘고 인도로 들어가기 전 또 중공군이 나타나 한번 더 강의를 했다.

 불행하게도 인도에는 반동분자들이 많으니 각별히 조심하고 중국공산당 전국 인민대표대회 부의장이니 중공을 대표하는 줄 알라 하였다. 그런즉 훌륭한 발전 개발 생활수준 향상을 꼭 이야기하고 신앙의 자유가 있다는 말도 반드시 설명하고 정 의심하면 중공에 초청하랬다. 그제야 국경을 넘으라 했다.

 인도쪽 산을 내려가니 여행도 극적이다. 50마일의 고원을 지나 고산 협곡 눈덮인 준령의 연속을 오르고 또 오르고 내리고 높으면 시야가 트이고 산기슭을 뚫으면 수림과 화훼(花卉)가 평지로 이어져 굉장히 더운 땅으로 뻗어 나갔다. 그 멀리에는 티벳 사람이 보지 못한 도시와 대양도 있었다. 다시 티벳 처럼 불모의 땅이고 마지막으로 시킴의 평원이 나왔다.

 이 길이 1903년 영국 탐험대가 개척한 이래 두 나라 공식 통로다. 그런데 나는 중공이 만들 길로 중공차로 10배나 빨랐다. 그렇지만 나는 티벳식으로 다녔으면 했다. 티??사람들은 지금도 걷거나 말을 타며 넘나드는 길을 중공군을 산소마스크에 자동차로 가관이다.

 날씨는 좋았다가 나빴다가 산세에 따랐다. 중공군의 괄시를 안 받으니 즐거웠고 국경에는 시킴 왕자가 의장대와 마중나와 있었다. 인도 관리는 대통령 두상의 환영목수건을 전했다. 또 인도식 화환도 걸어 주었다.

 변방서 1박하고 시킴 수도로 출발했다. 차편은 갈아 탈수록 점점 현대화 돼갔다. 시킴 수도교외에 중공대사가 나타났다. 그런데 시킴기와 티벳기를 단 차에 왕과 행차하니 중공사람이 황망하여 중공기로 바꾸었다.

 델리는 비행기로 갔다. 공항에는 부통령 수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중공대사는 자기가 안내하는대로 소개받고 인사하랬다. 그대로 하게 둬두니 외국사절 중에서 영국 다음 미국이 나오자 갑자기 중공대사가 행방불명이 됐다. 미국사절과 나는 어물어물 하고 인도 의전관이 잽싸게 위기를 넘겼다. 부통령과 나는 한차로 시내에 들어가며 두사람 사이를 이야기하며 만나서 반갑다고 했다. 시내는 부처님 행사로 성대한 치장을 했다. 대통령 관저로 직행 그와 인사했다.

 델리 첫날 아침 간디묘에 참배했다. 나는 그의 인류애를 추모하며 기도했다. 만일 그가 생존했다면 내게 어떤 충고를 주었을까 아마도 티벳의 자유를 위한 평화운동에 전력투구하라 했겠지, 이승의 그를 보았으면 염원할려니 유택앞에서 오직 평화의 길만 따르라는 충고를 느꼈다. 아직 비폭력주의는 불굴의 신념으로 갖고 있다. 모든 난관을 그의 실천대로 하고 폭력과는 절대 타협 않기로 결심했다.

 2~3일은 불교행사로 바빴다. 세계평화를 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억압 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펼치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이야기 할 기회가 되었다. 국가간의 평화가 내 생각에 제일 중요했다. 심포지움 때는 불교인의 평화성을 강조했다. 불교가 아시아에만 있지 말고 서양에도 알려지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개인에게, 국가에게 퍼져 인류의 구제가 불교교리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또 중생제도는 각자의 신앙심에서, 나오는데, 이 본능을 억제하면 평화의 적이라고 했다.

 불교 행사 뒤에 네루와 만났다. 네루와는 그의 티벳어 통역인까지 세사람 뿐이었다. 나는 인도에서 세계 각국인에게 티벳의 참상을 전하고, 세계인의 주의를 환기시켜 중공에 어떤 변화가 오기를 원한다 하고 인도방문의 목적을 말했다. 우리나라 동부의 현황을 설명하고 다른 지역에도 번시리라 했다. 중공은 우리의 신앙과 풍습을 말살하고 인도와의 역사적 유대도 자르려하니 우리의 희망은 인도 뿐이니 평화적으로 해결될 때까지 인도에 머물겠다고 밝혔다.

 끝까지 다 듣자 네루는 지금 현재 티벳을 위하여 될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 티벳의 독립을 인정한 나라가 없고 중공과 전쟁도 쓸데없고 싸운다면 당장 병력을 증강하여 멸종시킬 수도 있다. 그러니 돌아가서 중공과 합의한 조항을 평화적으로 풀어보라고 했다.

 나도 할만큼 했으나 중공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 앞으로도 가망이 없다고 대답했더니 다음날 주은래를 만나 전하겠다며 회담을 끝났다.

 공항에 나가 주은래를 만나고 그날 저녁 장시간 이야기 했다. 중공군이 주민들의 이해를 무시하고 무력으로 동부를 강압한다니 그는 중공군이 뭔가 잘못하는 모양 같다며 모택동에게 전하겠다고 발뺌이었다.

 며칠 후 주은래는 나의 두 형을 초대해서 희망적인 소리를 들려주었다. 형들은 티벳의 공직자가 아니니 스스럼없이 두 나라의 역사적 배경부터 시작해서 지금 적대시하고 있는 시점까지 말해주었다. 현재 중공은 티벳을 최악의 상태로 몰고가며 애국자를 박해하고 판첸을 내세워 달라이 위치를 흔들며 필요없는 병력을 주둔시켜 경제는 티벳 사람을 아사지경으로 파탄났고 중공군을 반대하는 민중은 고통 당하다 못해 철수를 요구하며 양국의 동등한 새 조약을 제의해도 주둔군은 응하지 않는다고 쏟아 놓았다.

 주은래는 예의 바르게 들었으나 내심 즐겁지는 않았다. 그는 형들에게 판첸같은 인물로 달라이를 뒤엎을 생각은 하지 않으며 티벳 문제도 간섭 않을테고 경제적으로 짐이 되지 않으리라 했다. 중공군이 이해 부족같은데 라사의 식량 상태는 호전 시키겠고 티벳 스스로 통치할 수 있게 되면 점차적으로 철군하겠다. 형들의 불만은 모택동에게 전하여 제거시키고 사후 확인도 하고 형들이 있고 싶으면 남아서 약속이 이해 안될 때 실컷 욕하라, 단 내가 티벳으로 돌아가야 한다. 만일 내가 인도에 처지면 나나 티벳 전체에 좋지 않을 줄 알고 귀국하도록 나를 설득하라고 했단다.

 나는 인도산업을 시찰했다. 수력발전소 계획은 처음 보는 규모였고 사람들이 스스로 일하는 자유국과 강제로 하는 공산국 차이가 뚜렸했다. 그보다도 성지 순례가 주목적이라 산치 대탑 아잔타 석굴 베나레스 설법장 부다가야 성도 터를 돌아보고 신앙심을 북돋우었다. 또 과거의 종교가 편협해서 얼마나 반목했기에 무작하게 유적파괴를 자행했나를 처음 느꼈다. 베나레스와 부다가야에서는 많은 티벳 성지순례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두 곳에서 설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꼭 따르라고 당부했다.

 부다가야는 내가 어린시절부터 꿈꾼 성지중의 성지이다. 불교인에게는 가장 숭고한 곳이다. 무상정각을 이루고 해탈의 길을 터득한 곳이라 대탑앞에서 내 마음은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로 꽉 차 왔다.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를 둔 녹야원으로 가는 길에 중공대사관의 연락이 왔다. 간첩과 반동분자들이 폭동을 획책하니 즉시 귀국하라는 라사의 중공군 전보였다. 부다가야에 있을 때 주은래가 델리로 오라는 연락도 있었다. 다시 정치와 불선의 세계로 돌아가야 했다. 델리에서 주은래는 라사의 위급을 말하며 나더러 빨리 가라 폭동이면 무력으로 진압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인도의 티벳 망명자들이 중공을 애먹인다며 내 태도를 빨리 결정하라고 했으나 당장 무어라고 답변할 수 없고 중공군의 만행만 되풀이 들려 주었다. 과거에 해온 잘못은 잊어주겠으나 비 인간적인 억압을 당장 그만두라고 요구했다. 그는 모택동이 티벳이 알맞는 개혁을 약속했다고 말하며 왜 티벳이 중공을 싫어하는지 알 수 없단다. 또 망명한 티벳 동포의 초청을 거절하라고 했으나 나는 고려하겠다고만 했다. 주은래는 인도 관리가 좋은사람과 나쁜 사람 섞였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아무 결론 없고 환멸감만 안고 나왔다. 다음날 아침 중공 원수가 똑같은 소리를 되풀이 하며 라사로 돌아가라고 재촉했다. 산에 있는 사자가 마음에 있으면 강아지가 된다는 비유로 달라이 라마는 티벳에 있어야 마땅하다고 했다. 더 이상 따지기도 싫고 돌아 갈테니 형들이나 잘 돌봐 달라고 했다.

 델리 출발전 다시 네루를 만나 그가 주은래와 이야기 한 내용과 1951년 인도 하원에 보낸 자료를 들었다. 주은래의 티벳 화제는 티벳이 중공의 일부지만 직할구역으로 생각지 않고 인종도 달라 자치구로 고려했고 공산화할 생각도 없었고 있다해도 점진적으로 하려던 참이라 했단다. 네루는 나하고 만난 내용도 자치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유도했단다.

 나는 네루와 만난 다음 귀국을 결심했다. 그의 충고도 그렇고 주은래도 굳은 약속이었다. 네루는 신앙면에서 잘 모르겠으나 정치에는 국제적으로 뚜렷한 존재였다. 나는 인도국경에 망명한 동포를 만나는 분제를 꺼내니 주은래가 못가게 했다는 내용까지 다 알고 잇었으며 정 가고 싶으면 인도 정부가 돌봐 주겠다고 했다.

 나는 종교적으로만 그들을 만나기로 생각하고 갔더니 라사의 호위병들도 와 있었다. 모두 인도에 남아 있으라는 충고에 티벳은 절망적이라 했다. 그러나 한번 더 중공의 약속이행과 평화적 방법으로 자유를 찾아보려 노력해 보겠다고 귀국을 알렸다. 사실 정치에는 신물이 났다. 델리에서도 정치화제만 계속했고 성지순례마저 정치문제로 중단되었다. 국내 문제만 아니라면 손을 떼고 싶었다. 망명동포들이 사는 마을에서 잠시나마 참선하고 기도도 했다. 심한 강설량으로 히말라야를 다시 넘으려면 한 달은 기다려야 했다. <계속>

 

홍교 김일수 옮김 
마하보디협회 한국지부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