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경의 世界(3) / 업설(業說)의 참뜻

2008-03-03     관리자

 (1) 업설의 이론적 근거

 사람들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생활철학을 하나씩은 지니고 있다. 바쁘고 복잡한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은 자칫하면 자아를 잃어버리기 쉬운데, 그런 현대인에게 건전한 생활철학은 자신을 잃지 않고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의지처가 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훌륭한 생활철학을 많이 제시하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종교의 실천적 교설을 말한다. 그리고 그런 실천적 교설은 불교의 초기경전인 아함에서도 무수히 설해져 있다. 곧 사념처(四念處)·사정단(四正斷)·사신족(四神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지(七覺支)·팔정도(八正道) 등의 간결한 술어로 표현되고 있는 것들인데, 사실 가장 기본적이며 제일 먼저 닦아야 할 교리로 평가되는 것은 업설(業設)이다. 그래서 불자라면 업설에 입각해서 생활을 반성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실천적 교설이 있기 위해서는 그것을 타당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론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것은 정당한 이유를 동반하지 않는 행위는 무의미하며 나아가 악의 범주에 떨어질 우려가 있을 뿐 아니라, 효과있는 실천은 합리적인 이론을 전제로 할 것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교적 친숙해 있다할 수 있을 업설에 대해서도 막연하게 받아 지느니보다는 정확한 근거가 되는 합리적인 이론을 충분히 살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앞서 우리는 세계는 브라흐만신(Brahman神)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바라문교의 이론을 음미해 보았다. 이 이론에 입각 할 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종속적 피조물에 불과하고 따라서 인간의 길흉화복은 창조신의 의지에 있으므로 인간이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부르기 위해서는 창조신에게 기도와 제사를 통해 관계를 맺는 수밖에 없을 것이 예상된다. 사실 아함에서는 수백마리의 소와 양이 바라문교의 공희(供犧)를 위해 살상되어 제단에 바쳐지는 제사라는 종교적 실천을 볼 수 있다. <     券4>

 그런데 제사라는 실천원리를 낳은 바라문교의 유신론적인 사상은 일체의 의지적 작용이 모두 창조주인 유일신에게 귀속되므로 인간에게 분명히 존재하는 의지와 욕심 및 죄악의 문제를 해결못하는 큰 모순을 안고 있음이 지적된다. 따라서 올바르지 못한 이론을 바탕으로 성립된 유일신에 대한 기도와 제사도 역시 올바른 실천방식이라 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입장에서 불교는 업설이란 실천원리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교설로 십이처설(十二處說)이란 교리를 제시하는데 그 교설은 매우 합리적이어서 그로부터 발전하는 업설이 어떤 모순에도 빠지지 않도록 튼튼한 기초를 이루어 준다. 그래서 십이처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뒤 업설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복잡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언제나 좌우에 두고 새길만한 생활철학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2) 불교의 기본적 세계관

 진리탐구를 위해서는 무조건 믿기보다는 합리적인 사유에 의존함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중생의 합리적인 사고를 위해서는 갑자기 궁극적인 진리를 제시하기 보다는 우선 현실을 정확히 관찰하는 일부터 가르침이 순서이다. 그런 순서를 부처님은 전도에 있어서 기본 입장으로 채택하셨다.

 부처님이 이런 입장을 취하신 것은 당시 인도사상계에서 진리라고 내놓은 견해들이 한결같이 현실전반에 대한 올바른 관찰은 결여한 채 현실의 한 부분만을 설명할 수 있는 원리를 우주의 모든 현상에 적용시키면서 심각한 모순과 충돌을 자아낸다고 직시하셨기 때문이다.

 이렇듯 부처님은 현실에 대한 면멸한 관찰을 우선적으로 권하셨기에 불교에 입문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이가 최초로 다루어야 할 대상은 「현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이란 여러 의미를 띠겠지만 진리탐구를 위해 관찰의 대상이 될 현실은 일단 우리에게 「인식」되는 세계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종교적 수행을 비롯한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결코 인식되지 않는 세계라면 현실성있는 존재로 볼 수 없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타당하게 인식될 수 있는 세계만을 비로소 현실적 존재로 보고 관찰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인식되는 우리의 현실은 인간과 그 대상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대상은 자연과 인간을 포함한다. 그리고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고 마음에는 「의지」라는 것이 있음이 자명한 것으로 관찰된다. 의지는 바로 무언가를 자유로이 행할 수 있는 능동적인 힘이다. 이러한 인간의 의지적 작용이 대상에 가해지면 대상은 그것에 거역하는 일업이 반드시 필연적인 반응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인간과 그 대상의지의 작용이 인(因)이 되고 필연적 반응이 결과(果)로 나타나는 「인과」관계를 맺는다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관찰한 현실은 의지적 존재인 인간과 필연적 반응체인 대상으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부처님도 현실세계를 그렇게 관찰하고 계신다. 생문(生聞)이란 바라문이 하루는 부처님을 찾아와 『일체란 무엇입니까?』 하고 질문한 적이 있다. 일체(一切)란 인간을 포함한 우주를 총칭하여 부른 대명사로서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가르킨다. 그러자 부처님은 『일체란 십이처(十二處)에 포섭되나니 열둘이란 눈과 색·코와 냄새·혀와 맛·몸과 촉감·의지와 법이니라』고 답하신다. (    13)

 이 교설을 바로 십이처설(十二處說)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폈던 현실에 대한 관점과 정확히 일치함을 보게 된다. 먼저 십이처는 각각 여섯개의 인식주관<六根>과 인식대상(六 )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인식」되는 세계만을 현실적 존재로 삼겠다는 뜻이며 아울러 현실세계는 인식하는 인간<육관>과 인식되는 대상<육상>으로 구성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더우기 인식주관을 의지(意: manas)라고 부르고 인식대상을 법(法:dharma)이라고 명명(命名)한 것은 인간에게는 「의지」가 엄연히 존재함을 강조하고 나아가 대상은 의지적 작용에 대해 「법칙적인」반응을 보임을 표명한 것이다.

 이렇듯 십이처설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인 동시에 일체에 대한 분류법이라고 할 수 있으니 표현은 평이하고 소박하지만 「일체는 십이처에 포섭된다」는 문장이 지니는 함축적인 의미는 모순으로 가득찬 당시 인도 종교 사상계의 문제점을 해결할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할 것이다.

 (3) 업설의 참뜻

 아함에 보이는 숱한 실천적 교설중 제일 처음 닦아야 할 교리로 부각되는 것은 업설(業說)이다. 그런만치 업설은 나름대로 이론적 근거가 되는 교설을 가질 필요가 있음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런데 업설의 이론적 근거로 등장하는 교설은 다름아닌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온 십이처설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업설의 가장 기본적 술어인 업(業: karma)이란 명사가 의지적 「작용」에서 온 말이며 업의 대응어인 보(報:vipaka)는 필연적 「반응」을 지칭한 말인데, 의지적 작용과 필연적 반응을 각각 십이처를 이루는 6근과 6경의 특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6근의 작용과 6경의 반응 사이에는 「필연성」이 있으므로 「작용」을 인(因:hetu)으로 「반응」을 과(果:phala)로 말할 수 있음도 앞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다.

 부연하면 십이처를 이루는 6근과 6경 사이에 작용 반응의 필연성이 존재함을 관찰하고 작용·반응의 필연성은 업·보의 인과성으로 달리 생각할 수 있게 되어 마침내 업인과보(業因果報)라는 기본적인 법칙이 도출(導出)된 것이다.

 이렇듯 인간과 그 대상이 보이는 의지적 작용 및 필연적 반응(十二處說  )을 바탕으로 설립한 업인과보의 원리는 우리 사회생활에도 적용되어 착한 업인에는 즐거운 과보가 따르고 나쁜 업인에는 괴로운 과보가 따름을 관찰할 수 있다. 이를 일러 선인선과(善因善果)요 악인악과(惡因惡果)라고 부른다. 이와같이 십이처의 세계는 어디나 업인과보의 법칙이 성립한다 할 수 있어 가히 우리의 현실에 있어서 가장 믿을 만한 원리중의 하나로 채택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십이처르이 세계에는 속속들이 적용될 것 같은 업인과의 법칙으로도 좀처러 설명이 쉽지 않은 문제가 우리 현실에서는 인식된다. 즉 어떤 이는 부유한 가정에 났다는 사실만으로 일생을ㅇ 즐거이 사는가 하면 어떤 이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궁핍함을 면치 못하는 경우를 보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다른 종교사상가들은 신이나 운명 또는 우연에 원인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 불교의 기본입장과 십이처설에서도 다루었듯이 위의 세 견해는 인정될 수 없다. 왜냐면 세가지 견해를 인정하면 그와 반대성질을 지닌 개인적 자유의지의 존재를 포기해야 하고 자유의지에 바탕을 둔 업보적인 현상도 단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의지의 존재를 포기할 수 없고 인간과 자연 및 인간과 인간사이에서 분명히 성립하는 업보적 관계도 결코 단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의 관찰로 부터 그들은 너무나 자명하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업인과보의 원리를 굳게 지닌다면 운명적으로 생각되던 문제의 현상도 일단 업인과보의 현상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위의 상황은 선인(善因)은 발견되지 않았는데 선과(善果)만 나타난 경우와 선인은 있는데 선과가 나타나지 않는 두 가지 경우로 가를 수 있고, 나아가 전자는 그 업인이 숙세(宿世)에 잇었는데 현세(現世)에 비로소 과보가 나타났고, 후자는 현세의 업인이 내세(來世)에 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도 『만일 고의로 업을 지을 때는 반드시 그 보를 받나니 현세에 받을 때도 있고 내세에 받을 수도 있다』고 설하셨던 것이다. (     券3 界經 )

 이렇게 해서 업인과보의 삼세윤회설(三世輪廻說)이 정립된다. 그런데 이 교설은 「인식」될 것을 강조하는 십이처설과는 엇갈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십이처설에 철저히 바탕을 두고 성립된 것이다. 즉 현실적으로 존재타당성이 없는 신등을 세우기 보다는 현실에서 관찰가능한 사실들을 중심으로 그 필연적 귀결을 이끌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업인과보의 법칙성 및 3세윤회의 교설은 현실에 대한 냉철한 관찰과 합리적인 사유를 통하여 세워진 것으로 진지성에 있어 유신론, 결정론, 우연론 등의 다른 종교 사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업인과보의 3세윤회에 대한 교설을 통하여 우리는 업설의 참뜻을 알 수 있으니 그것은 주어진 현실을 긍정하게 하고 어떤 난관이라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며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언제나 선한 업을 지어가는 건전하고 활동적인 인간상을 심어준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