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역사의 흐름과 불교 NGO

특집/불교가 희망이다

2007-01-08     관리자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앞으로 전개될 미래 사회에서 불교인들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지 예측하고자 한다면, 지금까지 이어져 온 세계 역사의 흐름에 대해 불교적 관점에서 냉철하게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세계 역사의 흐름
다소 과장이 담겨 있다고는 하지만,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의하면 13세기 당시에 동양의 문명은 서양의 그것을 능가하였다. 또, 서구인들의 헤게모니 유지를 위한 전략적 저술인 『문명의 충돌』의 저자 헌팅턴의 말을 빌더라도, 당, 송, 원나라에 이어 명나라 초기까지 동아시아는 유럽을 능가하는 세계 최고의 문명권이었다. 그러나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동서간 문명의 우열은 뒤바뀌고 만다.
콜럼버스 이후 남북 아메리카에서 벌어진 대규모 수탈을 통해 상상을 초월하는 재화가 유럽으로 유입된다. 그 결과 유럽의 ‘근대’가 시작되었다. 수탈한 재화가 밑거름이 되어 근대 이후 서구의 학문과 예술이 ‘눈부시게’ 발달하였다. 서구인들이 이룩한 근대과학의 실질적 원동력은 신대륙 등의 식민지를 수탈하기 위한 도구인 무기와 운송수단을 개발하고자 하는 그들의 ‘탐욕’이었다.
또,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의 발생 원인에 대해 학설이 구구하지만 그 졸가리만 보면, 식민지 수탈에 앞장섰던 ‘장사꾼’들의 무력과 경제력이 비대해짐으로써 왕과 귀족들의 구체제를 무너뜨린 것일 뿐이다. 나폴레옹법전에 명시된 주요 원칙 가운데 하나인 ‘소유권 절대주의’는 ‘장사꾼의 재산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는 상인들의 속내를 명문화한 것이었다. 나폴레옹법전에 연원을 두는 현대 민법에서 규정하는 ‘인간’의 정체 역시 ‘탐욕의 주체로서의 개인’이며 이는 ‘장사꾼’에 대한 점잖은 표현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소위 ‘근대화’의 진상이다. 그러나 서구인들에 의해 포장되고, 꾸며지고, 왜곡된 세계사를 수입하여 배울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그들의 ‘피로 물든 근대과학’과 ‘상업적 민주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해 왔다. 그 결과 우리 대부분은 ‘정의’보다 ‘이익’을 더 중시하는 ‘영악한 인간’으로 길들여졌다.
19세기 중반 악성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던 ‘투박한 현자(賢者)’ 마르크스에 의해 창출된 사회주의 이념은, 결국 레닌이나 모택동 같은 병법가(兵法家)들의 권력 탈취 수단으로 악용되고 말았지만, 어쨌든 사회주의권의 대두와 함께 제국주의로 치달리던 약육강식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양의 탈을 쓴 자본주의’와 ‘위선적 사회주의’가 힘을 균점하는 냉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후 양 진영은 자기 세력의 보전과 확충을 위해서 약소국과 후진국을 향해서 경쟁적으로 ‘착한 시늉’을 하면서 세계를 요리해 왔다. 냉전시대의 약소국들은 국가 간에도 원래 ‘정의’와 ‘신뢰’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면서,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新自由主義), 정치군사적으로는 패권주의의 시대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 세계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던 제국주의 시대로 회귀하려 하는 것이다.

역사속의 새로운 희망
희망은 없는 것일까? 만일 우리가 자본이나 무력과 같은 아날로그적인 힘의 균점을 통한 평화와 평등의 세계를 기대한다면 당분간 희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질서의 흐름에서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미군이 이라크에 들어간 지 몇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평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정보통신문명’과 ‘대규모 NGO운동’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여군 하나가 이라크군 포로를 벌거벗기고 사소한 장난을 친 사실이 알려지자 전 세계에서 비난의 여론이 들끓었다. 사람이 짐승과 차별되는 점은, 남이 보는 앞에서 명분 없이 함부로 타자(他者)를 해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수십 년 전 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수많은 집시들과 유태인을 학살했지만 그 사실이 은폐되어 있었기에 당시에 아무도 이를 비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라크 포로 학대 사건이 정보통신기기를 통해 순식간에 전 세계에 알려졌고, 전 세계의 NGO단체들이 그 부당함을 비판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이자 궁지에 몰린 미국은 가해 여군을 법정에 앉히고 만다.
인터넷과 핸드폰으로 대표되는 정보통신문명의 대두는 제3의 물결이라고 불리듯이 인류 역사에서 획을 긋는 사건이다. 정보통신문명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점점 투명해지고 있다. 그 어떤 곳에서 일어나는 불의와 폭력과 부당한 억압도 모두에게 노출된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희망적인 것은 그런 불의와 폭력에 대해 목숨을 걸고 항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동체대비의 보살도를 실현하는 NGO운동가들이다. 서구의 경우 동물보호운동, 환경운동, 반전운동 등 많은 NGO운동이 불교를 그 사상적 지주로 삼는다.

정보통신기기와 NGO의 결합
정보통신기기는 의미를 방출하는 기기이기에 정신문명의 기반이 된다. 무력과 재력이 지배하는 아날로그 세계에서는 크고 강한 것이 작고 약한 것을 제압하지만, 디지털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신세계의 궁극에서는 미세하고 선한 것이 거칠고 악한 것을 이긴다.
유불선 삼교에 능통하신 탄허 스님(1913~1983)께서는, 원시시대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온 무기의 역사에 대해 오행(五行)의 상극(相克) 원리로 설명하신 적이 있다. 나무 몽둥이가 맨주먹을 이기고(木克土), 칼과 창이 나무 몽둥이를 이기며(金克木), 화약을 사용하는 총과 대포가 칼과 창을 이기며(火克金), 수소폭탄이 총과 칼을 이긴다(水克火)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끝으로 맨주먹이 수소폭탄을 이긴다(土克水)고 덧붙이셨다.
수소탄이나 원자탄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맨주먹을 이길 수 없다는 선의(善意) 가득한 풀이였다. 이런 풀이가 한갓 몽상이 아니라면, 그 맨주먹은 불의에 항거하며 시위하는 맨주먹일 수도 있고, 우리 주변의 어려운 구석을 보살피는 사회운동가들의 맨주먹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온 세계의 후미진 구석을 모두 비추는 정보통신기기가 있고 약자의 아픈 상처를 자비의 손길로 보살피는 NGO가 있기에 미래는 희망적이다. 정보통신기기와 NGO의 결합은 관세음보살님의 대비행(大悲行)에 비견된다. 천 개의 눈으로 중생의 아픔을 관찰하시고, 천 개의 손으로 중생의 아픔을 보듬으시는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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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1957년 서울생으로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를 졸업(철학박사)하였으며, 현재 동국대(경주) 불교학과 교수로 저서에 『중관사상』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 『원효의 판비량론 기초연구』와 『용수의 중관논리의 기원』 등 40여 편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