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 속을 가다

신앙수기

2008-02-29     관리자

  [1] 고생의 밑바닥에서

  제가 부처님을 찾게 된 것은 고난의 밑바닥을 헤매던 때였습니다. 남편이 친구의 빚 보증을 섰다가 하루 아침에 집에서 쫓겨 나고, 다시 전세 든 집이 또 속아서 집에서 몰려 나고 남은 재산 정리하여 시작한 사업도 또한 완전히 망하여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밑바닥에 주저 앉았을 때입니다. 그래도 어린 3남매를 생각해서 일어서 보려고 애썼지만 되는 것이란 없었던 때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남편의 병이 문제였습니다. 집을 빼앗기고 가산이 몰락한 후부터 생긴 병인데 목이 한 쪽으로 돌아가 바로 하지 못하는 병이였습니다. 약이고 치료고 할만큼 했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어린 것들 학비가 걱정이 되어 보따리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거의 매일을 실의에 빠져 지내던 그때였습니다. 어느 친구를 따라서 일본말로 주문을 외우는 교당에도 열심히 다니던 끝이었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오셔서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내가 뿌리가 있는 집 사람인데 다시 생각해 보아라. 어른들이 하시던 신앙이니 다시 힘껏 해보아라. 집안의 신앙을 버릴 수는 없느니라.』 어머님 말씀은 불교를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시모님도 불교에 열심이었는데 네가 등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반복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음이 나지 않았습니다. 매사가 소용없는 짓으로만 보였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친정 동생이 와서 오늘은 4월 초파일이니 절에 가자고 권해왔습니다. 저는 동생과 함께 시모님이 다니셨다는 삼각산 꼭대기에 있는 암자를 찾아 갔습니다.

  [2] 부처님을 만나 100일 기도

  자그마한 등도 달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등을 달며 모두가 환한 얼굴이었습니다. 스님을 찾아 뵈니 법당에 가서 부처님께 절하고 매달리라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혼자서 그 암자를 찾아 다녔습니다. 아무 때나 생각이 나면 불시에 찾아가 부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기를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습니다. 한번은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지금 백일기도를 시작하니 동참하면 좋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몰락한 가세, 남편의 자포자기, 그리고 병, 그리고 극도로 피로해진 심신−그 속에서 단 한가지 남편의 병만이라도 고치면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새 용기를 내어 부처님 앞에 나아가 열심히 절하고 염불하였습니다. 실의에 빠져 지내던 저에게 이러한 기도에 대한 새로운 희망은 저를 다시 붙들어 일으켜 주었습니다. 몸이 아무리 피곤해도 부지런히 뛰어 다녔고, 생각만 나면 삼각산 꼭대기까지 달려갔습니다. 해가 저문 저녁에도 어두운 산을 기어 올라갔고 비가 장대같이 쏟아지는 날에도 산으로 갔습니다. 눈이 내리는 겨울에도 기어 올라갔고 밤새어 염불하고 다시 내려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12월 20일경 첫 번째 백일기도를 끝마쳤습니다. 아마도 10년 전의 일입니다.
  기도를 마쳐도 별 다른 변화는 없었습니다. 다만 부처님께 의지하고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활이 차차 안정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10여 일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식사를 마친 남편이 말했습니다.『여보, 나를 좀 봐요.』 반복하는 말이었습니다.『병이 나은 것 같아요.』 쳐다보니 고개가 멀쩡해 보였습니다. 깜짝 놀랬습니다. 처음 하는 말에는 나를 위로하는 말로 들었는데 정말 나아 보였습니다. 순간 가슴이 두 방망이를 쳤습니다. 남편은 윗옷을 입으면서『무엇인가 해보아야지. 당신도 오래 고생했으니까••••••』하고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꿈만 같아서 슬그머니 뒤따라가 보니 정말 고개가 말짱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한 손으로 턱을 붙들고 걸었는데 이젠 두 손을 버젓이 양복바지에 넣고 걸었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와 마구 울었습니다. 어떻게 몸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단숨에 절로 달음질쳐 갔습니다. 부처님만이 홀로 앉아 계신 텅 빈 법당에 혼자 엎드려 마구 흐느껴 울었습니다. 감사라 할까? 기쁘다 할까! 부처님의 은혜가 드디어 나에게 나타난 것이 정말 감내하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스님께 이 말씀을 드리니『부처님 덕분이지••••••』하는 말씀뿐이었습니다.

  [3] 새 삶을 살아가다

  남편은 새 용기가 나는 듯 일을 찾아 다니는 듯 하였습니다. 그동안 남의 빚에 몰려 재산을 날리고 또 속아 전셋집 조차 허탕치고 셋방으로 살면서도 이제 몸이 나으니 용기가 솟는 듯 했습니다. 그러던 중 기왕에 사업관계로 알고 지내던 외국인을 만나 직장을 외국에 구하였습니다. 간 곳이 호주였습니다. 거기서 2년간 현지 책임자로 일하시다가 돌아왔습니다.
  저는 남편이 건강해지면서 믿음이 자리를 잡아 갔고 법문을 들으러 여러 법회를 다녔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절만 하는 것이 불교인 줄 알던 무지에서 차차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남의 빚에 몰려 몰락하고 온갖 고생을 겪었던 일조차 어쩌면 전생의 빚을 갚은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원망을 버리고 오히려 빚갚은 후련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참선 법문도 2년 동안 들었지만 그것은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불법이 넓고 깊다는 생각을 다시 했습니다. 이러던 끝에 어느 친구의 권유로 불광법회를 찾아 갔습니다. 그날은 마침 새 법당이 문을 여는 날이었습니다. 스님은「형제 여러분!」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법문을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빠져드는 듯 열심히 들었습니다. 내가 올 곳은 이곳이로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법문을 듣고 나면 괴로움을 벗어날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이제까지 세상을 살아오던 태도가 잘못이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밝은 부처님 광명속에서 살면서 어두운 마음을 붙들고 있었다는 잘못을 깊이 뉘우쳤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 활력소라도 먹은 듯 죽 쳐졌다가도 새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 불광에 온 지 1년이 넘었습니다. 마음이 편안하고 살림도 안정돼 갔습니다. 집안은 사뭇 밝아졌습니다. 아이들 모두가 착하게 자랐고 공부도 잘했고 막내도 대학에 갔습니다. 저는 어려움을 만나면 대치하는 공식 같은 것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어려움이 있으면 저는 먼저 스님을 생각하고 법문을 회상하며 반복 생각합니다. 그것은 반야바라밀 법문입니다. 법문을 반복 듣고 있으면 어려움을 해결할 지혜도 힘도 생기게 됩니다.
  저는 모든 사람은 부처님의 은덕으로 살고 온 세계는 부처님의 은혜의 세계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착한 공덕이 이루어지는 힘은 부처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부처님은 바로 진리이며 무한이며 대자대비인 까닭에 부처님을 생각하면 만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부처님에게는 원만 성취와 대자대비뿐인 것을 믿고 있습니다. 모두가 반야바라밀 법문에서 배운 결론입니다. 이 믿음은 요사이 와서 어려운 법우들을 대하면서 더욱 실감을 얻었습니다.

  [4] 부처님만 믿고서

  지난 겨울 11월 초였다고 생각됩니다. 밤에 바라밀염송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받아보니 금호동에 사는 불광형제였습니다. 사연인 즉 최근 불광법회 나오는 사람인데 아기를 낳은 지 하루 반이 지났는데도 울지 않고 먹지도 않고 입술이 까맣게 타들어가니 와서 독경, 염불을 해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전화를 받으면서 생각했습니다.「밤 이 시간에(그때는 10시 30분이었습니다) 내가 의사도 아닌데 어떻게 도와준담」하다가 다시 생각이 들었습니다.「나에게 독경기도 해달라고 청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든 부처님만 믿고 가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어쨌든 부처님 믿고 가보겠습니다.』하고 전화를 놓았습니다. 남편께서도 처음에는 의아해 하시더니『가보려면 가보시오.』하고 고맙게 양해해 주었습니다. 저는 다시 기도했습니다.『부처님, 제가 가야하는데 어찌하면 좋습니까. 부처님 어린 생명을 구해주십시요. 지장보살님 도와주십시요. 저는 부처님만 믿고 떠납니다.』 이렇게 부처님 앞에 아뢰듯 기도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금호동 형제가 밤에 저에게 전화를 걸어온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해 초파일 때 불광법당에서 처음 만난 분이었는데 그 분 댁이 금호동이었습니다. 지난 가을 한 번 그 댁을 찾아갔더니 딸을 데리고 모녀가 울고 있었습니다. 딸은 12살이었습니다. 볼이 붓고 목에서 윗가슴까지 부었는데 병원에 찾아갔더니 다른 큰 병원에 가보라 하며 치료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의사말로는 입원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라는 말이 다랍니다. 집안 형편이 그렇게 할 형편이 못 되어서 모녀가 울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말했습니다.『불광 나가는 사람이 왜 웁니까? 어려움을 만나면 기도하라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하고 기도를 권했습니다. 저는 불광에 와서 독경, 염불하는 기도법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마음속으로 축원했습니다.「부처님, 불쌍한 이 모녀를 돌봐주십시요. 근심없고 아프지 않게 살펴주십시요.」 이렇게 염하고는 삼귀의 천수경 그리고 일심으로 바라밀 염송을 하고는 소리내어 축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어서면서 아이 볼을 만지며『이거, 볼걸이겠지, 걱정마, 부처님께 기도했으니, 자고나면 날꺼야••••••』 위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에 전화해 보니 그 길로 깨끗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살님 덕분이라며 기뻐했습니다. 저도 감사했습니다. 저희들의 기도가 허망하지 않은 것을 새삼 감사했습니다.
  이 일은 아마 금호동 형제들에게 소문나 있었던 모양입니다. 또 제가 기도해서 어려움을 이긴다는 말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라고도 생각됩니다. 이래서 밤중에 저에게 전화를 걸어 온 것이었습니다.
  저의 집은 잠실체육관이 있는 잠실본동입니다. 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너 금호동에 가니 11시반이 지났습니다. 저는 버스 안에서 계속 기도하며 갔습니다. 불광형제 집에 들러 함께 그 집에 가니 가족들이 초조하게 모여 있었습니다. 저는 향을 피워 놓고 그 앞에 합장하고 엎드려 마음으로 기원드렸습니다.「부처님 이 댁 가족의 어두운 얼굴을 밝혀주십시요. 위험에 빠진 어린 생명을 도와주십시요. 부처님, 부처님」하고 일어나 앉아 삼귀의하고 천수경을 읽고 지장경을 독송하기로 하고 시작하였습니다. 아마 신묘장구대다라니까지 갔을 때입니다. 아기가 갑자기 벼락치듯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때까지 울지 못하고 먹지 않고 입술이 새까맣게 타 죽은 듯 했던 아기입니다. 그 아기가 막 울어대는 것이었습니다. 계속 울었습니다. 저희들도 눈물이 줄줄 나와 독송을 중단하고『부처님 감사합니다』하며 함께 울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독경했습니다. 그리고 아기가 혀를 둘르기에 따뜻한 보리차를 먹였습니다. 새벽 4시까지 독경했습니다. 아기는 입술이 아주 빨갛게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아기는 순하게 잘 자라 지난 2월 중순 쯤에 백일이 지났습니다. 잘 크고 있습니다.

  [5] 크신 광명 속에서

  스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독경하는 곳에 부처님 광명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부처님 광명이 비추는 곳에 불행과 고난이 있겠습니까. 저는 부처님께서 저희들의 미혹과 허물을 너그러이 살펴주시고 언제나 은혜로써 저희들을 키워주시고 계시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저희들이 참고 믿고 노력하는 데서 부처님의 위신력이 우리에게 은혜로 나타나는 것을 확신합니다. 지난 겨울에 법회에서 50일 기도했을 때 저는 백일기도를 했습니다. 매일 조석으로 바라밀 염송하고 지장경 읽고 108배를 하였습니다. 회향 후에도 나태하지 않고 정진하려고 금강경, 보현행자의 서원 그밖의 경전을 독송하기로 하였는데 스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금년도 수행과제로 금강경 독송을 지정해주셔서 한층 감명이 깊습니다. 저는 지금 과분하게도 불광법회임원을 맡고 있습니다. 저의 법회 가족들의 심부름을 하라는 분부이고 함께 기도하며 살아가라는 책임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비록 법문 깨달은 것도 없고, 힘 얻은 것도 없지만 겁나는 것이 없습니다. 어려움을 만나면 법문을 회상하고 반복 생각할 때 어려움은 해결되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심으로 염불 독경하면 반드시 부처님 광명이 크게 빛납니다. 이것을 믿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기쁘게 지냅니다. 오늘 이 시간까지 제가 정법문중에서 바로 설 수 있도록 키워주시고 도와주신 스님들과 법회 형제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부처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