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의 건강 지킴이 김 치

약보다 나은 우리 먹거리 7

2008-02-28     관리자

겨울나기 준비, 김장
한 집안을 대표하는 입맛이라면 단연 장과 김치를 꼽게 된다. 장맛과 김치맛은 예로부터 모든 음식의 기본이 되는 것이었고, 그 집안의 가풍이나 성품을 상징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장과 김치, 이 두 가지 음식은 모두 저장하여 두고두고 먹는 것이므로 장 담그는 일과 김장은 우리네 일년 살림 중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입동(立冬) 즈음이 되면 주부들은 김장을 위한 준비에 손길이 바빠졌다. 마늘과 파 같은 양념은 미리 미리 손질하여 두고, 젓갈시장을 다니면서 구해온 젓갈을 달이고 체에 받쳐 작은 항아리에 얌전히 담아 김장 때까지 삭혀두고, 배추는 속이 꽉 찬 것으로 구해다가 손질하여 절이기를 2~3일이 소요되곤 하였다. 이 외에도 가을볕에 차분히 말려 놓은 고추는 곱게 갈아 김장에 사용하기 적당하게 곱게 갈아놓아야 하였고, 생굴이니 생새우, 기타 어물이나 과실같이 집집마다 제각기 특색있는 속을 준비하는 일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김장날까지 준비하는 기간은 열흘이 넘어 걸리는 것은 다반사였으며, 바야흐로 김장날이 되면 온 식구들이 모여 제 몫을 하는 날이기도 하였다. 그 즈음 집집이 담장 너머마다 배추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김치는 겨울을 나는 중요한 식량으로 배추 백 포기쯤은 온 집안 식구들을 위해 준비해놔야 비로소 주부는 이듬해 봄까지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이었다. 지금 형편으로 보면 번거롭기 짝이 없는 이 작업은 주부들만의 행사가 아닌 온 집안이 함께 하는 행사이기도 하였다.
가족의 수는 줄어들었고, 세상은 점점 바삐 돌아가며, 여기에 생활의 편리함 또한 더해져서 이제는 이런 광경을 여간해서 보기 힘들 뿐 아니라, 이제는 배추 열 포기도 많은 김장에 속해버렸고, 집집마다 김치 냉장고 덕에 딱히 김장철이라고 할 때도 없어졌으며, 오히려 사먹는 김치가 경제적이라는 이유로 그 집안의 고유한 김치 맛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가 김치를 이렇게 소홀히 하고 있을 때 이제는 외국에서 김치의 맛과 영양의 우수성에 눈을 돌리고 있다. 비록 김장이라는 행사의 의미가 예전에 비해 축소되고 있다 하더라도 김치라고 하는 발효저장 음식문화의 우수성만큼은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발효과학과 소금
김치는 원래 ‘지(漬)’라고 하였다.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염지(鹽漬)’라고 하였고 이는 소금에 절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려 말에 와서 ‘저(菹)’라는 명칭이 쓰였다고 하는데 우리 겨레는 소금에 절인 채소에 소금물을 붓거나 소금을 뿌림으로써 독자적으로 국물이 많은 김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숙성되면서 채소 속의 수분이 빠져나오고 채소 자체는 채소 국물에 침지(沈漬)된다. 여기서 나온 말이 침채이고 이것이 팀채 < 딤채 < 김채를 거쳐 오늘날의 김치라는 단어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즉 채소를 소금물에 담궈 발효시킨 음식 이것이 바로 김치가 되는 것이다.
김치를 담그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소금이다. 또한 소금이야 말로 발효과학의 중심 소재이다. 우리 한민족만큼 소금을 잘 다루는 민족이 없다. 소금을 얼마나 좋은 것을 사용하였는가에 따라 애써 담근 김치가 무르게도 되고, 혹은 아삭하면서도 짜릿한 맛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소금과 물, 공기 중의 산소가 만나서 이것을 충분한 시간이 빚어내면 감칠맛이라고 하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우리의 맛이 만들어진다.
초보주부라도 잘 알다시피 맛소금이나 정제염으로는 김치를 만들 수 없다. 즉 발효가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배추 절이는 데는 흔히들 굵은 소금이라고 하는 천일염이라야 되는데, 예로부터 주부들은 그 해의 김장을 위해 봄볕에 만들어진 첫 소금을 구해다가 어두운 창고에 보관하면서 1년 내내 간수를 빼고 잘 준비해 놓았으니 김장은 한결같은 정성과 공이 들어가야 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좋은 소금으로 잘 발효된 김치에는 소금에 있던 불순물, 채소에 잔류하던 나쁜 물질, 대장균과 같은 세균까지도 찾아볼 수 없으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에 감복할 따름이다.

무 김치, 고추와 마늘 양념
김치는 무·배추·오이 등과 같은 채소를 소금에 절이고 고추·파·마늘·생강 등 여러 가지 양념을 버무려 담근 채소의 염장 발효식품이다. 지금은 김치라고 하면 배추김치를 대표선수 격으로 내세우며 그 대명사로 사용하지만 지금과 같은 배추김치를 담그는 전통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지금과 같은 속이 차고 노란 배추가 등장한 것이 백년 안쪽이라고 하고, 역사 기록을 봐도 김치의 주재료는 주로 무나 오이 등이 주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김치는 우리 식탁에서 자칫 부족하기 쉬운 식물섬유로서의 구실을 크게 하고 있다. 특히 채소의 섬유질은 발효가 될수록 질기고 강해지는데-신김치의 섬유질은 또 얼마나 질긴가!-, 이런 고급 섬유질은 우리 몸의 근육을 튼튼하게 해주는 중요한 재료가 된다. 섬유질의 질적인 수준을 이야기하자면 배추보다는 단연 무가 으뜸이다.
무는 소화를 돕기도 하고 기운을 잘 돌게 하는 음식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무의 미덕은 튼튼한 섬유질과 풍부한 칼슘에 있다. 무를 일명 나복(蘿蔔)이라고 하는데, 세로로 크고 길게 썰어 담근 김치를 ‘나복지(나박김치)’라고 하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같은 무김치라도 그것을 정육면으로 작게 썰은 것은 깎두기라 하여 나복지는 일꾼이 먹는 김치, 깍두기는 양반들 음식으로 나누기도 하였다. 물론 먹는 모양새도 중요하긴 하지만 이 기준은 섬유질을 잘랐는가, 그대로 놔두었는가에 핵심이 있다. 길고 질긴 섬유소가 필요한 일꾼에게는 나복지가 필요했던 것인데, 현대인들과 같이 허약한 근육이 문제가 되는 요즘에는 깍두기보다는 나복지가 정답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무에 함유되어 있는 흡수 가능한 고품질의 칼슘은 골다공증 예방에 대한 무척 좋은 처방이다.
고추는 배추보다는 좀 더 역사가 오래 되어 한 오백년쯤 전부터 김치에 활용하여 왔다. 고추는 다른 전래 채소와는 달리 우리 음식의 성격과 잘 맞는 재료로 정착되었고, 마늘 역시 고추와 함께 김치의 발효 효소인 젖산균의 번식을 크게 도와준다고 전한다. 고추에는 비타민 C가 매우 많으며, 고추의 매운맛 성분인 캡사이신과 고추에 많이 함유되어 있는 비타민 E는 비타민 C의 산화를 막아주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우리 겨레는 긴 겨울 동안 부족되기 쉬운 비타민 C를 이 김치를 통하여 섭취할 수 있었다.
김치는 역사의 흐름과 함께 그 모습을 변화하여 왔고, 세월이 만들어낸 조상들의 지혜의 결정체이다. 이제 바야흐로 김치가 맛있는 계절이 돌아왔다. 오늘 저녁 식탁에는 막 항아리에서 꺼낸 김치 한쪽 쭈욱 찢어 고슬한 밥 위에 올려놓는 것은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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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_ 문학박사(불교미술사 전공), 한국전통문화학교 강사로서 서울시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통의학과 학문에 관심을 갖고 계속해서 공부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