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佛敎)의 영혼관(靈魂觀)

해외논단

2008-02-28     관리자

①외도(外道)들의 영혼설

불교에서 영혼을 어떻게 말하는가에 대하여는 이설(異說)이 있다. 적어도 부처님의 말씀으로는 세속에서 흔히 말하는 의미의 영혼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불교는 비영혼설(非靈魂設)에 선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 이전부터 인도의 종교나 철학이 일반적으로 인정하여온 영혼불멸의 실체로서의 주체적 생명 또는 인격을 말한다. 이 의미의 불생불멸의 영혼에 대하여는 인도에서 부처님 이전부터 여러 가지로 말하여 왔다. 바라문 정통파나 비정통파는, 아트만[我] 프루샤[神我] 지바[命(명)·영혼]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영혼을 말하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고급령(高級靈)에서부터 저급령에 이르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다시 바라문 비정통파 중 유물론자들은 영원불멸의 실체는 물질 뿐이라고 하고 실체로서의 정신과 영혼은 물질 위에 존재하는 것이라 하여 실체라고는 보지 않았다. 요컨대 불교 이외의 종교에서는 영원불변의 실체를 문제로 삼고 그것을 정신, 물질 등으로 보고 정신적 실체적 영혼이라 하였으며 영혼불멸을 주장하였다고 하겠다.

②불교의 영혼설

그런데 [생멸변화하지 않는 영원불멸의 실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에 의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으로서 생멸 변화하는 현상계에는 속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현상계에 있는 우리들은, 현상을 초월한 실체·본체의 존재를 경험할 수도 없고 논증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한 경험할 수도, 논증할 수도 없는 본체에 대하여 그것이 있다든가 없다든가 말하는 것은 절대로 해결 될 수 없는 것으로서 그것을 말한다고 하는 것은 독단이며 월권이다.

그러므로 실체·본체는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고 하여 불교에서는 이것을 무기(無記)라고 불렀다. 이러한 무기에 대하여 원시불교의 아함경에서는 十종,또는 十四종을 들고 있는데, 그중 영혼에 대하여 외도의 설로서 [영혼과 육체는 동일하다], 또는 [양자는 각각 다르다]는 등 설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중에 영혼과 육체는 동일하다고 한 것은 영혼을 육체외에서 찾지 아니하고 영혼은 육체와 더불어 생기고 함께 없어진다는 유물론이며 실체로서의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단견설(斷見說)이라고 하는 것이다. 영혼은 육체와 다르다고 한 것은 육체는 생멸 변화하지만 영혼은 생멸하지 않는 실체이므로 양자는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체로서의 영혼을 세우는 영혼불멸설로서 불교에서는 이것을 상견설(常見說)이라고 한다. 이것은 앞에 말한 바라문 정통파와 비정통파가 말하는 영원불멸의 실체로서의 영혼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불교에서는 이들 실체로서의 불생불멸의 영혼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존재가 논증할 수 없고 설사 논증된다 하더라도 본체계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상과는 관계 연락이 없는 것이므로, 고(苦)를 여의고 낙(樂)을 얻는다든가 미혹을 여의고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종교문제 해결과는 하등의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불교는 이와같이 불생불멸의 실체로서의 영혼을 말하는 것을 금하고 이것을 무기라고 부정하였으므로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비영혼론의 입장에 선다 한 것이다. 그러나 인격의 주체로서의 영혼은 불교에서도 인정을 하였다. 그것은 오온(五蘊)이 가화합(假和合)한 자아(自我)이며 생멸변화하는 현상으로서의 영혼이다. 이 [자아] 또는[영혼]은 인격의 주체로서 과거에서부터 선악업의 모든 경험을 쌓아놓고 지능, 성격 등 소질로서 간직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불교는 무아[비영혼]를 말하면서 유정의 三세[과거·현재 미래]에 이르는 업보윤회를 말하므로 업보의 주체로서의 영혼은 생멸변화하면서, 업이나 보가 계속되는 한, 단절됨이 없이 과거·현재·미래에 이어져 존속한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영혼불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불생불멸이라 하는 고정된 것이 아니고, 현상적인 거짓인 나[假我]의 끊임없는 상속이다. 원시 경전에서는 이것을, 등불의 불이 타면서 항상 변화하고 있어 일련(一連)의 불로서 존속하는 것으로 비유되고 있다.

③업력(業力)과 중유(中有)

부파불교에서는 유정이 三 계[天上(천상)·인간·지옥 등]를 윤회하는 十二연기를 업보설(業報說)로 설명한다.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윤회에서 업력(業力)을 가지고 있는 유정의 윤회의 주체를 영혼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영혼은 三계 六도[중생이 윤회하는 여섯 처소 즉 천상·인간·아수라·축생·아귀·지옥]을 윤회하여 번뇌와 업이 끊이지 않는 한 영원히 존속하며 유전(流轉)한다고 본다. 이 생사의 유전은 생유(生有)·본유(本有)·사유(死有)·중유(中有)라 하는 사유(四有)를 반복하는 것으로 본다. 생유는 이생에 태어나는 최초 찰나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고, 본유는 생에서 사(死)에 이르는 한 생애의 존재이고, 사유는 죽음의 찰나의 존재이며 중유는 죽음에서 다음 생에 태어나는 중간의 존재이다.

구사론(俱舍論)등에 의하면 죽은 사람은 생전에 지은 업의 선악에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좋은 곳이거나 나쁜 곳의 중생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태어나는 장소가 결정될 때까지의 존재를 중유라고 부른다. 중유의 수명은 一기(一期)가 七일이고 七일만큼 생멸하여 최대한 七회를 반복하게 되어 七·七―四九일까지의 사이에 일단 수생처(受生處)가 결정된다고 한다. 七·七일까지 수생처가 정해지지 않았을 때는 사자(死者)의 영은 중유로서 미혹한 상태로 있다고 본다. 이 중유의 사상에서 사자의 七일 간격 법요가 행하게 되고, 사자에 대하여 독경, 공양을 하여 그 공덕으로 그 중유가 생전의 악업을 정화하여 좋은 곳으로 태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사자에 대하여 독경, 공양을 하여 그 공덕으로 그 중유가 생전의 악업을 정화하여 좋은 곳으로 태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사자에 대하여 四九일 간을 일주일 간격으로 천도(薦度)공양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四九일 이후, 一○○일, 一주기, 三주기, 七주기 등 천도는 조상숭배의 풍습을 따르는 것으로서 사자의 영을 위로하고 독경 공양함으로써 사자의 복락과 깨달음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불교 전래 이전의 풍습에 불교적 의미를 가미한 것으로 지역주민의 감정에 적합하게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④輪廻主體(윤회주체)와 佛性(불성)

아함경에 의하면, [유정(有情)은 업을 소유하고 업을 상속하고 업을 태(胎)로 하고 업을 친속(親屬)으로 하며 업을 귀취(歸趣)로 하여 선악의 업을 지어서 그것을 상속한다]하고 있기 때문에 앞서 말한 十二연기의 윤회유전(輪回流轉)을 말한 것이다. 이 윤회 유전의 주체에 대하여 부파불교에서는 각각 명칭이 다르다. 유분식(有分識‥잠재적―남방상좌부) 근본식(根本識―대중부)·종자식(種子識) 또는 일미온(一味薀―경량부) 궁생사온(窮生四薀―화지부) 비즉비리온아(非卽非離薀我―독자부)등 여러 가지로 불렀다. 그중에는 잠재적으로 존속하는 선악의 업의 습관력을 종자 또는 수면(隨眠)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영혼 중에 포함되어 있는 부분적인 지능 성격 등 소질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부파불교의 잠재식과 잠재력의 사상을 이어서 대승(大乘)의 유가행파(瑜伽行派―유식학)에서는 잠재식(潛在識)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부르고 표면식(表面識)으로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독립한 식체(識體)가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윤회의 주체로서 이른바 불교적 영혼이다. 그래서 중생의 윤회의 주체는 아뢰야식이라고 불리우고 또한 그 주체는 선악의 보과(報果)이므로 이것을 이숙식(異熟識)이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수행에 의하여 점차로 번뇌를 없애고 더렵혀진 업을 여의게 되면 아뢰야식은 정화되어 최고의 불과(佛果) 위(位)에 이르면, 일체번뇌와 업보에서 벗어나 청정무구한 지체(智體)가 된다. 이 시점에서는 인격의 주체는 벌써 아뢰야식이라든가 이숙식이라고 불리우지 아니하고 아마라식(阿摩羅識―無垢識(무구식)이라고 불리운다. 아마라식이 되면 그 식의 내용에는 정화된 종자만이 있게 되므로 이것을 무루(無漏) 종자라고 한다. 어쨌든 주체로서의 식(識)은 아뢰야식이든 아마라식이든, 때묻은 유루종자(有漏種子), 또는 청정한 무루종자(無漏種子)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염정(染淨)의 종자를 가지고 있는 식이라는 의미에서 아타나식(阿陀那識―執特識)이라고도 불린다.

이상은 유가행파의 중심식체(中心識體―本識이라고도함)를 고찰한 것인데, 유가행파는 법상종(法相宗)이라고 불리우는 것처럼 제법의 현상만을 문제로 삼는다. 이에 대하여 불성(佛性)이나 여래장(如來藏)을 말하는 여래장계(如來藏系)의 불교를 법성종(法性宗)이라고 한다. 제법의 성(性―본질·특질)을 문제로 삼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성이나 여래장은 현상의 마음 저 너머에 존재하는 성품이라고 보는 것이며 생멸변화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 그 특질이라고 한다. 법성이나 불성은―실천론의 입장에서 ―수도 실천의 결과에서 얻어지는 최고 구경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본 주체적 존재를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불성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실제로는 체득된 깨달음의 경지로서의 주체적 불성을 의미한다고 보는 바이다.

본고는 일본 대법륜(大法輪) 제四九권 제四호에서의 초역이다.(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