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종교를 넘나들며 회통한다

연중특별기획-이 시대를 진단한다 / 우리 시대 종교의 역할

2008-02-26     관리자

천주교 서울대교구 통합사목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영세를 받은 뒤 토정비결을 한두 번 이상 봤다는 신자가 1987년 28.7%에서 2006년 42%로 증가했다고 한다. 철학관(점집)을 찾았다는 신자는 1987년 13.1%에서 2006년 25.5%로, 단전호흡이나 기공수련에 참여했다는 신자는 1998년 13.3%에서 2006년 18.7%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자료를 인용한 것은 천주교 신자들이 ‘미신’으로 치부되는 토정비결 등에 관심을 갖는 이유 속에, 혹시 우리시대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지 가늠할 만한 단서가 있지 않을까 여겨지기 때문이다. 천주교 신자들의 철학관 출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정 종교의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 ‘열린 사고’를 갖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수행정진을 통한 심신의 정화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1,700년이 가깝고, 천주교를 비롯한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지는 길게는 200여 년이 돼간다. 하지만 그보다 더 오랜 기간 민족의 심성을 지배해온 것은 ‘무속적 원형질’이고, 그것은 지금도 민족구성원의 몸속에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화여대 최준식 교수가 “무교(巫敎)가 한국인의 신명을 키우고, 유교(儒敎)가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을 결정했다면, 불교는 한국의 종교문화를 형성했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 내면을 구성하는 요소는 종교적 측면만 보더라도 무교, 유교, 불교, 기독교 등 여러 형질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종교계에서 끊임없이 개종자가 생기는 것은 수천년간 문화적 융화과정을 통해 형성된 개별 신도들의 몸속 어딘가에 여러 가지 종교적 형질들이 똬리를 틀고 얽혀있다는 것이고, 개종은 자신의 내부에 이미 있는 또 다른 형질을 찾아가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럴진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것은 어쩌면 자기기만이자 자기부정이 아닐까? 바깥의 타종교와 싸우는 일은 곧 자신의 내부에 있을 또 다른 자아, 혹은 또 다른 종교적 형질과 싸우는 내분에 다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마다 자신의 내부에 얽혀 있을 종교적 형질들, 즉 모든 종교적 특성을 이미 갖고 있는 소우주로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종교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내부에 공존하는 이질적인 종교 형질들을 한꺼번에 ‘저 높은 곳’으로 승화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이 시대 종교의 역할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두 말할 것도 없이 수행정진을 통한 심신의 정화가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중국 선불교의 실질적인 개창자라고 할 수 있는 육조 혜능 선사가 어느 날 대감사에서 설법을 하면서 “너희들이 서방정토와 극락세계를 보고 싶으냐?”고 묻는다. 그러자 서주 자사가 “보여 주십시오.”라고 말하자 혜능 선사는 “봐라!”라면서 자신의 몸을 가리킨다. 심신을 완벽하게 정화하지 못한 사람이 감히 자기 몸을 가리키며 “봐라! 서방정토가 여기에 있다.”라고 외칠 수 있을까? 혜능 선사는 얼마나 갈고 닦은 것인가!
이런 장면은 공교롭게도 기독교 신약성서 요한복음에도 그대로 나온다. 예수가 어느 날 새벽에 ‘야곱의 우물’로 물을 길러온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게 된다.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안다.”고 말하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가 그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종교의 궁극은 이처럼 심신의 완전한 정화를 통해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고, 그것은 투명한 영혼의 맑은 소리와 향기를 통해 가난하고 상처받은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끊임없이 스스로 투명해져야 한다
지난 한 해 종교계는 유난히 시끄러웠다. 개신교 목사들은 개방형 이사제를 도입하는 것은 선교의 목적을 가진 기독교사립학교의 설립취지를 훼손한다면서, ‘순교하겠다는 각오’로 삭발을 감행하며 사학법 재개정 투쟁을 벌였다. 이어서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가 벌어졌다. 공격적인 한국교회의 무리한 선교방식이 빚어낸 비극적 사건이었다. ‘개독교’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한국교회의 폐해를 지적하는 네티즌들을 탓하기에 앞서, 이 시대에 종교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길래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개탄스러울 뿐이다.
그뿐인가. 스님들의 계파갈등은 온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신정아 가짜학위 파문을 낳더니, 이는 부메랑이 되어 불교계의 갖가지 추문으로 돌아왔다. 거기에 보태어 일부 사찰의 주지선출 문제 등을 놓고 터져 나온 잡음은 세속에서 성직사회를 걱정해야 할 만큼 부끄럽기 짝이 없는 모습들이었다.
자신의 얕은 종교적 신념을 내세워 타종교에 싸움을 거는 모습은 또 얼마나 추악한가? 단군상의 목을 자른다거나 불상을 훼손하는 일이 과연 종교적 우월성의 드러내는 일일까?
기독교는 “우상(이미지)을 섬기지 말라”는 가르침을 신앙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다른 종교의 상징물을 파괴하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헛된 이미지에 현혹되지 말고 ‘진리의 말씀’을 따르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불교의 ‘색즉시공(色卽是空)’에 충분히 담겨 있다. ‘색=우상’, ‘공=진리의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진리는 이처럼 종교를 넘나들며 회통한다. 그것을 자기만의 울타리에 갇혀 좁게, 이기적으로 해석할 때 종교간 다툼이 생긴다.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그런 좁은 공간을 비집고 태어난다.
얼마 전 개신교 중대형 교회들이 사회봉사단체 ‘한국교회희망연대’를 출범시킨 것은 의미있는 일로 평가할 만하다. 입으로만 반성과 참회를 되풀이했을 뿐 구체적 실천이 부족했다는 자기성찰의 과정에서, 사회의 그늘진 곳을 돕기 위한 봉사단체가 생겨났다. 수십년간 성장주의로 치닫는 목회활동을 해온 중대형 교회들이 앞으로 얼마나 실효적인 사회봉사활동을 펼칠지 지켜볼 일이다.
또한 불교계가 봉암사 결사 60주년 기념대법회를 통해 결의했던 참회와 자정을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구체적 현실로 서서히 나타나는 것도 바람직한 현상이다. 서울 도심사찰 봉은사와 화계사 등이 사찰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겠다고 선언한 일이 그것이다.
종교가 시대의 어둠을 걷어내는 새벽의 목탁소리가 되고 진정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스스로 투명해지는 것이다.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하는 진정한 힘은 바로 거기서 나오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