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법호지(正法護持)의 길

창간 9주년 기념 강연

2008-02-22     관리자

     [1] 무엇이 정법인가

   흔히들 불교는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일체중생을 위하여 설하신 법문인데 중생이 알아듣지 못할 말씀을 하실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러면 정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돌이켜 보건데 신라시대 우리 선인들은 불법을 잘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대로 행하였다. 개인생활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불법을 실천하였다. 신라의 우리 선인들은 불교를 잘 알아 실천 하였는데 그 후손인 우리가 못할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러면 신라시대에 우리 선인이 본 정법은 무엇이었던가?

     [2] 아상(我相)을 버려라

   신라인들은 이렇게 불교를 알았다. 수레의 두 바퀴처럼 알고 행하는 것을 함께 하였다. 그런데 그 수행의 근본은 아상을 버리는 것이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버리는데 그 근본이 아상인 것이다. 금강경의 핵심 법문도 아상을 버리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자기라는 아집을 버리는 데 법문에 핵심이 있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가 집착하는 이 몸이란 아무리 아껴도 어차피 슬어진다. 그 뿐만이 아니다. 어리석게 욕심 부리고 성질부려서 내생까지도 괴로운 과보를 받는다.
   그러면 이 몸은 어디다 어떻게 쓸 것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불쌍한 중생 이웃을 위하여 쓰자는 것이다. 어지러운 세상을 위하여 마치 촛불이 스스로를 녹여 불살라 세상을 밝히듯이 중생을 위하여 바치자는 것이다. 이것이 불도요, 정법이다.
   그러므로 불도의 수행자는 이기적 욕심을 버리고 자비심으로 이웃을 위하는 데서 비로소 보살자리에 들어 설 수 있는 것이다. 남을 위한 자비심으로 곧은 마음 깊은 마음으로 살아 갈 때 우리 힘은 부처님의 힘과 같게 된다. 곧은 마음이란 거짓 없는 마음이고, 깊은 마음이란 끝이 없고 변함이 없는 마음이다. 자비심, 직심, 깊은 마음이 성불종자이다. 육바라밀을 닦아서 보살은 마침내 무상정각을 이루게 된다. 이런데서 우리는 보살의 기쁜 자리에 머물게 된다. 믿음과 조촐함과 즐거움이 많으며 참아 견딤이 많고 다투기를 싫어하고 언제나 삼보를 믿고 의지하게 됨에 중생망심에서 벗어나서 기쁘다. 세간의 어려움에서 벗어나니 기쁘며, 악도에서 벗어나니 기쁘고 생사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니 기쁘다. 나에 대한 집착이 떠났을진대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을까? 설사 죽더라도 내 이미 아상을 끊었고 기쁜 마음 지녔으니 가는 곳마다 불보살님과 함께 하게 될 것이니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상을 끊는 것이 근본인 것이다. 아상에 사로잡히면 자그마한 그것에 자기는 한정된다. 그 밖에 모두는 자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상을 버리고 내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면 온갖 것이 내 것이다.

     [3] 전법(傳法)을 정법(正法) 삼다

   한 나라가 잘되자면 먼저 인물이 나야 된다. 훌륭한 사람이 나게 하는 것이 정신(正信)운동이다. 신라가 저 때에 저만큼 나라와 문물이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법이 전하여졌기 때문이고 법을 전하기 위하여 몸 바친 이차돈 같은 성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차돈의 순교적 전법을 통해서 신라에 불법이 들어오고 불교 사상을 토대로 한 인재가 양성되고 화랑도도 나왔다. 사람들이 자기 불만을 알아서 자신의 충족만을 추구하는 데서는 높은 문화가 생길 수 없고 큰 인물이 나올 리 없다. 반면에 자기 일신만을 위하여 급급하는 생각을 버릴 때 위대한 종교가도 정치가도 학자도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불교는 이 몸은 꿈이며 환(幻)인 것을 일깨워 주고 마음을 닦아 참 나를 찾는 생활을 하게 하고 중생을 위하여 그를 도우며 그를 또한 바른 마음 닦도록 가르치는 것이 가장 값있는 인생임을 말해 준다. 신라인은 정법을 이렇게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행하였다.

     [4] 원효의 전법정신

   역사를 살펴보면 고승대덕이 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반짝인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 원효 스님이다. 원효 스님은 세간사 만사에 능통했다. 학문도, 무술도, 노래도, 춤도, 거문고도 능란 하였다. 출가해서 30대에 이미 대화엄학자가 되었다. 내가 원효 스님을 존경하는 데는 그러한 능력, 업적 때문이 아니다. 학문이나 계율로 말하면 어쩌면 그 분을 능가할 만한 분이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원효 스님을 존경하는 것은 그의 전법생활에 있다. 원효 스님은 다들 아는 바와 같이 중국으로 의상 스님과 함께 구법의 길을 떠났다. 도중 요동에서 갈증에 지친 어느 날 밤 해골바가지 물을 모르고서 단 꿀처럼 마셨다가 날이 밝아 총루물임을 알자 온 창자가 뒤집혀 나오는 것을 느낀 데서 이른바 대오(大悟) 일번하였다. 마음이 나면 종요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종조법이 멸한다. 부처님의 이 말씀을 몸으로서 깨달았다. 일체가 유심조(一切有心造)다. 온갖 것의 근본이 내 마음이다. 이 근본인 마음을 요달하였으니 다시 무엇을 구하여 당(唐)으로 가랴 이런데서 발길을 되돌린 스님이다. 원효 스님의 위대한 점은 소위 요석궁 사건 이후의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영예로운 자리를 마다하고 오직 집집마다 다니며 걸식하며 표주박을 차고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며 방방곡곡을 돌았다.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 사람을 모아 놓고 함께 모여 소리 높이 염불하고 부처님 말씀을 알아듣기 쉽게 연설하였다. 무엇이 가장 올바른 삶의 길인가를 쉬운 말로 알려 주었다. 신라 사람은 원효 스님의 이 무애전법행으로 해서 불법을 만나게 되었고 나라는 융성하고 문화를 꽃피우게 되었다. 원효 스님이 교화하셨던 오늘의 경상도 지방이 지금까지 불교가 번창한 것을 보면 위대한 한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다.

     [5] 선인들의 구도정신

   인도에서 발생한 우리 불교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이르게 된 것은 평탄한 길을 흘러 온 것이 아니다. 세계의 지붕이라 할 히말라야를 넘고 다시 몇 천리에 뻗힌 사막을 넘고 다시 끝 모를 협곡의 길을 지나서 중국으로 왔다. 인도로 구법의 길을 떠났던 스님들이 100명이 떠나면 살아 돌아오기가 극히 드물었고 5 · 6명이 살아오면 많은 편이다. 우리 신라의 혜초 스님도 당에서 배를 타고 남으로 인도로 갔고 돌아오는 길은 산을 넘고 사막의 돌풍을 뚫고 중국으로 돌아 왔다. 무엇이 있어 이 험난한 죽음의 길을 뚫고 오고 가고 하게 하였던가? 금강경에 이르시기를 이 경의 법문 한 구절을 전해 주는 공덕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로 공양한 복덕으로도 비교할 수 없다 하였다. 저때에 스님들은 한량없는 부처님 공덕 앞에 이 몸뚱이를 바친 것이다. 이 몸을 버려서 구할 수 있는 최상의 가치로 불법을 전하는데 두었다. 이 몸을 천만번 바쳐도 아깝지 않은 가치를 거기서 보았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와 같은 불법을 만나 배울 수 있게 된 것도 저때의 스님들이 목숨 바쳐 법을 배우고 전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정법호지의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부처님 법음을 전하는데 있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불광법회 여러분은 오늘의 발전에 머물러 있지 말고 선사 스님의 전법행도를 본받아 적극 전법에 헌신하는 것이 정법호지의 길이라고들 말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식자들 사이에는 기복 불교를 타락 불교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복 짓는 것이 무엇이 나쁘단 말인가. 복을 짓지 아니하고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모름지기 법을 전하는 최상의 복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복을 받아 누려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