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로부돌을 찾아서

서경수 칼럼

2008-02-22     관리자
  [1] 자바섬의 종교사

  지난 해의 연말, 인간이 창조한 석조물 작품 중 규모의 거대함에 있어서나, 다양한 조각의 예술성에 있어서나 단연 으뜸으로 손꼽히는 보로부돌의 불교유적을 다시 찾게 되는 행운을 얻었다. 구경한다는 생각보다는 성지를 순례하고 유적을 답사한다는 생각이 그 자카르타에 머물기도 했다. 조그자카르타는 자바섬의 역사에 그 이름이 자주 나오는 옛날 도시다. 자바섬의 종교사는 조그자카르타의 거리 풍경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거리의 풍경이나 사람들의 모습에서 이슬람교가 우세한 지위에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인도의 시골에서 흔히 눈에 띄는 힌두교 사원도 간간히 보인다. 교외에는 10세기경에 건립했다는 힌두사원이 있고, 사람들은 브라흐마신을 모셔 놓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다신적(多神的) 성격을 가진 힌두교이므로, 브라흐마뿐 아니고 비쉬누, 쉬바 등이 다양하게 안치되어 있다. 바로 그 곁에 백색 대리석으로 건립된 이슬람사원 즉 모스크가 나란히 서 있고 힌두사원과 모스크의 대문은 마귀의 침입을 막아 준다는 거대한 토속신의 가면으로 장식되어 있다. 원색적인 토속신 가면은 쳐다보는 사람에게 강렬한 심리적 압박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불교에 관련된 사원이나 탑 등은 시내에서는 찾기 어렵다. 박물관에 진열된 불상과 탑 부분들이 조그자카르타의 원근 주변에서 발굴되었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현재 조그자카르타 시내와 부근에는 불교사원이나 탑 유적을 볼 수 없느냐고 박물관 연구원에게 물었더니, 샤일렌드라 왕조(8세기경)시대의 불교사원과 탑 등이 유적으로 남아있음은 추측되지만 아직 유적지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대답이다. 그리고 그 자신은 모슬렘이고, 이슬람교에 관련된 자료 연구에 종사하고 있으며 고대 아랍어로 쓰여진 금석문판독이 자기의 전공분야라고 자기 소개까지 덧붙인다. 또 조그자카르타 박물관에는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유물•유적을 다루는 연구관은 있으나 불교와 관련된 유물•유적을 전공하는 연구관은 아직 없다고 말한다. 조그자카르타 시내에 힌두교도와 모슬렘은 있으나 불교도는 없다는 사실과 잘 부합된다.
  태고적 원시신앙이 민심을 잡고 있었던 5세기경부터 태국과 말레이 반도를 거쳐 힌두교가 들어와 고유의 토속신앙과 융합하면서 힌두교는 토착하기 시작했다. 유일한 주신도와 배타적 교리도 고집하지 않는 힌두교는 쉽게 폴리네시아의 토속신앙과 융화되었다. 그러다가 7, 8세기경 이번에는 불교가 힌두교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모든 신앙을 다 받아들인다는 대승불교가 한 때 왕권의 비호까지 받아가지고 전성을 이루었다. 자바섬에 불교사원이나 탑이 여기저기 세워진 것은 이 무렵이다. 대승적인 입장은 불상이나 보살상뿐 아니라 힌두교의 여러 신들까지 받아들여서 탑에도 조각하였다. 보로부돌의 제1 회랑 양쪽 벽에 조각된 힌두교의 신들이 이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여 주고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를 비호하여 거대한 보로부돌까지 완성했던 샤일레드라 왕조의 제8대 왕은 불교에 등을 돌리고 다시 힌두교로 개종했다. 외부세력의 압력도 있었겠지만 이보다도 토속신앙과 밀착된 힌두교가 일반 민중의식의 저변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힌두교의 시대는 12세기경부터 염소나 닭 요리에 필수적이고 장기저장에도 필요한 스파이스의 구입을 위하여 찾아온 아랍상인과 함께 전래된 이슬람 시대로 교체되고 자바섬은 이슬람교의 문화로 바뀌기 시작한다. 현재 자바섬의 종교인구 분포는 이슬람교도 즉 모슬렘이 90퍼센트를 점하고 있다.

  [2]보로부돌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문화가 득세하던 시기에 보로부돌은 망각의 밀림 속에 깊이 감춰진 채 잠자고 있었다. 보로부돌이 세계의 이목을 끌도록 햇빛을 보게 한 것은 19세기 초엽 자바를 지배하던 영국 식민관리의 발견과 발굴작업에서 비롯된다. 그 후, 이 세계적 문화재는 그 종교적 예술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어 대규모의 보수작업을 국제기구인 유네스코가 담당하기에 이르렀다.
  보로부돌의 유적은 사각형의 석조단이 6층, 그 위에 3층의 원형단이 있고, 정상부에 대 탑이 솟아있다. 그런데 기단의 일변 길이가 120미터, 전체 높이가 50미터, 75만 개의 바위와 돌이 소요되었다는 기록은 그 규모의 거대함을 말해준다. 가까이에서 쳐다 볼 때, 이것을 하나의 거대한 탑이라고 할는지, 아니면 사방을 수많은 사원과 탑으로 뒤덮은 언덕이라고 할는지, 한 마디로 형언하기가 어렵다. 단마가 회랑이 있어 돌아가면서 참배하도록 되었고 회랑의 바깥 편은 난순(欄楯)으로 낮은 돌담으로 돌려져 있다. 그리고 회랑의 안쪽 벽과 난순쪽 벽에는 1,500여 개로 구획된 파넬에 여러 가지 소재가 부조(浮彫)양식으로 조각되어 있다.
  파넬의 소재는 주로 불전문학과 불교설화에서 따왔다. 특히 첫째 회랑은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 즉 본생담과 아바다아나(비유전기)로 꽉 차 있다. 두 번째 회랑부터 네 번째 회랑까지는 해탈에 이르는 과정을, 선재동자의 53선지식 구법역성으로 비유, 예증하고 있다. 그래서 보로부돌의 구조적 형태는 화엄경의 세계를 이 지상에 구상화(具象化)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화엄계의 학자도 있다. 원형으로 된 단 주위에는 72채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노천에 안치된 불상도 있고, 돌담 속에 안치된 불상도 있다. 정상 가까이에 있는 돌함에는 불상도 없고 텅 비어 있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밀교의 경지다. 그래서 밀교계의 학자는 보로부돌의 전체를 우주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거대한 <만다라>로 해석하기도 한다.
  넓이가 2미터에 이르는 회랑 양편에 부조된 파넬에 등장한 인물만도 1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그 다양성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이 꿈 속에서 코끼리를 보고 부처님을 잉태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한 부처님의 전기는 가장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그런데 파넬 하나가 하나의 암벽으로 된 것이 아니고 여러 조각의 돌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여러 조각의 돌에 조각된 인물의 부분이 모아져서 파넬 속에 한 인물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네스코가 보수작업을 할 때, <보수>에 그치지 않고 <원형 복원>을 시도한 것은 잘못으로 지적하고자 한다. 마멸된 부분을 20세기의 기법으로 조각한 새로운 돌로 대치하면 파넬 전체의 인상은 손상을 입는 법이다. 불상이 마멸되어 없어진 자리에는 없어진 그대로 보존해야지 다른 돌에다 오늘의 기법으로 조각한 모조 불상으로 대치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한 마디로 유네스코의 보수작업이 보수의 정도와 한계에 민감하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보로부돌의 방향은 동쪽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동쪽에서 기단 위의 문을 통하여 오른쪽으로 회랑을 돌면서 참배한다. 거창한 돌문도 험상궂은 토속신의 돌 가면으로 장식되어 있다. 외부로부터 침입하는 마귀나 잡신들을 막아주는 사천왕적 존재다. 토속의 귀신은 외래의 수호신보다 토속의 수호신이 더 잘 막아 주는가 보다. 토속의 수호신과 함께 파넬에는 힌두의 여러 신들도 부처님이나 보살의 수호신을 등장하고 있다. 밀교에 나오는 타라여신까지 눈에 띈다. 자바섬에 전래된 불교는 밀교적 요소가 다분히 가미된 대승불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여신상이면서도 인도의 여신상과는 그 모습이 다르다. 우선 인도여신의 풍만한 유방이 풍기는 육감적 격정적 느낌을 찾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보로부돌의 조각 작품은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불교교리의 3계 즉 욕계•색계•무색계 중에서 욕계를 상징하는 기단부의 조각이 세속의 쾌락생활을 표현하면서도 인도식 극단은 피하고 중용의 길을 택하고 있는 듯 보인다. 연간 30도 전후의 기후조건과 심한 태풍도 없고 우기에도 매일 규칙적 스콜이 적당한 우량을 주고 있고, 일년에 3모작까지 지을 수 있다는 자연조건이 과격보다는 온화한 중용의 길을 택하게 했을는지 모른다. 따라서 보로부돌의 조각은 대승보살의 자비를 나타내는 듯 부드럽고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