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하나로 족한데

禪心詩心

2008-02-20     관리자
  중국의 당나라 때 국청사(國淸寺)에 습득(拾得)이라는 스님이 부엌일을 맡아 하고 있었다. 이 스님이 먹다 남은 채소나 음식들을 통에다 담아 두면 한암(寒巌)의 토굴에서 사는 걸인차림의 스님이 내려와서 아무 말 없이 거두어 간다. 이 스님이 한산(寒山)이라고 전하는 스님이다. 그러나 이들의 시대가 어느 때인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다만 이 두 스님의 시가 널리 알려져 선적 초탈의 경지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시는 그의 이러한 생활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으슥한 데 살기 익숙해졌고
          이따금 국청사로 내려 간다.
          어쩌다 풍간(豊干) 노승을 찾고
          뒤따라 습득(拾得)을 보러 가네.
          홀로 한암 바위에 오르면
          뜻 맞는 이야기 할 사람도 없다.
          근원 없는 물 찾아 가면
          근원 끊겨도 물은 끊기지 않네.

          慣居幽隱處 作向國淸寺 時訪豊干老 伋來看拾公
          獨回上寒巌 無人話會同 尋究無源水 源窮水不窮

  모든 것을 초탈하여 그저 뜻대로 오가는 모습이다. 풍간도 국청사에 있었던 스님으로 생각된다. 이 세 스님은 말없이 통하는 처지였나 보다. 이유가 있어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만나지는 것이요. 이유가 있어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말하여지는 것이요. 그저 웃어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다시 한암으로 돌아 가는 것이다. 돌아가 근원 없는 물을 찾는다. 근원이 없으면 어떻게 물이 있을 것인가? 속인들에게는 참으로 부질없는 말이다. 세 스님이 만났을 때의 일체 동작이 역시 근원 없는 물이다. 어떤 이유가 있어 만나거나 말하거나 웃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만났고, 말했고, 웃었다.
  물 근원을 찾아 끝까지 가면 분명 그 원점이 있다. 곧 근원이 끝난 것이다. 그러나 물은 거기서 흐르기 시작하여 계속 흐른다. 물은 끊김이 없다. 그렇다면 분명 근원이 없는 물이다. 말 없이 만나 뜻 없이 웃고 헤어졌다 다시 그렇게 또 만나 또 웃고 헤어진다. 분명 근원이 없는 물이다. 역시 근원에 집착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집착을 여윈 동작들이다. 이 분들은 속세에서 삶을 누리더라도 그런 마음이나 행위는 변함이 없다. 아니 속세에 살면서 그러해야 더욱 더 선적인 것이다. 다음의 시는 그런 점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책이나 거문고 절로 따르니
          녹 받는 자리야 쓸 데가 있나
          수레 버리고 아내와 함께 걷고
          농사 길에는 착한 아들 있겠다.
          바람 불어 나락 멍석 말리고
          물 불어 못 고기 살찌운다.
          늘 생각하건대,
          저 뱁새의 몸은
          가지 하나라도 평안한데∙∙∙∙∙∙

          琴書須自隨 祿位用何爲 投輦從賢婦 中車有老兒
          風吹曝麥地 水溢沃池魚 常念鷦鹩鳥 安身在一枝

  산사에 사는 스님의 시라 할 수 없을 만큼 세속의 생활적 시다. 그러면서도 탈속한 분위기다. 종성입범(從聖入凡)이요 종범입성(從凡入聖)의 묘유경계라 하겠다. 선사이면서 속인이요, 속인이면서 선사인 것이다. 이것이 한산에서 그 많은 시를 남겨 놓게 했던 것이다. 위에 소개된 시의 분위기는 과거 소위 산림처사나 혹은 전원을 사랑하는 시인들이 기원했던 분위기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던 것은 뱁새처럼 가지 하나로도 만족했어야 할 것인데, 욕심에 가려 온 숲을 다 차지하려 하기 때문에 다음과 일이 일치하지 못한 것이다. 한산이나 습득은 일찍이 이 뱁새의 나뭇가지를 알았기에, 남이 먹다 남긴 채소 한 쪽으로도 서로를 알고 웃으며 담담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