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포교수기] '불교군인' 이 이 된 사연

나의 布敎 수기

2008-02-18     관리자

포교에 사명감을 가지고 뛰기 시작한지도 몇 년인가 해가 거듭되었다. 74년 3월 육군불교장교회 교화부장을 맡으면서 국방부의 추천으로 종단으로부터 정식 포교사 임명을 받긴 하였지만 나의 포교는 어쩌면 발심과 함께 시작됐는가 한다. 포교의 내용이나 성과는 볼만한 것이 안될지 몰라도 포교는 믿음의 표현이라는 것을 나는 사뭇 일찍부터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살행을 실천한다는 것은 스스로 닦는 것이고 스스로 행하는 것이다. 바른 지견(知見)을 연마하고 바른 믿음을 깊이 하며 깊이있는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한다는 것이 이것이 보살도가 아니겠는가. 믿음의 실천이라는 것은 그것이 홀로 앉아 염불하거나 독경하거나 참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거치른 사람들에게 너그럽고 따뜻하게 대해주고 정신적으로 헤메는 사람에게 염불 한구를 권한다든가 법회에 안내하는 일까지 그 모두가 실로는 바로 포교인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로 시작하여야만 포교인 것이다. 나는 불보살님께 효순(孝順)한다는 것을 곧잘 생각한다. 그리고 부처님께 효순하는 길은 믿음을 바로 세우고 믿음을 관념 속에 가둬두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며 나아가 법을 전하는 것이 효순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수행은 바로 전법(傳法)이며 나의 전법은 바로 믿음의 실천이며 이 모두는 부처님께 효순하는데 일치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나에게 있어 수도는 바로 포교이고 포교는 바로 수도인 것이다.

나의 전법생활에 있어 항상 내 앞은 비추어 주는 빛이 있는 것을 숨길 수 없다. 그것은 부처님 당시 부처님 10대 제자 중 설법제일이라 이르던 부르나 존자에 관한 이야기다. 미개하고 성질이 난폭한 슈로나국으로 포교를 떠날 때 「거룩한 법을 펴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치겠다」 한 그 말씀이다. 나는 이 말씀에서 포교사로서의 나의 정신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내가 부처님 앞에 나가 나의 깊은 귀의를 선서한 것은 1966년이다. 그때부터 나는 부처님께 효도하자는 생각을 가졌고 그러기 위하여 성과 열을 다 바쳐 전법할 것을 생각했으며 부르나 존자의 고사(故事)도 알게 되었다.

군에서의 내 병과는 병기(兵器)였다. 사단참모로 있을 때 나는 군내에 법의 등불을 밝히려고 법당 건립을 시작하였다. 법사도 없는 사단에 법당이 섰다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의 동분서주 좌충우돌하는 열성은 많은 분들의 협조를 얻어 드디어 낙성을 보았다. 잊을 수 없는 72년 12월 30일의 일이다. 부대내에 혹은 부대 외에 불교신도회를 묶어 법회를 보았으며 부처님 오신날이면 등불을 밝혀 봉축행렬도 대대적으로 하였다. 법당을 불자의 힘을 키우고 불법의 빛을 발하며 불자의 힘을 모으는 중심으로 삼아 여러 가지 모임을 꾸려나갔다. 역시 모든 사람 가슴 속에는 보살님이 있는 것이어서 마침내는 서로 돕고 기뻐하는 알찬 결실을 거두게 되었다.

74년 이후는 육군본부에 나와 있는 때였다 나는 불교를 통한 군 . 민 일체화를 곰곰히 생각했다. 그리고 틈만 있으면 종단과 사찰과 신도단체를 찾아다녔다.

그리하여 군불자와의 유대를 약속하고 스스로 그 교량역활을 할 것을 다짐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 중에 지금껏 생각나는 것은 「한국음악회」와「여군단」과의 자매결연, 관음회 회원들의 1일 입대, 영사기 기증이다. 군의 존재가 한낱 국방에만 그치지 않고 군의 정신이 국민 일반에게 미치게 하여 협동하고 이해하며 함께 조국을 지켜 나갈 정신이 은연중 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군법당이라도 일반신자들의 법회장소로 지원하기도 하고 75년 정월 초하루날에는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 장병들에게 대법회를 갖고 떡국공양을 또한 크게 베풀기도 했다.

나는 대개 녹음기를 휴대하고 다닌다. 그리고 부처님 노래, 염불, 독경 등 몇 개의 카셋 테이프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나의 행장이 되고 있다. 서부전선 법당이 없는 부대에 내가 자진 법사가 되어 정기법회를 갖게 되면서부터의 일이다. 버스 안에서도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길에서 쉬면서도 독경테이프를 돌렸다. 이발소에 가서도 염불녹음을 재생하였다. 아마도 현역 육군 중령 차림의 염불도가 기이하게 보였는지 많은 분들이 호감을 가지고 내 주위에 모여 들었다. 가는 곳마다 기회를 만들어 이렇게 하고 지나니 자연 불교에 관한 이야기는 퍼질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메마르다고 거칠고 비종교적이라고들 하지만 보기에는 결코 그렇지 않다. 모두가 부처님 말씀에 관심이 있었고 염불을 알고자 하였으며 따뜻한 마음자리를 소복소복 가지고 있었다. 나의 포교 활동, 아니 신행(信行)활동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고 무척 보람을 느끼는 일들이었다. 내가 군에서 틈틈이 포교한 결과가 제대한 청년들 사이에서 믿음의 성장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나는 정말 가슴이 뭉클했다. 사회의 법회에 다니다 보면 군대에서 나와의 만남이 불교의 시작이었다는 말을 하는 청년들을 곧잘 만나는 것이다.

군인이면 이미 조국 앞에 목숨을 바친 바이지만 그래도 일요일이면 간혹 집안에도 있을 수 있는 것인데 부처님을 믿으면서부터 나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일요일이면 다른 부대에까지 쫓아다니며 포교를 하고 보니 집에 붙어 있는 날이 있을 리 없고 따라서 처음에는 집사람으로부터 적지 않은 불평도 받았었다. 내가 비록 군승병과는 아니지만 수 많은 불자들이 모여 나를 기다리는 것을 생각할 때 어떤일이 있더라도 가지 않고는 못배겼다.

부처님의 법이 군대의 정신을 바로 세우고 청년의 자세를 바로 잡아주며 나아가 굳건한 국가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약간의 고난은 문제가 아니었다. 불법이 방황하는 청년들의 길잡이며 군 정예화와의 정신적 지주이며 통일의 등불임을 굳게믿기 때문에 고난을 믿고 나아가는 하루하루에 용기와 기쁨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요일은 말할 것도 없고 평일에도 일과만 끝나면 불교일로 모든 시간을 보냈다.

시간만 있으면 교도소, 소년원에도 갔었고 기타 사찰이나 포교당에서 교리법회도 실시하였다. 지난해 3월부터는 서울 영등포 문화촌에 10살 전후 어린이를 모아 어린이 법회를 실시하였는데 어린이 사회니만큼 부처님 말씀에 반응이 민감하고 순수한 곳도 없어보였다. 금방 50명 가량이 모였고 그를 방해하는 0 0 교도들이 꼬이고 모함하여도 아랑곳 없이 나만 가면 모여들었다. 저 순진한 마음이 바로 보살심일진대 그 마음을 훼방하는 장사꾼들이 정말 불쌍했다. 어린이들이 지금도 눈을 반짝이며 찬불가를 부르고 고사리 손을 모아 소리 높이 염불하고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의 녹음기는 좋은 포교기재다. 가는 곳마다 포교당을 만들어 주었다. 등산길목 유원지 놀이터 다 좋았고 버스 기차 안에서도 좋았다. 자주 지나가는 골목 구멍가게 앞에도 효과가 좋았다. 염불소리가 울리면 길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불교이야기로 번져갔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나의 별명은 「불교군인」이다. 불법을 전하는 마당에 점잖은 체면 자존심 따위가 다 무엇이냐, 어떻게되든지 모든 이웃에게 부처님 말씀 전해 주어 저들을 복되게만 하면 고만인 것이다.

배우고 실천하고 포교하는 이 길이 불자로서의 나의 길임을 굳게 믿으며 모든 중생이 바라는 참 포교를 꼭 해보자는 것이 지금의 내 신념이다. 자랑할 건 못되지만 군복위에 녹음기 메고다니는 나의 포교기행을 약간 적어 보았다.

<조계종중앙포교사 예비역 육군중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