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보듯이 길을 가듯이

보리수그늘

2008-02-12     관리자

독서를 통하여 얻었노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럽고, 그나마도 이쪽 지식과 저쪽 사실이 때로 모순을 일으켜, 그 짧은 밑천 속에서도 당황함이 상존(常存) 하는 내 지식 세계.

남만큼은 교육도 받았고, 그러지 않을 나이도 되었음이 분명한데도, 군것질하는 아이들 틈에 끼어 앉고픈 내 체신머리, 나 자신 결코 위대한 음악가가 아니면서도, 틀린 음정 하나에 마치 절대자처럼 신경질을 부리는 서글픈 절대아(絶對我).

이 모든 것에 서른넷 해의 짧은 세월까지 가세해서, 바늘구멍으로 창공을 내다보는 모양이 되어있는「나」.

이런 나의 바탕에, 인생은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일까? 한없이 허약해 질 수도 있고, 끝없이 비굴해 질 수도 있는 「나」이기에, 적어도 현상세계에서 닥쳐오는 생활의 책임만큼은 회피하지 않으려 하고 그런대로 떳떳이 살아왔다고 자부함에도 불구하고, 「인생」이란 낱말 앞에서는 도저히 허세를 부릴 수도, 바늘구멍으로 내다 본 것으로 정의를 내릴 수도 없다.

「나는 이렇게 살겠다」고 하는 말과 글을 간혹 접해 본 바 있으나, 내 소견으로는 각자의 생활의 가치관과 자기대로의 고집스런 생활 규칙을 피력한 것이지, 「내 인생은 이런 것이다」고 주장한 글은 없었을 것으로 믿는다.

인간의 생활-그 자체를 「인생」이라고 단순화 시킨다면 모르겠으나, 내 생각으로는 그보다는 한 차원 위의 「인생」에 대한 정의가 따로 있을 것으로만 믿어져, 더욱 당혹하게 된다.

어릴 때는 「나」에 대한 의식 한 점 없이 그저 장난치고 꾸중 듣고 먹고 자고하며 살고 있었고, 조금 나이가 들었을 때, 슬그머니 사라질 수만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럴 재주가 전혀 없는 곤란한 「나」, 그리고 그 후회스런 일을 저질렀음이 확고부동한, 장본인인 「나」에 대한 의식이 있었을 정도이고, 그 결과로 잘 모을 훨씬 덜 저지르는 「나」가 현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 이후에 발전한 것이 있다면 생활에 더 큰 책임을 질 수 있는 역량을 키워, 더욱 능동적으로 살기로 한 정도이다. 「나」의 시원(始原)을 밝혀내지 못하는 자신으로서는 정해진 인생의 방향과 밀도, 그리고 최초에 부여받은 책임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알아 낼 도리가 없으니 그나마도 기특한 생각이 아닐까.

시드는 풀, 낙엽 지는 나뭇잎, 흘러 내려가서는 아득한 창공으로 떠서 되돌아온다는 산골짜기의 물줄기, 미워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그러다간 아름다운 말로 찬양하고, 혹은 무서운 말로 매도하는 「나」, 그리고 시작과 종점을 모르는 내 생존의 여행길. 하나도 알아낸 비밀이 없으니 그저 성실히 살아 갈 수 밖에. 울고 웃고 그리고 당황하며 사라갈 수 밖에. 학처럼 훌쩍 떠나야 할 그때까지는, 모르는 듯이 아니면 업는 듯이, 시선을 멀리 두고 달을 보듯이 길을 가듯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

(부산 시립합창단 상임지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