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선사와 구한말의 불교 (5)

♣ 최근세 불교의 선구자

2008-02-11     관리자

9. 근세불교의 중흥조

대개 경허를  두고 대선사, 또는 대선지식이라 하여 선제의 중흥조로 역기는 데 있어서는 누구나 이의가 없다. 그것은 경허가 차지해야 할 당연한 불교사의 위치라 하겠거니와 필자는 더 나아가서 선계 뿐만 아니라, 구한말 근세 불교의 중흥조로도 경허를 높이 평가해야 하리라 본다.

그런 의미에서 경허가 선계나 불교계에 있어서 영향력을 끼친 점을 생각나는 대로 요약하여 더듬어 볼까 한다.

한국불교사 속의 사상적 조류를 대략 여섯가니로 나누어 보는 것이 사상사적 고찰이거니와, 이를 다시 줄여서선. 교 양종에 포함시켜 볼 수도 있다. 즉 깨달음의 세계를 언어와 문자로 추구해 들어가는 논리적인 교와 의리나 지해를 버리고 실수를 통하여 일심 정원에 이르러 가는 선으로 대별하는 것이다.

한국불교는 선. 교를 근간으로 하여 여러 사상적 흐름들이 때로는 단독으로, 또 때로는 혼합되어 소장해 왔다. 신라에는 비교적 5교나 9산으로 화려한 문을 열었는가 하면, 고려에도 역시 교의 5종과 선의 양종으로 풍성한 시대를 맞았다.

그히하여, 불교는 우리문화의 기간으로서 심오한 철학과 탁월한 예술을 낳았고, 정치 ㅡ 경제의 지도 이념을 구축하는 토대가 되었으며, 일반 민중의 민속과 풍습등 생활문화 전반에 걸쳐 지배적 영향으 미치면서 성장해 왔다.

불행히도 숭유억불의 이조시대에 들어 서면서 불교의 영향력은 매우 감퇴되고 만다. 특히 이조 초의 태종과 세종 시대에 접어 들어 외부의 작용에 의하여 16종을 폐합하여 선 교 양종으로 못을 박아 놓은 것은 위축의 한 현상이다. 이 선 교 양종은 사실상에 있어서는 선종계의 조계종에 의하여 단일화되었으며, 단일종인 조계종이 여타의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여 가까스로 한국불교의 명맥을 유지해 왔던 것이다.

이렇게 선종이 주축이 된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선적 수행의 풍토는 사찰에서 거의 찾아 볼 길이 없을 정도로 미미해져 버린데 반하여, 도리어 화엄교학의 강종이나 정토신앙의 염불종등은 크게 번성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신앙의 속과 겉이 다른 기형상을 빚은 시대가 이조 중기 이후의 불교계의 상황이며, 또한 경허 당시의 실정이었다.

다만 선종이란 허울만 남고 실지에 있어서는 표신내교식이 되어 버린 이러한 한국불교의 풍토 속에 끊어진 선의 명맥을 다시 잇고 선의 얼과 선의 바람을 크게 불러 일으킨 돌출한 선의 준봉이요 꺼진 법등을 다시 밝힌 조사가 바로 경허이다. 경허야 말로 19세기말, 20세기초에 걸쳐 한국불교사에서 일시에 선풍을 진작히키고 재흥시킨 선이 중흥조이자, 선의 주인공인 것이다.

경허는 무엇보다도 선이 성불의 첩경임을 알리고 선법의 소중함을 오쳤다. 그의 이같은 주장은 다시 불교계에 크게 자극을 주며, 절 집 안에서 큰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그 결과 선풍을 일어나 발심한 납자들이 늘어나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선실이나 선원이 개설을 보게되었으며, 또한 문하에서는 많은 선장들이 배출되어 나왔다.

그리하여, 골격이 바로 서지 못해 지리멸렬하기 그지 없었던 불교계를 혁신함으로 해서 명실상부하게 선 중심의 불교로 전환을 가졌왔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할 때 선불교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선 중심의 불교로 되겠금 한 당사자가 바로 경허인 것이다.

또한 경허의 선풍이 구한말의 정시사에 미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신라말 정치적 질서가 붕괴되면서 혼란이 시작됙 무렵에 선종이 교종을 대신하여 민중 의 정신계에 새로운 정신의 지주로 등장해 안심입명의 길을 열어 준 바가 적지 않았다. 특히 지방에 산재되어 세격을 굳히고 있었던 호족들은 정치적 상황에 민감하여 심하기가 일수였다. 그들에게 좌선은 가장 좋은 수양의 방법이었으며, 자아실현을 내세우는 견성오도는 더 더욱 그들의 적서에 맞는 길잡이요 의지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선종사상은 후삼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호족들의 신앙으로 크게 세력을 떨치며 서민 대중을 포섭해 민심을 수습하는 데 기여 하였다.

구한말 정치상황이 어지럽고 민중이 불안에 떨 때 경허를 통해 다시 선풍을 맞게 된 근세의 사상계에도 신라때처럼, 선의 영향은 많았을 것으로 믿는다.

경허의 일화 중에 나오는 정처사라든지, 묵군자등은 경허의 영향밑에서 삶의 터전을 찾았던 일례라고 생각된다. 경허가 비승 비속으로 지낼 무렵에 사귀었다는 김담여나 김영항도 경허의 선사상을 은연중에 입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 만공은 일정 시 총독부에서 회의중에 총독의 망언을 웅변으로 호통쳤으니, 이도선 기질에서 다져진 경허의 수제자다운 면모라 하겠거니와, 33인 중의 한용운 역시 독립항거에 초지일관하여 결행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인격 형성에 선 사상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허의 선 사상은 알게 모르게 일반 사상계나 민중 의식구조와 인격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감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피력한 줄거리를 정리해 보면 1선의 명맥을 다시 이은 점 2선이 성불의 첩경임을 일깨운 점 3선중심의 불교로 전환을 가져온 점 4한말의 정신사에 미친 선의 영향 등으로 열거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경허는 단순한 선계의 중흥조일 뿐 아니라, 근대 한국 불교계에 큰 획을 그어 준 뛰어난 스승으로 봐야 마땅할 것이다.

10. 형식을 넘어선 무애행

걸림없이 막식막행 하는 경허의 무애행에 있어서는 우선 수제자 만공이나 한암부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만공은 스승 경허를 평하여 말하되

"좋은 점은 부처를 능가하고 나쁜 점은 호랑이 보다도 더 하다....... " 고 토로하였는가 하면, 한암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후인들이 경허스님의 법력을 배우는 것은 옳지만, 행위를 본받아서는 안된다" 라고 하여, 한결같이 경허의 행위를 닮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물론 불법을 모르는 범인들이 경허의 깊은 내면성일란 아예 배우려 들지 않고, 외형만 따라 함부로 막식 막행을 자행한다면 그것은 위험 천만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그런것을 염려한 나머지 후인들에게 경고를 하였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