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의 구름을 헤쳐준 인연법문

불광 구도발표

2008-02-07     관리자

 1, 법인가 부처님인가

 4년 전에 저는 한 스님을 찾아가 이렇게 여쭌 일이 있습니다. 「불교는 부처님이 가르치신 법을 믿는 것이지 부처님이란 우상을 믿는 것은 아니지요?」그러니까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런데 지금은 가르침을 믿지만 나중에는 부처님을 믿게 된다. 」

 그 당시는 어리둥절하게만 했던 그말씀이 요즘 와서 제게 절실히 다가옵니다.

 저는 조금 안 불교지식을 갖고 불교를 믿는답시고 생각하며 살았었습니다. 저 나름대로의 휘황한 아집, 틀을 만들어 그것이 전부인 양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제가 정한 그 틀에 끼워 맞추려 하였습니다. 그 때 그것을 아마 전법이라고 생각했었던 모양입니다.

 즉 「진리, 진리생명 그 자체, 모든 허공의 열매가 나와 더불어 한 뿌리이고 내가 그 뿌리 자체인데, 저 태양이 아무 이유 조건 없이 빛을 퍼부어대듯, 저 꽃이 아무 이유 조건 없이 자기 생명을 마음껏 발휘하듯 나도 저들과 같은 한 생명의 뿌리이니 오직 아무 이유 조건 없이 마음껏 생명을 발휘하며 살리라.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남녀노소 구별없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깃든 보석과 같은 불성를 진실로 인정하고 대해 주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내 앞에서는 보살이 되리라.」라는 생각으로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밝고 성내지 않고 삿된 욕망을 갖지 말자며 생활하다 보니 모든 감정이 마비되어 오히려 감정둔화 상태에 이르는 것 같아 두려움이 느껴졌습니다.

  2. 회의의 구름 속

 그러다 하루는, 의대생인 제가 병원에 정신과 실습을 나갔을 때 거기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신들린 여자를 보았는데, 그여자는 집에 자기의 조상을 모시고 점치고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는 여자였습니다. 조상의 신이 들린 여자인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때 요사스럽고 매우 미혹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저희 집에 모신 부처님 옆에 걸어논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사진이 생각난 것입니다. 아버지는 매일 새벽 그 방에 가셔서 독경과 관음정진을 하시고 할아버지사진 앞에 절을 하셨었습니다.

 그 여자를 보고나니 그 일들이 마치 무당들이 자기 집에 부처님과 조상을 모셔놓고 절을 하는 것 같아 무서웠습니다. 혹시 조상을 깍듯이 모시다 나도 그 여자처럼 조상신이 들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는 그 생각에 꿈자리가 편치 않았습니다. 그 무서움 앞에는 아무리 큰 진리란 것도, 상대가 끊어진 뿌리를 생각하여도 생각으로는 도저히 안되었습니다. 하도 무서워서 스님을 찾아뵙고 여쭈니 그 사진 앞에서 아침에 반야심경 21편, 저녁에 금강경 한 편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더 미혹한 생각이 찾아들어 경을 읽으면, 절에서 스님들이 경 설하면 중음신이 찾아오는 것처럼 오만 잡귀가 모여들면 어떻게 하나 싶어 더욱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집에 있는 법당엔 못들어가고 집 부근에 있는 절을 다니기로 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니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싶어 마음 맑히기를 작정하고 몇달간 다녔었습니다.

 그 후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 되었지만 타력은 믿기 싫고, 자력, 오직 내 힘을 기르자, 내 힘을 길러서 저중생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제도하리니, 하는 건방진 생각으로 부처님의 가피가 어디 있으며 반야 자리에 무슨 윤회와 인연이 있을까보냐, 바라는 마음 없는데 공덕은 왜 지어 내가 부처인데 하는 오만한 태도를 갖고 무심으로 기도를 하려 하니 기도가 안되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는 또한 Case의 과대망상증 환자에 대해서 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 하는 치료로는 오히려 병만 더 악화시키는 것 같아, 진실성을 믿는 제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절대로 미친 사람을 미쳤다 여기기가 싫었습니다. 그러한 차별의 자리에서는 병이 낫지 않을 것 같아 진실한 마음으로 모든 환자에게 건강한 사람을 대하는 듯 하였더니 환자들이 저만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중 과대망상증 남자 환자 하나가 저와 결혼하자고 따라다녔습니다. 저는 그때 퍽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미친 사람은 역시 미친 사람이야. 할 수 없군.」하는 체념이 생겼습니다. 제 생각이 정말 진정한 마음이었다면 그런, 남을 나쁘게 생각하는 마음이 안 일어나야 할 텐데, 진실이었다면 절대로 바라는 마음이 없고 오직 주려고만 하는 건데 제가 자처했던 진실은 오히려 저의 아만이고 허위였고 상대방을 희롱한 거와 같다는 저 자신의 깊은 심리 분석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스님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만약 내가 장님이 된다면 나의 부모는 거리낌 없이 눈을 빼어줄 수 있을 테지만 자비를 강조하는 성직자인 스님네들은 절대로 그런 일은 못하실거라고 생각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스님들이 전법하는 것은 스님들 자신의 욕망 충족의 한 방법에 불과하고 그것 역시 우리를 희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제가 치료하는 환자들 중엔 종교인이 비종교인보다 많아 그 생각이 더 커졌습니다.

  3. 종교는 무력한가

 저는 종교에 대한 회의를 느꼈습니다. 사람을 이렇게 미치도록 놓아두다니, 종교란 참 나약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종교가 전혀 필요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법회에 나가기를 꺼려하고 저는 점점 깊은 미혹의 덩쿨 속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종교인들은 모두가 종교의 맹종자같아 보였고, 자기 도취에 빠져 있는사람들 같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믿는 종교가 과연 올바른 길인가, 불교도 하나의 커다란 틀이 아니겠는가, 불교가 정말 진리 그 자체라면 진리는 영원하고 불멸할 텐테 세상에는 불교 믿는 나라는 왜 가난하고 침해만 받고 사는가, 무엇을 기준으로 이 세상에서는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고, 어떤 길을 가야 정말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인지...

 정신과에서는 종교 광신자를 고칠 수 없는 편집증과 과대망상증 환자로 봅니다. 이에 불교라는 것에 더이상 집착하기 싫어졌습니다. 이렇듯 사춘기 소녀처럼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고 제 자신 큰 혼란 속에 빠져들어갔습니다.

 잘난 척만 하던 제가 진실한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또한 남들보다 몸과 마음과 힘이 약하다는 것을 인식하자 강자와 약자,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세상 천차만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왜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잡아먹고, 키큰 나무는 햇볕을 받아 더 크게 자라는데 햇볕을 보지 못하는 풀잎들은 시들어가는지, 동물계들 식물계들 영계들은 왜 천차만별로 벌어지는지......

 법문을 들을 때는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루살이에 불과하고 별 일 아닌 걸로 사람들이 울고 웃고 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었는데 그것들 모두가 문제시되어 제게 다가왔습니다.

부처님이 처음 설하신 인연 윤회 법칙을, 그것은 부처님이 자비로우셔서 중생 입장에 서서 설한 것이라 생각되고 아이를 달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만 여겨지고 전혀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4. 인연 법문에 마주서다.

 그러나 한번은 우연히 한 스님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글을 읽고 저는 그 스님을 몇번 찾아뵈었습니다. 그때마다 그 스님께서는 인연을 항상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스님께서 아마 나를 아주 우습게 보고 인연을 강조하시려니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왜 인연을 강조하실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문득 자연이라는 것이 눈에 절실하게 들어왔습니다. 자연의 섭리,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가장 진실한 것이 자연이었습니다. 사과 씨가 하나의 인(因)이었다면 사과 열매가 하나의 인연으로 결실을 맺는 인과의 법칙......

 내가 완전치 못하고 절대적인 희생정신이 없는 한 분명 중생심이고 상대적인 세계에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과의 법칙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늘상 집에서 아버지께서 강조하셨던 인연, 인과를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과거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지난 날의 아만과 집착에서 헤어나며 과거에 지은 죄업, 업장이 인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잘 되고, 잘 살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습니다. 내부에서는 과거 지은 업장을 빨리 소멸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고 어서 새로운 좋은 씨를 부지런히 뿌리자. 그래야만 좋은 열매가 맺힐 게 아닌가, 그 열매가 맻히기 전까지는 어떠한 과정이든 반드시 필요하다 생각되었습니다.

 업장을 소멸하자는 것은 커다란 상처를 그냥 방치해 두어 더욱 악한 결과를 낳기 전에 약바르고 치료하자는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부처님의 가피가 겨우 이해가는 듯했습니다. 완전함과 허공에만 집착해왔던 제가 거기서 풀려나기 시작하게 된 커다란 계기는 아마 제 부모님, 할머님, 고모님의 신행생활에서 느낀 감동때문이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아침마다 부처님께 예경하고, 아직도 자고 있는 우리 입속으로 천수물을 떠 넣어 주시며, 「할아버지는 부처님이시다, 우리가 잘 되고 있는 것 전부 할아버지가 옛날에 부처님 잘 예경하시고 좋은 공덕을 쌓아 놓으신 덕분이다 」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아버니는 절에 간다고 하면 무조건 노자 듬뿍 주시고, 갔다 오면 「우리 집 등불 」이라며 칭찬해주셨습니다. 또한 할머니께서 학교 졸업선물로 제게 손수 지어주신 법복속의 자비의 위력...제가 이런 좋은 환경 속에서 아무 불편 없고 탈 없이 곱게 자랄 수 있었으며 이것이 모두 조상들께서 지어놓으신 공덕의 힘임을 느낄 때 은혜로움을 새삼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따뜻이 키워주는 자연의 숨결이 곧 부처님의 숨결이고 제 생명 속의 숨결이라 생각되고, 그 속에서 용기가 스며나오고, 움이 터서 힘차게 자라고 싶고,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타력이 인정되는 것 같았습니다. 「불교는 자기 힘으로 하나님이 되는 것이고,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제해주는 겁니다 」고 한 분의 얘기가 그럴 듯하게 들렸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어떤 틀에도 잡히지 않는 유연함이라 생각됩니다.

 저는 이제 저와 인연 맺은 모든 분들께 감사하고 찬탄하며, 반야 밝음은 어둠의 상대적인 밝음이 아니라 바로 그자체의 밝음이라고 머리 속에서만 생각했던 것이 이제는 실제로 가슴에서 무언가 말할 수 없는 밝고 맑음이 떠오릅니다.

 몇달 전부터는 아침 저녁으로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가슴으로 108참회와 독경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 못한다가 아닌, 인연 없으면 인을 맺어주어 제도하라는 스님의 말씀을 받들어 부처님의 미묘한 법문을 부지런히 전해주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강남구 합동 산16의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