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강의실] 반야심경강의 11

성전강의실

2008-02-05     광덕 스님

  보살은 반야에 의하여 바라밀다를 이룬다. 바라밀다야 말로 보살의 소굴이며 입각처다. 그리고 바라밀다는 완전에 도달한 도무극(度無極)의 경계다. 또한 바라밀다는 구극의 실상이며 일체 한계적 존재를 넘어선 절대의 본제(本際)다.

  2. 무소득은 인간해방이다.

  유(有)만을 인식하고 득실(得失)만으로 존재를 인정하면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우리의 세계는 유의 평면과 소득의 입체로 느껴진다. 그런데 이제 일체가 공하여 무소득(無所得)에 이른다 하면 곧 공무적멸(空無寂滅) 허망(虛妄)의 현기증을 느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저들은 자기가 서 있는 근본적 기반을 일시에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공이 의미하는 것을 오해한 데에 기인한다. 실로는 유는 없는 것이며 동시에 공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본래부터 유나 공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불공의 활물(活物)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차치하고 우선 우리를 둘러싼 오온적인 여건이 우리를 해방하고 있는가. 한계지우고 속박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명백하게 말해서 우리의 자유를 조건과 상황으로 속박하고 있으며 근본적으로는 우리는 죽음이라는 종국적 한계속에 몰아넣고 있는 것이 오온현상이 아닌가. 실로는 우리는 오온현상에 의지하여 우리가 생명과 번영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의하여 억압되고 제약을 받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오온현상에 의하여 보호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온이라는 성곽에 묶이고 또한 갇혀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너진 지금 즉 무소득에 이른 지금의 경계를 어떻다 할 것인가. 쇠사슬에 묶여 살다가 쇠사슬이 풀리니 허전하고 의지하고 살아왔던 쇠사슬이 없어져 현기증이 난다 할 것인가. 여기에는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에게는 대해탈 대자유의 천지가 안겨져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에게는 대해탈 대자유의 천지가 안겨져 있는 것이다. 그를 속박하고 한계지웠던 오온의 성곽이 허물어지고 18계의 쇠사슬이 녹아 없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무소득의 법이야 말로 인간해방의 대법(大法)임을 알게되는 것이다. 이 무소득의 법에 의하여 일체 속박에서 벗어나는 원리를 설명한 것이 이제까지의 파사분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속박에서 풀리고 한계의 장벽을 타파한 경계가 어떤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 여기의 공능분(功能分)임도 알아야 한다.

  3. 보살에 이르는 길

  만인은 진실을 향하여 가는 자다. 그는 자신에게 있는 진실의 빛을 구현하느라고 수행이라는 길을 무한 겁을 두고 산다. 만인은 성불하는 자, 구도자다. 만인은 보살이다. 보살은 제대로 적어서 bodhisattava(보디사트바), 이 땅에 빛을 뿌리는 자라고 했다. 특히 이러한 인간사실을 알고 믿고 그 길을 걷는 구도자, 그들을 우리는 특히 보살이라 하여 칭송한다. 그는 빛을 구하는 자며 빛으로 살고 빛을 행하며 빛을 뿌리는 생애이기 때문에 아무리 존경 칭송받아도 부족하다. 정말 이 땅의 어둠을 소탕하여 광명정토를 실현할 자가 있다면 바로 보살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보살—그는 그와같이 존경을 받을만큼 위대하고 책임이 크다. 어떻게 책임을 다할 것인가. 
  경에는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하여 마음이 걸림이 없다」하였다. 
  이것이다. 반야바라밀다에 의하여 보살은 보살이게 한다. 반야에서 보살을 보살이게 한다. 반야에 의하여 유한의 상황은 무한대의 세계로 전환된다. 일체한계 대립은 타파되고 무한의 지혜 모두와 함께 호흡하는 자비자재한 위덕은 전개되는 것이다. 반야에 의하여 비로서 바라밀다는 현전(現前)하기 때문이다. 
  보살은 반야에 의하여 바라밀다를 이룬다. 바라밀다야 말로 보살의 소굴이며 입각처라고 이미 말했다. 그리고 바라밀다는 완전에 도달한 도무극(度無極)의 경계임도 이미 말한 바이다. 이 바라밀다는 구극의 실상이다. 일체 한계적 존재를 넘어선 절대의 본제(本際)다. 참으로 무소득의 대해를 독조(獨照)하는 각일(覺日)인 것이다. 그는 태양과 같이 일체에 초출(超出)한다. 어떠한 위력으로도 그의 절대자유 자존성을 변개하지 못한다. 그는 존재이전 자며 절대적 근원자이기 때문이다.
  경에는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함으로 마음이 걸림이 없다」하였다. 마음이 걸림이 없다함은 무슨 뜻일까. 
  심무묵애(心無墨碍)—이것은 범어 acittavarna다. 한문이 뜻하기로는 <걸리고 장애함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 마음을 덮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망념이다. 즉 본분실지(本分實地)를 모르는 착각적 의식이다. 그것은 선악, 호오, 생사, 미로, 집착, 대립등 관념이다. 이것이 중생견이다. 무명이 가져오는 바이며 고를 부르는 원흉이다. 
  그런데 본래 바라밀은 아무도 모르는 그를 덮지 못하는 위력의 실자(實者)인데 어찌 덮는 것이 있다는 말을 하는가. 
  이것은 바로 착안한 의문이다. 실로는 무엇으로도 덮거나 가리우지 못하는 것이다. 밖에서 오는 무엇으로도 덮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밖에서 올 한 물건도 없고 실로는 밖이란 없다. 안도 없다. 자신도 유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가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다만 자신 착각으로 인하여 망념을 일으키고 망념에 생각을 두고 다시 생각과 견해를 일으키므로 자신 본래의 자리는 망실한 채 망념을 자신으로 삼는 착각을 일으킨다. 여기서 자신의 본 땅을 망실하였다. 하지만 실로는 그곳에 그대로 있건만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착각은 망실을 가져오고 망실은 상실을 초래한다. 이 자기상실 이것이 중생의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실로는 덮인 바 없건만 착각으로 인하여 자성을 덮인 바 되고 자기상실을 거듭하는 것이다. 이 일찌기 덮인 바 없는 본성 본면목을 보이는 것이 정안(正眼)이며 반야안(般若眼)이며 각안(覺眼)인 것이다.그러므로 바라밀지(地)에는 본래로 덮인 바 없는 것이다. 일체만법 본자해탈이란 이 말이다. 그러므로 경에 <걸림이 없다>하심은 실지 걸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원래로 걸리지 않는 것이며 <덮힘이 없다>하여도 실로는 원래도 덮이지 않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