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목소리]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일

2008-02-04     석지오

불교의 한국적 상황을 애기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열등의식과 모멸감에 사로잡힌다. 천육백년의 전통과 역사가 맺어온 결과가 겨우 이 정도 밖에 되지 못하는가 하는 회의는 불교가 한국민족에게 끼친 문화적 정신적 영향이 지대하다는 중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견딜 수 없는 자학으로 유도하기에 충분하다. 종교의 사회적 기능은 그 시대의 정신적 지주로서 사회윤리의 발양(發楊)과 인간정신 계도에 있다고 한다면 오늘날의 한국불교는 그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에는 너무나 무기력하고 안일하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오히려 자체내의 타락과 분열로 사회 일반으로부터 조소와 빈축을 사고 있는 설정에서 중생제도니 사회구원이니 한다는 것은 말 자체가 황당한 희론(戱論)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전통을 들먹이고 찬란한 문화유산 어쩌구 하는 것은 진실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후안무치배의 소언이라고 한다면지나친 표현일까?

그런데도 아직 우리들에게는 이와 같은 자각적 반성이 부족한 것 같다. 어찌된 노릇인지 우리들은 모여 앉으면 불교의 현실을 꼭 남의 일처럼 얘기한다. 이것이 잘못되었어. 「이렇게 가다가는 끝내는 불교라는 흔적도 없어 질거야.」 하고 서로들 탄식만 하고 있을 뿐 누구 하나 일어서서 「이렇게 해야 한다.」고 앞장서는 사람은 없다. 그들의 언동은 한결 같이 남의 잘못이지 나의 잘못은 아니다. 따라서 책임은 언제나 다른 사람이 질 일이지 자기가 져서는 안 된다는 태도이다. 마치 강을 건너간 돼지가 언제까지나 자기를 빼고 세는 것처럼 책임문제에는 언제나 자기가 빠진다. 참으로 묘한 처세꾼 들이다.

이러한 속한 보다도 더한 사람들만이 득실거리는 풍토에서 불교의 제구실을 바라기 보다는 차라리 장대로 별을 따서 망태에 담는 것이 더 쉬울 지도 모른다. 이제 불교의 중흥을 기대하는 모든 사람들은 너무나 지쳐버린 것이다.

우리는 곤욕스럽다고 하더라도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서투른 궤변이나 속보이는 변명으로 더 이상 망신당하기 전에 - 하기야 이제는 당할 망신도 없지만 -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새로 출발해야 한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절망해서는 안 되겠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정 최상의 것이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저 중생들을 영원히 해탈케 할 수 없고 이 세계를 정화 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는 불교를 어찌 담보와 타락의 수렁 속에 빠지도록 내버려 둘 수 있을 것인가 불교는 어느 특정인 전유물이 아니라 중생 모두의 것이요 우리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책임을 지고 법륜이 다시 상전하고 불일(佛日)이 더욱 빛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결코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회피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책임이 있다면 지금 여기에 있는 나와 당신과 우리 모두가 가져야할 공동의 책임이다. 나의 불교 우리의 불교를 내가 아니고 우리가 아니면 누가 빛내고 누가 계승할 것인가.

우리는 불교가 우리 생명과 우리의 모든 것 보다도 더 귀중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불교를 중흥해야 한다. 불교를 통해서만이 우리의 생명은 더욱 귀중하게 되는 것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영혼이 구제되고 또 이길만이 우리의 삶에 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촛불은 스스로를 태움으로서 주위를 밝혀 준다. 아침 저녁 밝히는 그 촛불에서 우리는 배워야 한다. 자기의 희생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이 세상을 밝혀 줄 수 없음을 - 나의 희생이 아니고서는 결코 불교를 중흥 할 수 없음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또 우리는 알아야 한다. 촛불의 가치는 어둠을 밝히기 위해 스스로를 태울 때 더 밝게 들어나는 것임을 - 우리의 가치로 佛日(불일) 증휘하고 법륜이 상전하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때 더 높게 돋보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이것 뿐이다. 어둠을 밝히기 위하여 스스로를 태우는 촛불처럼 불교의 중흥을 위하여 스스로를 기꺼이 태우는 일이다. 殉敎(순교)하는 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