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남해군 금산 보리암

2008-02-04     관리자
만경창파 하늘 끝이 하나 되어 눈부신 햇빛을 반사하고

세간 중생 구하시는 관음보살의 거룩한 뜻 하늘 끝에 솟았어라.

천 년을 묵묵히 푸른 바다를 출렁이고 고달픈 나그네들

구름처럼 모여드누나.

‘나무관세음보살’ 다행인지고 이 땅에 머무시어

영겁의 광명이 되옵시고 평화와 사랑이 식을 줄 모르는 물줄기되시니....

‘나무관세음보살’턱을 받치는 가뿜 속에서도 오직 당신님을 염하옵니다.

아마도 이것은 이곳 금산 보리암을 찾는 모든 순례자의 읊조림이리라.


관음도량의 유래


한반도 남단 경상남도 남서부 해역에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 남해섬(南海島, 298.0km2)은 자리한다. 이 섬의 남동부에 금강산(金剛山)의 축소판이라 하리만큼 기암괴석과 크고 작은 굴(窟), 그리고 바다를 내려다보는 경관 등 38경(景)을 이루고 있는 금산(錦山, 681m)이 있다. 이 산에 고난 많은 세간을 구하시려는 대비관음보살의 굳건한 원력이 숨은 보리암이 있어, 긴 역사를 이어오며 우리나라 불교를 붙들어 온다. ‘관음보살 도량’하면 양양 낙산사와 더불어 남해 보리암을 꼽는 것이 한국 불자의 관례이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관세음보달 보문품(普門品)에 무진의 보살이 부처님께 ‘어떠한 인연으로 관세음보살이라고 합니까’하고 질문한 대목이 있다. 그 때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하고 계시다.

“한량없는 중생이 여러 가지 고통 가운데 빠져 있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서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보살은 그 음성을 듣고 모두를 고통에서 해탈케 해준다.”


이처럼 관세음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근기에 따라 곳곳에 여러 형상으로 몸을 나투어 중생들로 하여금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해탈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관음 위신력을 기원하는 보리암이 관음도량으로 불리워진 내력은 다음과 같이 전해 온다.


그 옛날 1,900여 년 전, 가락국의 시조인 김 수로왕(金首露王)에게 허황옥(許黃玉)이란 왕비(왕비)가 있었다. 이 왕비는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서 16세에 외숙 장유(長遊)화상과 함께 해로로 동토로 온 것이다.


보리암의 전설에 의하면 허(許) 왕비가 인도에서 오면서 관음보살상을 모셔 왔다고 한다. 이 관음보살상을 지금의 금산에 봉안하고 관음보살의 위신력으로 나라의 영원한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관음보살의 대자대비 구세원력(求世願力) 사상에 바탕을 둔 허(許) 왕비의 확고한 신앙은 이 땅에 불법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의 일곱 왕자가 칠불사(七佛寺)로 출가하여 모두 성도하였다는 고사는 유명한 이야기다. 그리고 호법호국(護法護國)의 깊은 뜻이 가락국은 물론 1,900여 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이어져 남해 보리암을 우리나라 제일의 관음도량으로 확고히 굳혔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창건과 금산의 전설


남해섬 일대의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중심지인 만큼 3백리 바닷길 요처에 빼어난 경관이 많다. 지난 1,973년 완공된 길이 660m의 남해대교는 육지와 섬을 잇는 연육교(連陸橋)로서 국내 최초의 현수교이다. 이 다리는 3백리 한려수도의 길목에 위치하여 이 일대의 새로운 관광 명소로 유명해짐은 물론 남해섬과 육지의 교통을 원활히 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때 대접전지로서 유명한 노량해협은 충무공 이순신의 애국애민의 정신을 선양하는 국민의 산 교육장이기도 하다.


금산에 오르는 길은 매우 가파르다. 큰 도로에서 도보로 40여 분, 보리암 입구 쌍홍문(雙紅門)은 거대한 바위에 커다란 동구 두 개가 엄숙하게 뚫려 있어 세속의 온갖 망상 속에 사로잡힌 마음을 맑혀 준다. 이 쌍홍문의 왼쪽 맞은편에 눈 감은 사천왕상의 바위는, 저 옛날 원효대사가 이 산을 찾을 때 미처 큰 스님 오는 것을 모르고 입구를 막은 나무덩쿨을 치우지 못하여 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는 이 곳 주민의 설명이다.


원래 이 산은 신라시대 문무왕 3년, 663년에 원효대사가 이 산에 찾아들어 보광사(普光寺)를 창건하고, 산 이름을 보광산(普光山)이라 하였다 한다. 그리고 지금의 대장봉(臺狀峰) 밑에 보리암을 창건하였다고 전해 온다. 저 때의 보광사 터는 전하여지지 않고 이 산의 역사 기록은 세월 속에 묻혀버렸다. 다만 산세의 지형을 보건대 큰 사찰은 아닌 듯하다.


그 후, 조선조 개국을 앞두고 태조 이성계는 이 산에서 100일간 관음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명산 관음성지의 가호력으로 조선조 개국의 광명을 이룩하였다 하여 이 산을 비단으로 덮겠다는 뜻으로 비단 금자(錦字)를 따서 금산(錦山)으로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금산 전체가 관세음보살의 영험이 드리운 양 곳곳에 펼쳐진 봉우리들-대장봉을 비롯하여 촉대봉, 향로봉, 일월봉 등의 기봉과 삼불암, 천구암, 사자암, 그리고 음성굴, 가사굴 등 크고 작은 바위와 굴이 자연의 신비를 더하여 주며 보리암에서 넓게 펼쳐지는 풍경은 과연 절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연중 기도손이 끊이지 않는 곳, 밤 새워 철야 기도를 마치고 법당문을 나서며 시야에 펼쳐지는 새벽의 바다를 바라보노라면 절로 환희심이 용솟음침은 어느 한두 손만이 아닐 것이다.


한국불교역사의 재조명


우리나라에는 관음보살 상주 도량으로 세 곳 바닷가 도량을 꼽고 있고 신앙이 집중되고 있다. 앞서 말한 양양 낙산사와 금산 보리암, 그리고 강화 보문사다.


자세히 살펴보면 동, 서, 남 세 곳에 있으면서 독특한 관음신앙이 영험을 쌓고 있다. 이 중에서 남해 보리암은 한국 불교 도입 역사에 있어서 재조명해야 할 부분이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인 서기 372년과 김수로왕이 가락국을 건국한 해는 서기 42년인데 이때 허 왕비의 입국은 약 300여 년의 시차가 있다는 점을 볼 때, 우리나라 불교 전래 연도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가락국이 불교를 연구할 과제를 남기게 되는 것이다.


각설하고 1,900여 년 전 관세음보살이 이 땅에 보문시현하신 후 이 땅에 부처님 광명이 우리 민족의 가슴에 뿌리 내렸고, 장유 화상과 허 왕비의 확고한 호법의 의지가 오늘 이 시대에 이어져 만고광명을 빛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본받아 구세원력을 더욱 드높여야 하리라. 나무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