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 망명수기 <10> 중공 방문

티벳 불교 총수이며 국가원수인 비구 달라이 라마의 망명 수기 : 내 나라, 내 겨레

2008-02-02     달라이 라마

제 6장 중공방문

내가 중공에 간다니 모두 반대했다. 가면 못돌아 온다고 했다. 나로선 포로가 된다고 해도 무섭지 않았다. 별궁 환송식에서 내 진의를 전하며 일년 내로 꼭 귀국한다고 안심시켰다.

당시 중공은 헌법을  제정중이라 티벹??10사람의 의석을 할당했었다. 그런 즉 티벹의원??뽑아서 데리고 오라는 의도였다. 사람들은 반대했으나 거절을 통고해서 얻을 것도 없었다. 요행으로 약속이 준수되면 자치권이라도 확보할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1954년 라사를 출발했다. 환송하는 사람들이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나 자신도 국외로 나감에 즐거움이 없었다. 중공군 차로 그들이 개통한 군용도로로 여행을 했다.

중공은 작전용으로 진작 길을 내 뒀다. 우리 백성들이 저임으로 징발되어 부역했고 땅은 보상없이 빼앗겼다. 농민이 경작할 수 있는 농지도 가리지 않고 길을 냈다. 개발된다면 길도 필요할 것이나 결과는 농민을 쫓아 낸 것 뿐이다.

라사에서 90마일 지점에 이르자 말을 타야 했다. 비까지 퍼부어 길이 끊이고 도보로 계속 했다. 벼랑에서는 돌도 굴렀다. 그리고 수백 피트 아래는 강이다. 이번 길에 사람 3명과 말, 노새가 많이 죽었다. 다시 10일 정도 자동차를 탔는데 그 중에서 6일은 내 고향지역을 지나갔고 밤마다 지방선을 만났다. 귀로에 며칠 묵어 가라고 청했다. 

마지막으로 국경을 넘었다. 이제는 타국이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사람, 옷, 집, 행동거지가 완전히 달랐다. 정주까지는 자동차로, 서안까지는 비행기로, 북경까지는 기차를 탔다.

몇 해 전이라면 자동차, 기차, 비행기가 흥미로웠으나 꿈을 즐기기엔 내 마음이 정치적 불행으로 너무 꽉 찼다.
서안에서 판첸 라마를 만났다. 나보다 나이가 들어 보였으나 내 나이 19살 보다 3살 아래였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자랐다. 판첸 라마도 달라이처럼 왕생이고 다같이 14세기부터 시작됐다. 판첸은 국사에 관여치 않는 순수한 제2의 종교책임자였다.

그런데 1910년 중국 침공 때 달라이가 인도로 망명하고 중국이 판첸을 대신 내세워 그들이 철수할 때 자기들이 점거한 티??땅에 남겨 놓았는데 1937년에 사망했다.

앞서 말한대로 전임자의 왕생 후보를 찾아야 하는데 1950년 중공이 티벹에??후보를 찾았다고 발표했다. 다음 해 북경서 협상중일 때 불쑥 이 문제를 내놓고 판첸을 인정하라고 협박했다. 만일 부인하면 협상을 깨겠다고 해서 우리 측은 라사에 전보를 치고, 라사는 시험이고 뭐고 간에 엄두도 못 내고 그냥 넘어갔다. 그때가 11살이 아니면 12살이었다.

그의 교육은 중국이 시켰다. 처음에는 국부군이 시키고 그 다음은 중공이 했다. 중공 정부가 수립되자 판첸 이름으로 축전이 발표됐는데 라사에서 모르는 10살짜리 어린이였다. 1953년 그가 14살 때 중공 관리와 라사에 온 일이 있었다. 우리 쪽에서는  법도에 따라 판첸을 환대했는데 그를 데리고 온 중공측이 나와 똑같이 대접을 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사석에서 그와 둘이 점심을 먹게 됐다. 그 자리에서 판첸은 아무 감시를 느끼지 않자 정말 소년다웠다.

떠날 때 공식적 작별인사를 못하게 하자 판첸은 몰래 와서 하직했다. 그 때 나는 우리 둘 다 어린 나이니 우선 공부나 열심히 하자고 했더니 그도 동의했다.  나는 그가 중공의 훈련 속에서도 우리의 뜻을 잊지 말기를 바랬다. 중공은 우리 선대에 실패한 결점들을 어린 우리들에게 철저히 배제하려 노력했다.


판첸 라마을 탓할 수 없다. 어린이가 외세에 짓눌려 자라서 그의 뜻인들 굽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만은 버린다고 믿지 않았다.  북경은 주은래와 많은 사람들이 동원돼서 박수를 쳤다. 적개심을 보이라면 그 짓도 당장 하겠지, 속으로 나는 우리나라에 주둔한 중공군의 훈련을 상기했다.

  " 중공군, 치하가 좋다고 해라."
  " 좋다."
  " 그럼 됐다."
  " 그런데 세금이 문제다."
  " 무슨 세금?"
  " 당신들만 보면 쳐야하는 박수세금이다."

나를 반겨주는 수많은 사람들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저녁은 주석이 만찬을 냈다. 2백 명이 먹는데 나로선 놀라운 잔치였다. 술도 나왔다. 주석은 티벳이 조국으로 돌아왔으나 최대한으로 지원하겠다고 환영사를 했다. 사람들은 보기에 점잖고 많이 배운 것 같았다.

이틀 후 모택동을 만났다. 유소기도 배석했다. 모택동도 티벳이 조국에 돌아 왔다니 기쁘다고 말했다. 또 의석을 채우려고 온 것도 잘했고 라사의 중공군은 나를 도우려 있고 티벳을 개발하리라고 했다. 티벳을 겁주려고 간 것이 절대로 아니라고 했다.

내 의사의 어긋나는 짓을 하는 군인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난처한 분위기를 만들기 곤란했다. 자칫하면 앞날에 좋지 않을 것 같아 당신 영도력으로 잘 되기를 희망한다고 얼버무렸다. 중공군 대표와 충돌이 생기면 언제나 솔직한 태도를 보였다고도 덧붙였다.

두 번째 그를 만난 때는 통역만 두고 3시간을 계속했다. 나는 우리나라 최근의 동향을 말하고 그의 오해가 없기를 바랬다. 또 무모하게 덤벼 중공의 통치를 벗어나리라고도 생각지 않았다. 관용으로 참으며 조금씩 해결해 보기로 했다.

1953년 이곳을 다녀간 시찰단이 전한 바로는 이들이 아를 매우 의심하고 있다는 인상인데 내가 인도에 맡긴 비상금 내용과 우리 가족이 외국사람과 가까운 사이로 알고 그랬단다.

이것들이 전부 진실이 아니라고 말하자 모택동은 흡족해서 사실은 티벳에 군사 정치를 결정했었다고 털어놨다. 그래서 티벳 자치구준비위원회를 두겠단다. 나는 당장에 대답을 못하고 티벳 사람들 의견을 종합해 보겠다고 미루었다.

모택동은 내가 북경에 있을 때 결론을 내자고 졸라댔다. 며칠 후 1시간 내에 모택동이 온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는 단순한 문안이라며 부처님은 왕자인데도 인민의 신분향상 문제에 많은 사상을 주었다고 허두를 꺼내더니 티벳 타라보살도 훌륭하고, 불교는 좋다고 한 뒤에 떠났다.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한 번은 그의 집무실 구경을 시켜줬다. 나를 바로 옆에 앉혀 놓고 20여명에게 지시하는 회의 내용은 농부의 복지향상이었다. 일이 잘 안되었는지 투덜대며 자기 고향에서 온 편지를 내보이며 공산당원이 마땅히 도와야 할 일들을 하지 않았다고 야단쳤다.

나에게는 티벳 사람들이 고집통이지만 20년 뒤에는 부강해져서 지금은 중공이 티벳을 돕지만 그 때는 반대가 되리라고 했다. 중공군은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티벳에서도 그 진가를 보인다고 했다.

모택동과의 마지막 면회는 북경을 떠날 무렵이었다. 전당대회 상임위원회 때 그의 처소로 오라고 연락이 왔다. 그동안 나는 지방시찰에서 여러가지 관심을 끈 사업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할 얘기도 있었다.

그가 먼저 민주주의 강의를 장황하게 늘어놨다. 또 어떻게 지도자가 되며, 어떻게 살피냐 하는 것도 충고했다. 그 다음 자리를 당기면서 속삭였다. 자기를 나를 잘 이해한단다. 종교는 독이며 인간을 해치고 국가 발전을 막는다고 했다.

티벳이나 몽고가 종교에 중독 걸렸다고 했다. 나는 놀라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가늠했으나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종교의 적인 인물임은 사실이나 자상하고 친절한 데에 충격적인 소리를 해놓고 차 타는 곳까지 나와서 건강에 유의하라고 전별해 주었다. <계속>

 

홍교 김일수 옮김 
마하보디협회 한국지부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