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강의실] 10.보현행원품 강의

성전강의실

2008-01-30     광덕 스님

  8. 법공양과 재공양의 異同

  중생을 섭수하고 중생의 고를 대신 받으며 중생을 이롭게하는 등 법공양행은 재공양과 어떻게 다를까?
  중생을 이롭게하는 데도 여러가지가 있다. 시장한 사람에게 음식을 공급하거나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는 것은 분명히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옷을 주고 음식을 준 것이라면 이것이 재물공양인지 중생을 이롭게하는 법공양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대개 재물공양은 육신을 위한 것이요 법공양은 법신을 위한 것이라 하였다. 중생을 이롭게하기 위하여 물건을 베풀었다 하더라도 육체에 도움이 된것은 재물공양이다. 공양을 받은 중생이 육체적 이익을 받음에 그치지 않고 마음을 열고 믿음을 내며 보리심을 가꾸는 일이 있어야 이것이 법공양이다. 그런 까닭에 법공양에 재물을 소재로 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중생을 깨닫게 하기 위하거나 ,중생의 바른 행을 돕기 위하여 물자를 썼을 때도 이것이 법공양이요 물자를 쓰지 않고 말이나 힘으로 도운 것도 법공양이다.
  경에 말씀하신 바 (중생을 이익하게 하는)행위란 필경 육체적 이익을 위한다는 뜻이 아니다. 만약 육체적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는 것 외에 향락을 위한 공급이나 또는 정신적 타락에 이바지 되는 공급까지도 중생이 필요하다고하여 공급한 것이 법공양이 된다는 말도 된다. 중생을 이익하게 한다는 것은 자성을 밝히고 청정행을 하도록 돕고 그러한 일에 직접으로나 간접으로나 도움이 되는 일이어야 한다. 재공양에 있어서도 본인을 해치는 물자공급이 공양이 될 수는 없는 것과 같이......

 9. 어떻게 공양하는가

  공양은 누구에게 하는 것일까? 경에 나타난 말씀으로는 모든 불보살님께 공양하라고 하셨다. 그 불보살님은 어디 계실까? 일체세계극미진 같은 극히 적은 세계 구석 구석에 계시다고 말씀하셨다. 이 부처님은 눈 앞에 대한 듯, 분명히 믿고 다시 그러한 분명한 지견으로 공양하라 하셨다. 이러한 부처님은 누구실까? 눈 앞에는 중생들이 우굴대고 환상 같은 허공 세계에 불보살이 계시단 말인가? 부처님을 별다른 세계에 갇혀 계시다고 생각하거나 환상 속에 계시는 것처럼 마음에 그려놓고 그런 부처님만 생각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한 소견은 현전지견(現前智見)은 아니다. 명료하게 청정 본심이 드러난 지견이 아니다. 불보살님의 끝없는 광명속에 쌓여 불국토에서 불보살을 눈 앞에 대하듯이 믿고 사는 보살의 현전지견이 아닌 것이다. 이미 여러차례 말한 바와 같이 불보살은 바로 우리 눈앞에 계시고, 집안에 계시며, 거리에 계시며, 무한 세계에 계시다. 우리의 가족이 바로 그것이며 형제와 이웃과 동료들과 온 겨레가 그다. 경의 말씀과 같이 극히 가는 티끌 속마다 부처님이 계시다하신 뜻은 이렇게 믿어져야 한다.
  행원에 공양은 이와같이하여 부처님을 향한 공양이며, 보살을 향한 공양이며, 부모를 향한 공양이며, 형제를 향한 공양이며, 겨레와 중생을 향한 공양이다. 우리는 이 모든 부처님께 정성 다바쳐 공양하자. 꽃으로 공양하고, 음악으로 공양하고, 의복으로 공양하고, 향과 등으로 공양하며, 온갖 공양구로 끝없이 공양하자. 아름다운 마음, 평화스러운 마음, 자비한 마음, 부드러운 마음, 평등한 마음, 밝은 마음, 이것이 공양구다. 이것이 형상적인 물질적인 것으로 나타날 때 재물공양이라고 한다.

 10. 법공양의 근본성격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다시 법공양을 강조하신다. 재물공양은 그만큼 복덕이 무량하지마는 법공양은 법과 더불어 그 공덕이 무량한 것이다.
  경에는 (보살들이 법공양을 행하면 곧 여래께 공양하기를 성취하나니 이러한 수행이 참된 공양이 되는 까닭이라)하셨다.
  법공양은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보살이 스스로 보리행을 닦는 것이며 또한 중생을 이롭게하고도 돕는 행위다. 부처님이나 성현을 향한 공헌이나 이바지가 아니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 청정한 깨달음의 마음을 여의지 않는 것이며 중생을 향한 베풀음인 것이다. 중생을 이롭게하는 것이 어떻게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 되는 것일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두가지 측면에서 살필 수 있다.
  첫째는 중생을 이롭게하고 돕는 행위자의 입장이다. 수행자가 중생을 섭수하고 중생을 이익하게 하는 것은 자신에게 있는 중생을 대립적 타인으로 보지 아니하고 자신을 저 중생까지 확대시키는 것이며, 그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만큼 자신의 내면을 확충시키는 것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을 공양하는 것만큼 보살 자신이 성장하는 것이다. 보리가 성숙한다는 말은 곧 깨달음의 성품이 원만한 것이니 이것이 법신공양이요 그 공덕을 어찌 말로 다할까?
  둘째는 부처님의 입장이다. 부처님은 어떤 한정된 육체이거나 어느 국토에 머물어 있는 허공이나 바람도 아니다. 부처님은 근원적 진리이시며 근원적 생명이시며 근원적 원만상과 善의 의지이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 밖에 한중생도 없다. 부처님에게서는 중생이 곧 자신인 것이다. 부처님에게서 중생을 따로 나누어 볼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보현행원품 수순 중생장에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은 나무, 중생은 뿌리, 보살은 꽃과 과실)에 비유하셨다. 나무 뿌리에 물을 주어야 그 나무에 꽃과 과실이 무성하듯이 중생을 이롭게하고 중생을 성숙시킬 때 부처님이 환희하시는 것이다. 부처님에게 있어서는 중생이 따로 없는 것이며, 그런데도 중생들이 미혹하여 스스로를 불법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중생세계를 그려가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자비심은 그들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저들 중생이 마음을 돌이켜 자신의 본몸인 불법을 깨닫게 하는것이 부처님의 비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부모를 등지고 나간 철모르는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심정을 부처님과 중생의 사이에서 보는 것이며, 법화경 비유품에서 우리는 이것을 읽는다.
  여기서 우리는 법공양의 의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중생을 이롭게하고 중생을 섭수하고, 중생의 고를 대신받고 선근을 부지런히 닦으며, 내지 보리심을 여의지 않는 법공양이 참으로 부처님의 가슴속을 시원스럽게 해드리는 공양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법공양을 행하면 이것이 참으로 부처님께 공양함을 성취하며 이것이 참 공양이라는 뜻도 알게 된다.

 11. 맺는말

  공양은 이것이 복의 문을 여는 것이다. 부처님의 무량공덕이 강한 압력으로 밀려 들어온다. 공양하는 방식은 곧 마음의 문을 여는 방식이다. 크게 열고 조건 없이 열때, 무조건 큰 복이 내가슴에 차오는 것이다. 법공양은 보리의 싹을 키운다. 마음의 광명을 키우고, 마음의 벽을 밀어내고, 온 중생, 온 세계를 자기 품안으로 끌어 당긴다.
  법공양은 부처님 공양이다. 스스로 닦는 법공양 중생을 위한 법공양에서 제불이 환희하신다. 불국토가 장엄되고, 일체 여래의 공양이 성취된다.
  이러한 공양은 이것이 행동이다. 처처에서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이며, 모든 일로 부처님을 섬기는 일이 된다. 종교를 한다 하면서 공양을 모르고 법공양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울만의 종교다.
  공양을 행함으로써 발아래 복의 꽃밭이 열리고 지혜의 태양이 빛난다. 부처님의 은혜로운 위신력이 그의 심신에 넘쳐나며 불국토가 열려가는 것이다. 공양을 행하자. 일체처 일체사에서 부처님을 보면서 정성 다바쳐 공양을 행하도록 하자. 이것은 우리의 본원생명의 힘을 무한창조의 평원으로 펼쳐내는 최상의 기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