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王經에 나타난 반야바라밀 實踐的 修行

호국 경전 탐구

2008-01-30     관리자

   (五) 國難의 根源

   인왕경(仁王經) 호국품(護國品) 제 5에서는 국난(國難)이란 무엇인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국난이라 할 때는 대부분이 이민족(異民族)의 침략만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진정한 호국은 외적으로부터의 침략을 극복하는 것만이 아니라 국난의 근본적 원인을 알고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바른 국난의 타개인 것이다.

  「국토가 어지러워질 때는 먼저 귀신이 난(亂)을 일으키고 귀신이 난을 일으키므로 만민이 난을 일으키고 만민이 난을 일으키므로 적이 내침(來侵)을 하고 적이 내침함으로 국가의 백성이 망하고 상(喪)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호국품의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서도 국난은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난을 일으키 데서부터 일어난다. 그러면 여기서 귀신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귀신의 난은 곧 정법(正法)이 실현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정법의 실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국민의 마음이 바르게 서 있지 않고 심란(心亂)에 처해 있음을 말한다. 일체가 환화(幻化)임을 자각치 못함이다.
  심란(心亂)이란 곧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실천하고 있지 않음이다. 시(是), 비(非)와 그것에 인(因)한 대립과 갈등, 그리고 집착의 쇠사슬의
끊임없는 윤리를 의미한다. 통일과 조화가 아니라, 분열과 혼란의 연속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대왕은 「화난(火難), 수난(水難), 풍난(風難) 等, 일체제난(一切諸難)을 당하면 마땅히 이경을 강(講)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 반야바라밀이야말로 심란(心亂)을 그 뿌리로부터 뽑아내는 근본적인 작법(作法)이기 때문이다. 모든 심란은 무상(無相)을 알지 못하고 상(相)에 집착하고 거기에 자기를 매여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相)은 일체가 공(空)을 체득하지 못한 데서 연유되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이야 말로 삼매(三昧)를 통한 대신주(大神呪)요, 대위신주(大偉神呪)이기 때문에 저러한 심란을 극복, 자재할 수 있는 것이다.


    (六) 般若波羅蜜受持 講說의 儀式

  호국품은 이러한 반야바라밀의 강설(講說)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그 구체적인 의식(儀式), 작법(作法)까지 상세히 설명한다.

  「국토를 보호할려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수지하라. 국토가 난(亂)으로 파괴되고 적이 내침하여 국토를 파괴할시는 마땅히 백불상(百佛像), 백보살상(百菩薩像), 백나한상(百羅漢像),백비구상(百比丘象), 사대중토상(四大衆土象)을 강(講)하여 다같이 듣도록 하고 백법사(百法師)를 강하여 반야바라밀을 강하도록 하라. 이러한 예식을 거행할 때는 백사자후고좌(百師子吼高座)앞에는 백등(白燈)을 키고 백화향(百和香)을 피우고 백종색(百種色)의 꽃을 삼보(三寶)앞에 공양하도록 하라.... 대왕이여 이렇게 하여 一日二時에 이경을 강하고 읽으면 너의 국토 중에있는 백부귀신(百部鬼神)들 중에 각각 하나하나의 귀신이 그 가슴에 이 경을 듣고 기뻐할 것이다」

  이와 같은 장황한 설명은 어떻게 보면 地方的이면서 신비성(神秘性)을 들어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비록 오늘의 우리에게 합리적이라고 할수 없을 정도의 이러한 의식가운데 우리는 보다 궁극적인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의 구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명백히 이 경을 대하는데는 모일 수 있는 최대한의
대중을 모이도록 말하고 있다. 그러한 대중 가운데 이와같은 이와같은 여법(如法)의 종교적 의식이 베풀어지고 거기에는 국왕 뿐만 아니라 일체의 선지식이 모두 함께 자리를 같이한다. 여기에 국왕과 국민이 둘이 대립할 수 있는가, 여기에는 오직 국왕과 대중은 일체가 되어 하나의 마음이 되고 거기에 반야바라밀의 힘찬 위신력이 그대로 顯示 되는 것이다. 우리의 각자 마음 속에 일체의 산란한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고 그러한 가운데 모든 국난의 요인이었던 심란이 조용히 가라앉게 되고 그 속에 무한한 힘이 작동하여 諸國의 世界가 다시 전개하게 되는 것이다.

  인왕경(仁王經)은 국난을 걸고 현실적인 國家나 국토의 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두가 우리의 마음이 국난을 만들고 있음을 절실히 표현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공삼매(空三昧)에 이르면 一切의 國土가 평안하고 보위(保衛)되는 것이다.
 

    (七) 佛 . 衆生 . 國土가 하나이다

  반야바라밀은 너에게만 있고 나에게는 없는 것이 아니요, 무량무변(無量無邊)한 것이다.

  그리고 본래 이 國土는 불국토(佛國土)이었다.

  「일화(一華)는 무량화(無量華)에 들어 있고 무량화는 일화에 들어 있고 일불토(一佛土)는 무량불토(無量佛土)에 들어 있고 무량불토는 一國土에 들어 있다...... 무량대해(無量大海)는 개자중(芥子中)에 들어 있고 일불신은 無量衆生身 가운데 들어 있고 無量衆生身은 一佛身속에 들어 있다. 一佛身은 六道身에 들어있고 지(地), 수(水), 화(火), 풍(風), 신(身)에 들어 있으니 불신도 불가사의 하고 衆生身도 불가사의하고 세계가 불가사의하다. 佛이 신족(神足)을 나타내실 때 시방제인천(十方諸天人)이 불화삼매(佛華三昧)를 얻어 십항하사보살(十恒河沙菩薩)이 現身成佛하고 三恒河沙八部王이 보살도를 이룬다. 十千女人의 현신이 신통삼매(神通三昧)를 얻는다. 이것이 반야바라밀이 가진 삼세이익(三世利益)이다」 반야바라밀의 공덕은 이와 같다.

   衆生과 부처가 둘이 아니요, 국토와 내가 둘이 아니다. 국토가 衆生이요, 국토가 佛인 것이다. 국토와 佛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협동의 실현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전체와 개체, 晋通과 특수의 문제에 있어서 그들은 서로 상부상조한 것이요, 또한 일중일체(一中一切) 다즉일(多卽一)의 論理를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다. 국가와 개인이 둘이 아니다. 국가속에 개인이 있고 개인속에 국가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우리의 국토를 지키고 또 보호하는 근거가 있다.
  불법(佛法)도 마찬가지이다. 佛속에 우리가 있고 우리속에 佛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정법을 지켜야할 근거를 갖게되는 것이다. 따라서 호국과 호법은 둘이 될 수 없다. 일체의 변란은 곧 우리의 마음이 바로 서 있지 않고 옳은 질서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두개의 욕구가 대조되어 균형을 잃었기 때문에 마음의 혼잡을 일으켜 일어난 현상이 곧 적이기 때문이다. 적을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다.
   바로 나의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부정하여 일어난 것이다. 삼업(三業)의 부정이란 곧 보살심(菩薩心)을 말하지 않는데서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지켜야 할 것이라 본다.
  구체적인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의 실천은 육화경(六和敬)이다. 즉 보살이 중생과 화경(和敬)하여 중생과 같이하는 여섯가지의 분류를 말한다.

  인왕반야경 호곡경 수지품(仁王般若經 護國受持品) 第七은 육화경(六和敬)외에도 사섭(四攝),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발하도록 말하고 있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가 구체적인 實踐論理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의 근본정신은 반야바라밀의 확신에서 나오는 것이다. 반야 바라밀은 곧 번뇌심이 없는 寂滅의 세계인 것이다. 그것은 곧 금강삼매(金剛三昧)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무생무멸(無生無滅)한 것이다. 
 

     (八) 국난은 국토청정 중생성숙의 계기

   반야바라밀은 空위에 건립하여 왔다. 身의 空, 口의 空, 意의 空으로서 집착(執着)하지 말라는 것까지의 공(空)인 삼공(三空)의 世界가 이루어진 바로 거기에 현전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대조되는 대상, 다시 말하면 소위 적을 마치 영원한 나의 원수와 같이 생각하고 그것과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반야바라밀의 世界에서는 그 적을 적이라 보지 않는다. 그것은 나를 괴롭히고 나를 파괴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은 나를 성숙시키는 좋은 친구인 것이다. 우리는 나를 괴롭히는 어떤 대상을 적으로 낙인을 찍음으로서 그 순간부터 그것과 나를 대립시키고 투쟁을 전개한다. 그러한 대립과 투쟁이 계속되는 한 나의 마음은 조화를 잃게되고 파괴되어 삼매를 잃게 된다. 따라서 대립의 승화는 있을 수 없고 영원한 대립으로 끝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외침에 대한 투쟁, 대항도 대립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본래 청정국토 실현을 위한 성숙의 순간, 참회의 순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에 三昧가 現前하여 마음의 평화가 이루어져 무한한 힘이 일어난다. 우리가 적을 대립한다는 것은 이미 적을 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한 적의 인식위에서는 우리의 힘은 약화되는 것이다. 싸우는 자가 싸움을 인식하면 패배하는 것과 같다. 상대의 認識은 곧 자기의 무한능력이 감소되는 순간인 것이다. 對立은 본래 없는 것 오직, 청정국토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 곧 반야바라밀의 적극적 활용이 보여지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