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타령

2008-01-29     관리자

나이를 먹는다는 것

젊은이는 희망에 살고, 늙은이는 추억에 산다고 했던가.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노라면 여러번 생각이 바뀌고 모습이 바뀌게 마련이다.  때로는 피할 수 없는 운명 때문에, 혹은 삶의 어떤 기로에서 인생관과 가치관이 바뀐다.

그 중에서도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은 외부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나이에 따른 스스로의 변신이 아닌가 한다.  지금 와서 지난 일들을 회상해 보면 참 어처구니 없는 고비를 겪었던 기억들이 새롭다.  이과(理科)만을 고집하던 부모님을 거역 못하고 진학했으나 끝내 기대를 저버렸던 적도 있고, 서른 살이 훌쩍 넘도록 전임이 안되어서 다 때려치우고 포장마차나 해볼까 했던 적도 있다.  현실이 뜻대로 안될 때마다 자신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없이 부러웠고, 나는 언제나 저 의젓한 기성세대가 되나 싶었다.

목련이 봉오리를 터뜨릴 때라야 봄이 왔다고 느끼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간다고 해서 반드시 슬퍼만 할 일은 아닌 줄 안다.  사람이란 나이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가지게 마련이며, 그 은은한 멋은 바로 경륜의 폭을 말해 준다.  문제는 젊은이가 젊은이답지 못한데 있고 늙은이가 늙은이 답지 못한데 있는 것이지, 결코 나이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동양, 특히 우리 나라는 비교적 나이 먹은 이들이 살기 편한 사회이다.  아직도 경로(敬老)랄까, 아니면 권위에 대한 상징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을 어떤 "기능"의 면으로서만 파악하려는 서구사회에서의 노인은 별 볼 일없는 존재로서 자꾸 전락해 갈 수 밖에 없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노인을 보는 심성(心性)은 이율배반적이다.  우선은 늙는 것을 원통스럽게 여기는 마음이요, 또 한편으로는 은근히 늙었다는 권위를 내세우고픈 심사이다.

흔히 겪는 일이지만, 젊은이의 무례를 나무라는  가장 원색적인 표현은 "너는 애비, 애미도 없느냐"는 힐책이다.  따지고 보면 무척 웃기는 소리이다.  그것은 이미 논리가 아니다.  다만 권위일 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그 권위가 아직 통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마음 속으로는 늙고 싶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늙음을 동경하는 야릇한 심경이 꼬여 있지 않나 싶다.

그러나 역시 꼴불견인 것은 늙은이가 자신의 분위기를 갖지 못하는 일이다. 요사이는 워낙 환경이 개선되고 식생활이 향상된 탓인지, 도무지 사람들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무척 젊어 보이는데 실제 나이가 상당히 차이나는 경우도 있다.  또 지긋해 보이는데도 아주 젊은 경우도 보았다.  뒤죽박죽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늙은이가 젊어 보인다는 것은 자랑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창하게 말하면 섭리를 어기는 일이며, 좁혀 말하더라도 결국 특정세대가 갖는 "문화적 충격"마저 줄일 수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이덱거가 했다는, "떨어지는 것을 떨어지도록 내버려두라.  왜 사람들은 자꾸 그것을 떨어지지 않도록 하려는가?"하는 말을 음미해 본다.

어떻게 사는가

 선가(禪家)에서는 오유지족(吾唯知足) 이라는 말을 쓴다. "나는 스스로에 만족한다", 이것은 결코 은둔적인 표현이 아니다.  스스로를 비관할 때 세상은 비뚤어지게 보인다.  검은 안경을 쓰고 본 세상이 검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처지에 만족할 때 오히려 비약이 있을 수 있다.  그릇된 탐욕의 노예로서가 아니라 유유히 삶을 관조하는 멋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가는 세월을 서러워 하는 것은 한(恨)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간에 충실한 삶에는 후회가 있을 수 없다.  그저 덤덤히 주어진 상황에 부딪쳐 갈 뿐이다.

젊은이와 늙은이가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젊음의 희망 속에는 불굴의 의지가 있다.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나폴레옹의 독백은 얼마나 젊은이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격려였던가.  다소 서툴지만 패기만만하게 현실을 헤쳐나가는 기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늙은이는 다르다.  그는 인위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도, 사노라면 있다는 것을 깨달아간다. 불가능한 것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느껴 본다.  그때 숙명이라는 것을 떠올려 본다.  황혼처럼 다가오는 쓸쓸한 어두움을 지그시 자신과 비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가 말한 세대별 경륜은 확실히 멋있는 표현이다.  문제는 이순(耳順)의 세대에서도 이순은 커녕 젊은이 못지 않은 혈기를 보이는 모순에 있다.  그가 말한 "하고 싶은대로 하건만 도무지 법도에 어그러짐이 없는" 세대에서 조차, 하는 일마다 법도에 어그러지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법구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머리가 희다고 해서 장로(長老)는 아니다"라는 가르침도 같은 맥락일 줄 안다.  권위는 그에 어울리는 처신이 있을 때 저절로 있어지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의 나이 자랑이 단순히 나이 세기에 그친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은 얼마나 살았느냐보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는 존재이다.  우리는 1년이라는 세월을 객관적으로 동일하게 모든 사람들을 향해 적용시킬 수는 없다.  보람에 찬 한 해도 있을 수 있고 허송 세월도 있을 수 있다.  좀더 확대해서 일생으로 생각해 보아도 마찬가지의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진한 삶, 가치있는 삶이 필요한 것이다.

될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하였다.  젊음의 이립(而立)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생이란 무엇이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좌표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하면 오직 방황이 기다릴 뿐이다.  건강한 사회라는 것은 그러한 사색의 터전이 마련된 곳이다.  또 그 사회의 기성세대는 바로 그러한 면에서의 모범이 되는 그룹이어야 한다.  기성세대는 바로 삶의 여로 속에서 어떠한 인과를 맺어야 되느냐 하는 표본인 셈이다.

요사이도 어김없이 묻는 학교 설문지 가운데 존경하는 인물과 자신의 장래 희망 등이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몇 년 전만 해도 그 첫번째 인물은 슈바이쳐 아니면 아인슈타인이었다.  희망 직업은 예외없이 대통령 아니면 육군 대장이었다.

왜 꼭 외국인만이 존경의 대상이 되느냐 하는 점은 다음 기회에 논의하려고 한다.  과학자가 되고 싶고 대통령이 되고픈 꿈은 중요하다.  그것이 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 "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즉 우리의 기성세대는 그 과정인 교육에 온 정성을 쏟아야 하리라고 본다.

불교는 골동품이 아니다

나는 파키스탄의 라호르 박물관에서 간다라의 걸작품인 고행상(苦行相)을 가장 인상깊게 보았다.  싯달타 태자의 고행을 조각으로 묘사한 것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그의 두 눈은 마치 해골처럼 움푹 파여 있었다.  몸통께는 경전에서 말씀하신대로 "등과 배가 맞붙고, 갈비뼈가 드러난 앙상한 모습"이었다.  그로테스크한 어떤 무드가 그 조각품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나는 한참이나 그 불상 곁을 떠나지 못했다.  그 불상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부처라는 경지는 끊임없는 자기성찰에서 비롯된다는 말을 하려고 한다.  또 뼈를 깎는 구도의 도정(道程)이 있을 때, 열반이라는 값진 열매가 열린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과문한 탓이겠으나 나는 아직 우리 나라에서 고행하는 모습의 부처님을 뵙지 못했다.  우리의 석불은 안온한 모습, 완벽한 인간성의 추구라는 관심에서 제작되고 봉안된다.  그러나 고행상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시라도 구도의 과정보다 결과만을 탐하는 심정의 발로는 아닐런지?  지나친 비약이 될런지도 모르겠으나 보살의 구도보다 부처의 완벽함만을 이상으로 삼아  온 것은 아닐지 반성해 볼 일이다.

우리 불교 집안에는 너무 늙은이가 많다.  육체 연령으로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조로(早老)의 기미가 농후하다.  그래서 걸핏하면 전통이라는 나이 자랑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그러나 요즘 세상은 늙은이의 권위에 그냥 복종하지만은 않는다.  흰 머리카락에 합당한 처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도 젊어져야 한다.  현실감각을 지녀야 하고, 시대 흐름의 맥을 짚을 줄 알아야 한다.  불교는 결코 골동품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