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風에서 일어나 보살도를 가다

신앙실록

2008-01-29     관리자

  1 나의 반생

 제가 감히 신앙체험을 기록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불보살님의 깊으신 보살핌의 은덕인 것은 뒤에 자세히 말씀하겠습니다마는 저의 인생이 오늘과 같이 보살도를 지향하게 된 것을 저는 한없이 한없이 감사하고 한편 인생이라는 알지 못할 행로에서 거듭 불보살님께 머리를 숙이는 바입니다.

 손에 기름 묻히고 기계를 만지고 운수사업을 생업으로 알던 제가 오늘날 염주를 한손에 들고 염불을 권하며, 한편 병고에 시달리는 형제에게 무엇인가 도움이 되려고만 뛰어다니는 오늘을 생각하니 이러한 놀라운 변화에 스스로 놀라움을 금할 길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의 경우 염불을 하고 보살도를 향하며 병고중생에게 이바지가 될 숙명을 안고 있는데 그 길을 어기고 돈벌고 사업하려고 뛰어다니던 저의 반생은 제가 오늘에 오기 위한 어떤 수업과정인 것으로도 생각됩니다.

 제가 부모님 따라 일본간 것은 두 살때 일입니다. 일본 후구다현에서 성장하여 그곳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해방되는 10월 귀국 하였습니다. 그때가 21세입니다. 그후 20년 가까이 미군 기지에서 근무 하다가 71년 10월에 스스로 사업을 한다고 운수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무렵에도 생활에 여유가 없어 오직 바라는 것이란 부모님 모시고 집안 살림살이 잘 꾸려가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중 독실한 불교신자 한분이 계셔서 그 선생님 영향으로 부처님 공경하는 마음은 쉬지 않았습니다.  해운대 목포절은 귀국 후 잘 다니던 곳입니다.

 그때는 남해 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던 1973년 7월경 일입니다. 부산에서 차를 몰고 양산으로 가는데 마땅히 고속도로를 거쳐야 하는데도 어찌된 착각에서였는지 저는 부산에서 구포를 거쳐 낙동강을 따라 양산에 이르는 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구포와 만덕고개사이의 고속도로 공사로 길은 진흙밭을 근근히 빠져나가는 엉망길이었습니다. 이길에서 차를 몰고가면서 어떻게 여기를 빠져 갈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저는 핸들을 잡은 채 뇌일혈을 일으킨 것입니다. 차를 진흙밭에 처 박아둔채 차 안에 엎드려졌습니다. 얼마인가를 지나 정신이 들고 보니 저는 핸들 위에 엎드려져 있었고 반신은 이미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이래서 중풍환자로 반신불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생애를 전환할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2 기도로 운명을 바꾸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치료를 위해서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재산도 날라가고 기력도 탈진했는데 의약으로는 더 어쩌지 못한다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근근히 몸을 끌고다니는 불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때 저희집에 간혹 들리시는 스님이 계셨는데 평소에 별로 존경하지 않던 스님입니다. 저에게 말하기를 「처사님, 실망하지 마십시오. 어디든지 생각나는대로 서쪽으로 찾아가 부처님게 기도하면 틀림없이 회복됩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서쪽 절?『생각해 보니 전남 영광군에 저희 큰어머님이 지은 절이 생각나서 그곳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일을 머물다가 가까운데 있는 불갑사 절로 갔습니다. 「내가 사느냐, 병신으로 죽느냐」의 결판은 불갑사 부처님이 맡아계신다는 생각으로 부처님께 매어달려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불갑사 대웅전은 웅장합니다. 그리고 삼존불 존상이 또한 엄정하십니다. 그러나 그당시는 법당이 크게 퇴락하여 빗물이 얼마나 새어들었던지 부처님 머리나 얼굴에는 수많은 빗물자국이 줄을 지어 있었으니 그밖에 법당주위 형세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부처님 앞에 합장하니 「병신 몸 고쳐주십시오」라는 생각에 앞서 「저로 하여금 이 법당을 고칠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는 생각이 먼저 일어났습니다. 불교예법도 몰랐고 기도하는 방식도 몰랐던 저는 그저 부처님 앞에 엎드려 기도를 드렸습니다.

「부처님 제가 이법당을 고칠 수 있게 해주십요. 저의 병을 낫게 해 주십시오」라고 절을 했습니다. 중풍환자가 합장을 제대로 할 리 없고 예배가 제대로 될 리 없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엎드러지고 쓰러지더라도 저는 있는 정성을 다하여 절하고 다시 또 절하였습니다.
땀이 흘러 눈을 덮고 온 몸을 땀으로 목욕하면서 부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이러기를 7일이 되는 새벽이었습니다. 부처님 앞에 기도하다 엎드렸습니다. 저는 장엄하신 광채를 띄우고 자비한 음성이 곧 흘러나올 듯한 세분의 부처님 앞에 합장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왼쪽에 앉으신 부처님께서 손을 내리시어 저한테 한 물건을 주시는데 그것은 구슬 같기도 한 밝고 찬란한 금빛 광명을 띄운 계란이었습니다. 저는 보배구슬을 받으면서 온몸에 넘쳐나는 감동을 억제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무말 하지 못하고 비오듯이 눈물을 흘리며 그냥 엉엉 울어댔습니다. 어느덧 정신들어 보니 그것은 비몽사몽간의 일이었습니다. 구슬은 분명 받아지닌 것 같고 눈물은 법당마루 흥건히 흘러 있었습니다. 저의 심신은 날을 것 같았고 몸의 병은 씻은 듯이 없어졌습니다 저때의 감격을 어찌 다 말로 하겠습니까.

 몸이 가벼워진 저는 전국 구석구석 절을 찾아 행각을 시작하였습니다. 뚜렷한 목적이나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만 절을 찾아 부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며 북에서 남으로 전국을 누볐습니다. 이때 이시절의 저의 심정을 지금도 저는 잘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부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부처님을 두루 찾아 예배하고 기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던 끝에 저에게 새로운 운명의 문은 서서히 다가왔습니다. 

  3 보살도의 새 생애가 열리다

 두 번째 다시 불갑사 부처님 앞에 이르렸습니다. 기도도 많이 익숙하였기 때문에 만반준비를 하고 부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존상을 우러러 보고 염불하며 예배드리는 저의 기도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웬일인지 잠이 와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정수리에서 폭포물을 퍼붓듯 잠이 좔좔 흘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시작 2,3일후 부터는 밥만 먹으면 방에서 잠만 자는 나태 생활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잠에서 새로운 경계를 얻었습니다. 잠만 들면 꿈의 문이 열리고, 꿈에서는 온갖 환자가 나타나고, 꿈속에서 저는 환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기도하여 치료하게 하는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기도를 마친 날에는 어느덧 제자신에게는 병 있는 사람을 보면 고쳐줘야겠다는 생각과 어떻게 하면 고칠수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74년 음력 12월 8일 성도제 날입니다.

 그때부터 저의 생활은 바뀌어졌습니다. 약사여래부처님을 생각하고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을 돕겠다는 그런 생각으로 사방을 다녔습니다. 가다가 환자를 만나면 기도하고, 기도로 고치게금 하였으며 심지어 다 죽어가는 돼지새끼 여섯 마리를 한꺼번에 살린 일도 있습니다. 저는 병고중생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 것은 제가 불법을 알았다거나 지식이 있어서가 아닌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 면에서 저는 무식한 것입니다. 다만 불보살님게서 저의 자그마한 진실을 받아 주시어서 은혜로운 가피력을 주신 것이며 제가 진정 불보살님의 자비하신 마음을 받들고자 할 때 저로 하여금 조그만치나 보살행을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제가 병고중생에게 도움을 주고 지내는 동안 적지않은 분들이 발심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불갑사를 중심하여 원각사 · 태종사 등에 법당중수 등 많은 불사를 하였으며 앞으로도 이 힘 다바쳐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불사에 몸바칠 각오로 있습니다. 앞으로는 동래 금정산 밑에 양료원 · 요양원 짓는 일을 도와 좀더 저의 정성을 이일에 집중시키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저의 이런 신앙활동에 대하여 잡음을 일으키고 방해를 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직 불보살을 따르고 중생의 병을 고쳐주며, 우리나라의 평화와 안락을 이루어가는데 이바지하고자 하는 이 길에는 결코 변함이 없고 궁함이 없습니다. 다만 불보살님의 가호력과 많은 스님들의 가르침과 지도를 바라고 감사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