圓測法師의 생애

특집Ⅱ 전통사상의 현재

2008-01-29     관리자

 圓測法師는 元曉大師보다 四年 먼저 출생한 선배로서 眞平王 三四(六一二)년에 경주에서 얼마 떨어지지않은 半深里에서 태어났다. 諱는 文雅 라 하고 字는 圓測이라 하였다. 그는 王孫으로 三藏의 어린 나이에 출가하였으며, 十五藏의 어린 나이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雖千言萬語 一歷具耳  不忘於心」이라 칭찬한 바와같이 무엇이든지 한번 들으면 잊지 않고 기억하였다고 전한다. 이와같이 천재적인 재질이 있는 원측법사는 長安의 元法寺에 거주하면서 대승과 소승의 경론을 연구하였다. 특히 그는 그 당시 가장 저명하였던 僧辨大師(五六八ㅡ 六四二)와 法常大師(五六七 ㅡ六四五)를 師事하면서 俱舍論과 成實論 그리고 攝大乘論과 十地經論 및 毘曇論 등을 연구하였다.
이때에 법사는 소위 舊唯識이라고 불리어지는 眞諸三藏과 菩提流支三藏의  攝論恩想과 地論思想을 충분히 연구하여 사상적 기반을 구축하였던 것이다. 그의 많은 저서중 유식사상을 전해 줄만한 저서는 다 없어지고 현재 남아있는 것은 解深密經疏 十卷 과 佛說般若波羅密多心經과 仁王經疏가 남아 있는데 이중 解深密經疏가 唯識學의 指針이 되고 있어 활발히 연구되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그의 사상을 엿볼 수 밖에 없다. 이 책은 중간에 第八卷 卷頭의 一部와 마지막 第十卷 全部가 떨어져 나가 없는 것을 西藏大藏經에 수록된 것을 발견하여 稻葉正就氏가 그 분실된 第一部와 第十卷을 漢譯해 내어 유통되고 있다.

 우리는 解深密經疏를 통하여 그가 眞諦二藏의 영향을 많이 입었고 또 智度論등 반야사상과 화엄경등 대승사상에도 많이 접근하였음을 충분히 알수 있다. 이러한 사상들을 포용하여 유식사상을 이해하고 독특한 견해를 정립할 수가 있었던 것은 玄奬法師가 인도에서 돌아오기 전에 이미 쌓았던 학식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법사는 어학실력이 뛰어나 梵語등 六個國語를 통달하였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법사의 명성이 中國內에 펴졌으며, 마침내 唐大宗으로부터 度牒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뒤에 太宗의 권유로 당시에 유명하였던 西明寺에 주석하였던 바 이절에 오래 계셨으므로 그를 西明大師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가 三三藏때 현장법사가 十七年間의 인도유학을 마치고 貞觀十九년(서기 六四五)에 귀국하여 서로 만났을 때 生而 知之한 것처럼 통한 바가 있었다고 전한다.

 원측법사는 현장법사의 제자라고 하지만 오히려 선후배간의 대면과 같았으며 비록 현장법사(六0 一 ㅡ 六六四)보다 十三藏가 아래인 원축법사(六一三 ㅡ 六九六)이지만 학문은 이미 닦아 놓은 것이 많아 학문적으로는 서로 대등한 위치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현장법사에게서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예를 들면 현장법사에게는 三千第子가 있는 가운데 四人의 上足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一秀의 入室者라는 가장 수제자가 있었던 바 그가 바로 慈恩 窺基大師(六三二 ㅡ 六八三)였다. 현장이 규기등 第子들에게 새로운 유식학을 강의할 때 원측법사는 새로운 유식학을 배우고자 수문장에게 뇌물을 주고 盜講 하였으며 몰래 바로 자기 처소로 귀사하여 대중을 모아 놓고 강의를 하며 唯識論疏를 저술하니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규기법사는 이 소식을 듣고 창피하고 부끄럽다고 몸져 누워 버렸다. 현장 법사는 이를 알고 위로하기를 원측법사는 비록 유식론소를 저술하였지만 새로 가져온 陳邦의 因明論은 모르니까 이것을 강의해 주겠다고 하였다. 규기대사는 기뻐하며 자기만을 위하여 瑜伽論等을 강의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현장은 이를 허락하고 강의하니 이때도 원측법사는 수위에게 돈을 주고, 또한 도청하고 돌아와 대중을 모아놓고 강의하였다. 규기는 또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몸 둘 바를 모르니까  현장법사는 또 위로하며 , 이번에는 五種性법을 강의해 줄터이니 잘 유통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전한다.

 이상과 같은 사실은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법사에 대한 도청설은 모략 중상이며 그가 규기등 중국계 학자들보다 더 뛰어난 것에 대한 시기 질투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법사께서 일마나 학구열이 강한가를 여기서 엿볼 수 있다,
또한 예는 현장법사를 처음 만났을 때 유가 유식을 원측법사에게 보이자 법사는 현장과 다름없이 훌륭하게 해석하였다고 한다. 이상으로 원측법사의 학식은 어느 정도인가를 능히 알수 있고 또 이러한 학덕때문에 사방에서 모여들어 그에게 지도를 받았던 바 그중에서도 신라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하여 자연히 규기대사를 비롯한 중국계 학파들로부터 질투를 샀고 심지어는 중국계와 유식학의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이단자라고까지 중상을 받은 일이 있으며 후세에 新羅學派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물론 원측법사는 위에서도 말한 바와같이 모든 학문을 섭렵하였기 때문에 현장과 규기등 중국계 학파가 무조건 護法論師의 논리에만 추종한 것과는 달리 독자적인 견해로서 반야사상과 대승사상을 가미하여 일승적인 견해로 유식학을 다룬점이 없지않다.

 원측법사는 서명사에 계시면서 성유석론소, 해심밀경소, 인왕경소, 금강반야론, 觀所綠論, 반야심경소, 無量義經疏 등 많은 저서를 내고 중국계의 모략등에는 아랑곳없이 山水를 즐기며, 때로는 終南山 雲際寺에도 게셨고, 그곳에서 三O 여리나 떨어진 곳에 암자를 짓고 八年이나 혼자서 지낸 일이 있다. 그러나 서명사학도들이 모셔와 지도를 받았으며, 則天武后도 부처 모시듯 하였고, 한때 신라 神文王이 武后에게 법사를 보내달라고 간청하였으나 武后는 정중히 거절하고 말았다.
이와같이 모시는 측천무후는 법사에게 인도 고승이 오면 영접토록 하였고, 또 그가 현장역의 반야심경등에 誤譯를 지적할 정도로 어학이 능하였기 때문에 국가의 역경사업에 많이 참여시키기도 하였다. 역경의 업적을 들어본다.

 먼저 인도僧 地派詞羅(日熙) 三藏의 譯場에 圓測, 薄塵, 靈辯, 嘉尙 , 道成등 秀才 五명을 唐 高宗(元年 六七六)이 추천하였을 때도 수석으로 證義에 참여하였으며 이때 大乘密巖經, 大乘願識論 등 十八部 三四卷 이 번역 되었다. 그후 서기 六九三년에 菩提流支三藏이 寶雨經등을 번역할 때도 함여하였고 또 東都의 實叉難陀가 干전闐國에서 돌아와 신화엄경을 번역할 때도 참여하였다. 그는 불행히 이를 다 마치지 못하고 신라 考昭王 五年(六九六) 七월 二 0 일에 八四藏로써 佛授記寺에서 열반에 드셨다. 그의 문도들은 龍門山 香山寺에서 화장하여 白塔 을 세웠다.

 그후 西明寺 住持 慈善大師와 大薦福寺의 大德 勝莊法師(新羅人)등이 다시 終南山 豊德寺 東領上에 탑을 세우고 寶凾石槨으로 四九粒의 사리를 잘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원측법사와 인연이 많은 곳이기는 하지만 너무 한적하여 법사의 法德 이 널리 알려지지 않으므로 후에 龍興寺 仁王院 에 계시는 廣越法師 가 志願하여 興敎寺의 현장법사탑 左側에 모셨다. 즉 현장탑을 중앙에 모시고 원측은 좌탑 · 규기는 우탑으로 모셔서 균형을 잡음과 동시에 異國 사람인 원측법사 가 당당하게 중국의 유식학계 거성으로 모셔지게 되고 또 공인된 실력자임을 과시한데 큰 의의가 있다.
第子로는 道證 · 勝莊 · 慈善 등이 있으며 그 중에서 도증법사는 스승의 독특한 일승적인 유식학을 품수하여 중국계의 규기 및 慧沼등과 맞서 대항하고 원측의 유식을 설양하는데 열중하였다.

 여하튼 원측법사는 한국적 유식학을 창안하였으며 한국의 인간상을 중국에 심어준 위대한 學僧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