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의 세계] 화엄경의 신앙세계

화엄경의 세계

2008-01-28     탄허 스님

  1 화엄경을 만나던 시절

 내가 절에 온 것은 二十二세 때이다.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이다. 처음 三 · 四년 간은 일체 경전이나 문자를 보지 않았다. 그것은 선방의 당연한 관례이고 선방에 온 사람으로서 당연한 자세이었다. 그런데 얼마를 지나자 우리 스님이신 한암(寒巖) 노화상께서 나에게 이렇게 권하셨다.

『도(道)가 문자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글을 아는 사람은 일단 경을 봐야 한다.』

 몇 번인가 권하셨다. 스님께서는 내가 문자에 빠질 사람이 아니라고 인정하신 모양이다. 그래서 나의 성장을 위하여 반드시 부처님의 경교와 조사의 말씀을 볼 것을 권하셨다. 당대에 대강사라 하면 박 한영(朴漢永)스님이다. 그래서 스님의 말씀을 따라 박 한영 스님에게 가서 경을 배우기로 하고 편지를 냈다. 그랬더니,

『한암 스님같은 대덕고승 앞에 있는 분이 나에게 배우러 올 것은 없오.』
하는 내용의 편지가 왔다. 그러나 그것을 불구하고 떠나기로 하고 스님께서 온갖 준비를 해주셨다. 그 때 내 나이 二十五세다. 그런데 때 마침 강원도지사인 손 영목(孫永睦)씨가 주동이 되어 강원도 삼본산 연합승려수련소를 오대산에 개설하게 되었다. 손 영목 씨는 다들 아는 유명한 지사다. 비록 일제 치하에서 지사를 지냈지만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해오자 그는 지사직을 동댕이치고 끝내 그 이름을 지켰던 사람이다. 그가 강원도내 유점사, 건봉사, 월정사의 3본산에게 권하여 한국 불교의 중견승려를 양성하기 위한 수련원을 오대산에 개설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되니 내가 강원으로 떠날 수가 있었다.
오대산에 수련소가 되니 스님이 강의를 하시면 의당 조교(助敎)가 있어야 할 텐데 조교의 적임자로 내가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한문을 배웠다는 탓도 있거니와 다들 나를 아껴 준 것이다.
그렇게 되니 나도 선원뿐이었을 때는 경 볼 생각을 안 했지만 선원이 수련소가 되었으니 경을 볼 수 있는 터라, 그럴 바에야 스님 밑에서 배워야겠다고 생각이 들어 다른 것을 포기하였다.
수련원 개설이 되던 날은 손 도지사와 당시의 중추원 참의(參議) 몇 분이 참석하였었고 수련생은 약 三O명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오늘에 고암(古岩) 대종사나 서옹(西翁) 대종사도 그 때의 일원이다.

 수련소의 일과는 조석으로는 참선을 하였고 낮에는 경을 배우고 또한 외우는 것이었다. 그것 외에도 많은 경전을 또한 배울 수 있었다. 나는 사집(四集)은 스스로 열람하고 그 밖의 경전은 스님에게서 배웠는데 전등(傳燈) 염송(拈頌)까지 완전히 마치기는 만 7년이 걸렸다. 수련소의 정규과정은 금강경과 범망경이었지만 나는 별도로 경을 배웠던 것이다. 수련소가 처음에는 1년제이었으나 나중에는 2년으로 바뀌었다.
나는 경을 볼 때에 토가 없는 한문 경전에 토를 달아가며 보았었다. 그런데 화엄경을 볼 때에 이르러서 문제가 일어났다. 그것은 청량소(淸凉疏)를 보느냐 통현(通玄)의 화엄론을 보느냐가 문제가 되었다. 그 무렵 나는 수련생들의 요청에 의하여 보조(普照)선사의 수심결과 원돈 성불론 등 보조어록을 석사한 적이 있었다. 그때에 원돈성불론에 명쾌하게 화엄과 선의 차이가 분명한 것을 보았던 터라 다들 말하기를 통현장자의 화엄론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특히 그 때 함께 지내던 탄옹(炭翁) 스님이 그것을 역설하였다.

『우리가 이 기회에 화엄론 법문을 안 들으면 기회가 없으니 꼭 배워야겠다. 강당에서는 배울수 없는 것이니 이 때에 법문을 들어야 한다.』했던 것이다. 그 무렵 회중에 허 몽성(夢惺)스님이 계셨다. 몽성 스님은 함양(咸陽)에서 면장을 하다가 늦게 출가하였었는데 나이는 60이 넘었었다. 그래도 정정하고 열심히 공부를 하였었다. 그리고 그 분의 부인도 와 있어서 외호를 하였다. 화엄론으로 교재를 정하자 책이 문제였는데 몽성 스님의 부인이 화엄론 10여질을 시주 하였다. 아마도 그 때 가격이 한 질에 10원이었던가 한다. 적은 돈이 아니다. 그 때 많은 대중들이 함께 청강하였다. 나는 그 때 대중 앞에서 경문을 새겨 나갔다. 그 다음에 스님이 감정하시고 또 모르는 것은 묻고 대답하며 진행하였다. 끝에 다시 한번 토를 달아 읽어내려 갔는데 그 때에 다들 토를 달았다. 화엄경과 논(論)을 합해서 백 이십 권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진행하여 꼭 열 한달이 걸려서 마쳤다. 그 다음에 전등 염송을 공부하였다. 역시 내가 새겨나가고 스님께서 감정하시고 강을 하시는 그러한 방법으로 진행하였는데 그 때에 총무원장 이 종욱스님이 마침 오셔서 방청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내가 석사하는 것과 당시의 수련원을 직접 보고 크게 찬탄하고 나에게도 과한 찬탄을 하였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게 해서 전등 염송까지 짬지게 보아갔다.

 그 때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화엄론을 토를 붙여서 출판 보급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다.「화엄론은 참선하는 사람하는 사람이 아니면 볼 근기가 못 되니 강당에서는 행세할 수가 없다. 그러니 현토하여 출판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약 40년이 지난 근년에 내가 화엄경의 번역을 완성한 것은 그 때의 우리 스님의 부촉이 종자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스님의 부촉에 몇 배를 더 해서 완성한 셈이다.

 화엄경을 집필하게 된 직접 동기는 지금부터 25년 전으로 소급한다. 그 때 나는 오대산에 수도원을 열고 있었다. 수도생을 위하여 화엄학을 중심으로 교수하고 있었는데 그 기초 과정으로 영가집(永嘉集) 기신론(起信論) 또는 능엄경을 배워갔다. 그래서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다음에 화엄을 공부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특강으로 노장학(老莊學)이나 주역(周易) 등을 간간 했었다. 그것이 5개년 계획이었는데 종단내부의 분규로 중도에 와해되었다. 그 때 수도생들을 위하여 준비한 교재가 화엄경이었다. 그뒤 일을 진행하면서 17년이 결렸고 마지막 논소를 합하여 정리하는 데만 만 9년이 걸렸다. 원래 화엄의 정신을 밝혀내는 데는 화엄론으로 만족하지만 자구(字句)를 세밀하게 살펴가는 데는 불가불 청량소를 빼 놓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어 토를 달고 번역을 하고 논과 소를 곁들이는 방대한 사업이 된 것이다.

  2 화엄경의 성격

 화엄경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오도하신 후 최초 三 七일 간의 설법이라고 전한다. 말하자면 부처님께서 친히 체득한 도리, 그대로를 여실 털어 놓은 법문이다. 그 후에 아함경을 十二년, 방등부 경전을 八년, 반야를 二十一년, 끝으로 법화 열반을 다시 八년을 설해서 이렇게 四十九년 설법을 하셨다. 부처님께서 만약 화엄의 도리를 중생들이 알아들었다면 그 이후의 설법이 없었을 것이다. 산 중에서 자기(子 期)를 만났던들 어찌 황엽(黃葉)을 들고 산에서 내려왔을까보냐.

『약야산중 봉자기(若也山中逢子期) 기장황엽하산하(豈將黃葉下山下)』

 산 중에서 이 도리를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에 짐짓 산에서 내려와 누런 단풍잎을 들고 어린 아이들을 달래는 설화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화엄의 도리는 그리 알아질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불가불 부처님은 四十九년 동안 설법을 하셨던 것이다. 결국 돌이켜 보면 화엄 설법 이외에 四十九년을 설법은 화엄의 도리에 도달시키기 위하여 설해진 과정적인 방편이라고 보아야 한다.
아함부(阿含部)나 방등부(方等部) 경전은 유치원이나 중학 정도가 될 것이고 화엄은 대학원 정도라고나 할까. 그러니 인류를 구할 사람이라면 최고의 학문 최고의 사상을 가지고 말할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부처님은 명백히 화엄의 도리를 가져, 당신께서 설하시고자 하신 법문의 핵심을 삼으셨다고 볼 수 있다. 거듭 말하지만 그 밖의 다른 법문은 화엄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과정적으로 차제설법을 하신 것이다.
다시 비유로 말하면 화엄경은 큰 바다에서 노는 것이고, 기타의 법문은 강물에서 노는 거와 같은 것이다.
아무리 팔만 대장경을 보았다 하더라도 화엄경 도리를 모르고 보면 모두가 단편에 불과하다. 큰 도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화엄경을 보고 나면 무엇이든 그 속에 있는 것을 안다. 화엄경에 삼주인과(三周因果)를 밝힌 것을 보면 노사나불이 과거 일체 부처님과 똑같이 성불 한다. 이것이 제일주인과(一周因果)이다.
일주인과, 그것이 부처님의 과덕(果德)인 것이다. 보살이 닦아가는데 무엇을 믿는냐 하면 이것을 믿는다. 이것을 신(信)으로 삼는 것이다. 만약 믿는다 하더라도 믿는 것이 근거가 없으면 그것은 미신인데 보살은 부처님의 과덕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보살의 십신(十信)이다. 과거제불이 성불하고 그 성불은 중생의 우글대는 망상과 똑같다. 부처님의 과덕이 곧 내 마음이다.
이렇게 믿는 것이 바른 믿음이고 이것 밖의 믿음은 삿된 믿음이다. 그래서 십신은 위(位)로 치지 않는다. 닦는 것이 아니고 믿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신이 만족해야 비로소 주초(住初)라고 한다. (계속)

〔文責 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