緣起의 깨달음

불교의근본사상(제5회)

2008-01-27     관리자
 

붓드하(覺者)]라는 말이 뜻하는 바와 같이 불교는 깨달음을 궁극의 목표에 두고 있다. 모든 냇물이 바다에 이르듯이 모든 불교 교리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길에 불과하다. 깨달음에 이르지 않는 사유와 실천은 무의미하다고 부처님은 한결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지난 호에 소개한 사성제(四聖)는 원시불교에 설해진 여러 가지 종교적 실천의 길에서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것 또한 깨달음을 궁극의 목표에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 깨달음이 원시경전에는 어떤 말로 표현되고 있을까? 이것을 살펴 봄으로써 불교의 근본사상을 간단히 살펴보려는 우리들의 이 시도(試圖)에서 원시불교편을 마무리해도 좋을 것이다.

 

깨달음의 내용을 문제로 하는 입장에서 원시경전을 살펴 볼 때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바는 거기에 설해진 [十二緣起)라는 교설이다. 우선 십이연기라는 법의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은 [명(明)]이라는 개념인데 그것이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에 다음과 같이 나타남을 본다. [비구들이여 내가 사성제에서 바르게 思惟하고 마땅히 해야할 바를 알고 그것을 해 마쳤을 때(3전12행) 내게 눈과 지혜와 명과 빛이 일어났느니라](잡아함 권15)

[명]이라는 말의 원어는 [비댜아(vidya)]인데, [비디-vid]는 [발견한다] [밝힌다]는 뜻과 [실재(實在)한다]는 뜻이 있다. 따라서 [비댜아]는 [발견되는 것][밝혀지는 것] 또는 [실재하는 것]이라는 말이 되어, 인도에서는 일찍부터 학문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그것을 [명-明]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사성제를 완전히 닦았을 때 그러한 [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성제가 결국은 깨달음에 이르름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본래 깨닫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종교적 체험을 표현하는 말이다. 따라서 그것은[ 발견되는 것] [밝혀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깨달은 자와 그러지 못한 자와는 이제 이[명]의 유무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할 수가 있다 [명에 머무른 자는 부처요 그러지 못한 자, 다시 말하면 [명이 아닌 것] 즉 無明에 머무른 자은 중생이다. 부처는 생사의 괴로움을 완전히 벗어났지만 중생은 生死의 괴로움을 겪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무명으로부터 생사가 어떻게 발생되는가. 그 과정을 관찰해 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원시경전은 모든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보리좌에서 무명으로부터 생사에 이르는 과정을 관찰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으로써 저것이 일어난다.

즉 무명에 緣하여 작용(行)이 작용에 연하여 식별(識)이 있고 식별에 연하여 이름과 색(名色)이 있고 이름과 색에 연하여 6처(6處)가 있고 6처에 연하여 충돌(燭)이 있고 충돌에 연하여 느낌(受)이 있고 느낌에 연하여 목마름(愛)이 있고 목마름에 연하여 취함(取)이 있고 취함에 연하여 됨(有)이 있고 됨에 연하여 생함(生)이 있고 생함이 있기 때문에 죽음(死)이 있다. 그리하여 하나의 커다란 괴로움의 온(蘊)이 집기(集起)하게 된다.

따라서 이것이 없으므로써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

즉 무명이 멸함으로써 작용.식별.이름.색.육처.충돌.느낌.목마름.취함.됨.생함.죽음이 없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의 커다란 괴로움의 온이 멸하게 된다]


무명으로부터 생사에 이르는 이러한 발생법을 [연기(緣起)]라고 했다. [緣하여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 과정이 열두 단계를 갖고 있으므로 12지연기라고 한다.


원시불교는 이 십이연기를 부처님이 이룬 깨달음의 전체적인 내용으로 제시하고 있다.[연기라는 법은 내가 지은 바도 아니요 남이 지은 바도 아니다. 부처가 세상에 나오건 안 나오건 법계 상주의 진리로써, 부처는 다만 이것을 깨달아 중생들에게 설하여 깨우쳐 줄 뿐이니라](잡아함 권2)

현재의 석가모니부처는 물론, 과거의 모든 부처도 보리좌에서 십이연기를 관찰하셨다고 설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십이연기를 깨달은 자를 벽지불(辟支佛)이라고 부른다. 벽지불은 독각(獨覺) 또는 연각(緣覺)이라고도 번역되는데 원어는 [하나에 대해서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부처라는 말위에 이러한 뜻의 한정사(限定詞)가 붙어 있긴 하지만 어떻든 그를 [부처]로 보고 있다는 것은 십이연기가 원시불교에서 깨달음의 전체적인 내용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십이연기설은 원시불교의 복잡한 교리들을 하나로 통일 종합하고 있다.

그 십이지에 포함된 법들은 십이처설이나 오온설 등에서 개별적으로 다루었던 것들이다. 그리고 연기라는 개념은 인연과 집기함(集)의 두개념을 종합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목적이 깨달음을 얻게 하려는 데에 있음을 생각할 때 십이연기 이전의 모든 교리는 십이연기를 이해시키기 위한 예비적인 교설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12여기는 실로 원시불교의 묘법(妙法)이라고 할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학자들 사이에는 12연기를 그렇게 중요한 교리로 보는 것을 꺼리는 이들이 있다. 예를 들면 12연기설은 후대에 교리를 정비(整備)할 때 성립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 이유로, 연기설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는데, 이것은 12연기설이 정비되어가는 그 과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가지 살펴본 바와 같이 그러한 현상은 오히려 12연기를 점진적으로 이해시켜 가기위한 교리 시설(施設)로 해석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 어떤 학자는 12연기설과 사성제와 비교할 때, 후자가 괴로움의 원인을 욕심에 두고 있는데에 대해서 전자는 무지에 두고 있으므로 양자는 분명히 이질적인 교리체계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12연기설의 연원을 바라문사상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제에 대한 이해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경전에서 괴로움의 원인인 [집기함]을 욕심이라고 설명해 줌이 있지만 이것은 [집기함]의 참다운 뜻이 아니라 통속적인 뜻으로 설명해 준 것에 불과 한 것이다.

전통적으로는 12연기설은 인간이 생사에 윤회하는 과정을 도식화한 것이라고 보아왔다. 이러한 견해(삼세양중인과설)를 배격한 것은 현대 불교학의 큰 성과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대 학자들이 그 연기설을 다시 만물의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을 나타내는 논리적인 관계로 전락(轉落)시킨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논리적인 연기관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말에 커다란 비중을 둔다. 그리하여 12지는 일상적인 사물을 열거한 것에 불과하여 그순서는 별로 문제가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대승불교의 철학사상에 입각한 해석이다. 그러나 원시불교의 연기설을 대승 철학사상의 이론에 끼워 맞추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더구나 원시경전에 12지의 순서가 흐트러져 나오는 경우는 한번도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12연기설이 진정으로 뜻하는 바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죽음과 같은 인간의 괴로움은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인간의 무지 즉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라는 곳에 그 초점이 있다. 인간에게 괴로움이 없다면 힘들여 일할 필요도 없고 철학이나 종교와 같은 것도 애초에 발생 조차 않했을 것이다. 그러나 절망적인 죽음의 존재, 그것이 있으므로 해서 인간은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여기에 인간의 슬픔과 절망이 있다. 인간 존재가 본래 이런 것이라면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마음껏 향락이나 하다 말까. 보람있는 일을 찾아 목숨을 바쳐 버릴까. 가지가지 인생관과 종교 사상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관이나 종교사상은 모두가 죽음을 하나의 기정사실 또는 절대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있다.

12연기설은 그와는 방향이 백팔십도로 다르다 [죽음]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왜 있게 되는가. 죽음 바로 그자체의 성찰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죽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생함이 있으므로 해서 상대적으로 있게된 것임을 깨우치고 있다. 그 생함은 또 어떻게 있게 되는가.

그 앞에는 [됨(有)]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그리하여 다시 그 이전의 원인.원인을 추구해 들어갈 때 마침내 그 가장 근원에 진리에 대한 무지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죽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달을 때 곧 멸하는 성질의 것이다. 12연기설은 이와 같이 인간의 무지로부터 죽음의 현상이 있게되는 그 연기과정을 똑똑하게 설해 주는 곳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12연기설은 불교의 철학적인 입장을 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처님 당시의 인도 사상계를 크게 전변설(轉變說)과 적취설(積聚說)로 나눌 수가 있다.

전자는 일체는 범(梵)의 전변이라는 일원론적인 범신론이고 후자는 일체는 몇 개의 물질적인 요소의 적취라는 다원론적인 유물론이다.

이에 대해서 불교가 취한 입장은 이 연기론이다. 부처님은 이에 입각해서당시의 그릇된 견해들을 비판하고 계심을 보기 때문이다.


우선 바라문들이 그들의 전변설에 입각해서 인간에게는 불변의[ 아-트만(自我)]이 있어서 이것이 생사 윤회의 주체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러한 [아-트만]의 존재를 단연히 부정하고 계신다. 일체는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苦)이고 괴로운 것은 [아-트만]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소박한 이유를 들어 바라문의[아-트만]설을 부정하신 것이다. 그러나 철학적인 이유로는 12연기설에 의해서 무아 또는 공(空)의 가장 심오한 뜻을 나타내고 계신다. 생사는 우리들의 세계라고 볼 수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다. 따라서[아-트만]과 같은 절대적인 것은 거기에 있을 수가 없다. 왜 그러냐면 무명이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망념]과 같은 것이므로 이것에서 연기한 법에 실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비유하면,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했을 때 그런 착각에 의해 놀람,달아남 등의 일련의 법이 연기하지만 이때 그렇게 연기한 법속에 [뱀]이라는 실체는 존재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부처님이 당시의 [아-트만]설을 강력하게 부정하신 것은 이런 입장에서인 것이다. 이것이 인도 철학사상에 이채(異彩)를 띄는 불교의 무아설 또는 공의 사상이 된다.


그렇다고 불교의 이러한 무아나 공을 아무 것도 없는 허무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실체는 없지만 망념까지 없는 것은 아니고, 망념이 없으므로 해서 그에 연하여 생사의 괴로움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까의 비유에 의하면,[뱀]이라는 생각속에 [뱀]의 실체는 없지만, [뱀]이라는 망념까지 없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따라서 無라고도 할 수 없고 有라고도 할 수가 없다. 어떤 말로 이 뜻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

부처님은 유.무의 두 극단을 떠난 중도(中道)라는 말로 그것을 표현하신다.

[세간의 집기함을 여실하게 관찰할 때 그것을 무라고 할 수 없고 세간의 멸함을 여실하게 관찰할 때 그것을 유라고 할 수가 없다. 이것을 이르되 두 끝을 떠나 중도를 설한다고 하나니 12연기설이 곧 그것이니라](잡아함 권12)


12연기설은 이와 같이 원시불교에서 부처님의 깨달음의 전체적인 내용으로

제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교의 무아설이나 중도사상의 이론적인 근거가 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이 지닌 중요성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오히려 부족할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성립이라거나 바라문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봄은 원시불교의 근본사상을 사뭇 흐리우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연기는 실로 심심(甚深) 난견(難見)의 법으로서 그 참다운 뜻은 깨달음을 통해서만 비로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