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사명대사의 생애

특집Ⅱ 사명대사

2008-01-27     정병조

 

1. 구국의 영웅

한국 불교의 역사를 통해 명멸했던 숱한 구도자들 중에 사명스님만큼 찬연한 업적을 남겼던 분도 드물다. 임진왜란의 와중에서는 구국의 용장으로서 또한 뛰어난 전략가이며 외교가로 활약했었지만, 언제나 겸허한 구도자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았었다. 특히 불교뿐 아니라 유교를 비롯한 모든 학문을 섭렵한 스님은 당시의 소위 지식층 사이에서도 크게 명성을 떨쳤던 것이다.

스님의 행적을 알려주는 기본적인 자료로서는 금강산 건봉사의 사명대사 기적비와 해인사 홍제암의 자통홍제존자 사명대사석장비명이있다. 이 외에도 문도, 성일, 뇌묵당 등이 편집한 발문 및 청허당 대선사보장록 등이 있어서 비교적 풍부한 자료가 남아 셈이다.

사명대사의 본명은 유정이며 속성은 임씨고 밀양 사람이다. 황해도 풍천에서 아버지 수성과 어머니 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이환이며 사명 혹은 종봉이라고 자호하였다.

중종 39년 10월7일에 태어나 일곱 살부터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세 살 때 이미 사서삼경을 독파하였다. 열다섯 살 되던 해 명종 13년에 직지사로 가서 신묵화상을 은사로 득도하였다. 남달리 총명하였기 때문에 입신출세의 길이 보장되었던 사명대사는 이렇게 하여 출가사문의 편력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청허노사와의 인연

스님이 선과(禪科)에 급제한 것은 18세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약관의 나이에 급제의 영예를 입었던 스님이었지만 지금도 자만하거나 게으름이 없이 수행 정진에 몰두하였다. 22세 때 동갑계를 만들었는데 그 취지를 적은 갑회문이라는 글월 속에서 우리는 스님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바라건데 우리는 제각기 저축을 아낌없이 털어놓아 천지 성현의 지극한 은혜를 보답하고 나라와 겨레를 위해 이것을 요긴하게 쓸 것이니 이로써 영원히 우리는 형제의 인연을 맺고자 한다.』

선조 8년 스님의 선문에 간곡한 요청을 못 이겨 선종의 주지가 되었다. 그러나 곧 스님은 이러한 권승의 자리를 사양하고 말았다. 청허 서산대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바로 이때였다. 스님은 평소 늘 흠모하던 서산대사를 찾아 묘향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당대의 고승 청허노사와 자리를 함께 한 사명당은 곧 평소의 의문을 거리낌 없이 토로하였고 비록 년배의 차이는 있었을지라도 양사(兩師)는 의기투합하는 기쁨을 누렸던 것이다.
청허노사는 심지(心地)의 대종을 바로 가르침으로써 성종(性宗)의 뜻을 깨우쳐 주었다. 사명당은 곧 크게 깨달았다. 이제까지 공부하던 번잡스러운 글월들이 모두 이른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었음을 깨달게 되었다는 말이다. 스님은 이후 오직 성품을 깨닫는 일에만 전념하여 각고의 3년을 고행으로 일관하였다. 스님은 이제 어디에도 막힘이 없는 해탈의 경지를 몸소 체득하게 된 것이다.

 

 

3. 설보화상과 임진왜란

임진왜란이 터진 선조 25년(1951)사명당 유정은 49세였다. 파죽지세로 우리강토를 유린한 왜적들은 금강산 유점사에까지 마수를 뻗쳐 선조의 값진 유산을 불태우기에 이르렀다. 선조는 의주로 파천하고 강토는 완전히 적에게 장악되어 국운은 문자 그대로 풍전등화의 위급함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스님은 분연히 산문을 박차고 목탁대신 창검을 들고 전국의 사원에 격문을 보내었다. 『우리가 편히 살 수 있는 것이 모두 나라의 은덕인데 어떻게 앉아서 참을 것인가. 이제 침략의 무리를 몰아내는 것이 보다 큰 자비의 실현을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 인상적인 격문에서 한국불교의 연연한 전통을 읽을 수 있다.
자비란 언제 어느 때나 베풀어주는 소극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른바 파사현정(破邪顯正)하는 기풍을 가지는 적극적 의미도 포함된 것이다. 신라의 고승 원광법사가 걸사포(乞師表)를 써달라는 국왕의 요청에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해하고자 하는 것은 출가사문의 도리는 아니지만 제가 대왕의 땅에서 대왕의 초목으로 연명하는 데 어찌 그 청을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던 정신과 상통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스님은 평양성 탈환등 대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여세를 몰아 왜장 가등청정과 담판을 가졌다. 이 회담 후에 스님이 설보화상이라는 칭호를 얻은 유명한 일화가 전해온다. 『조선에 보물이 많이 있다는데?』『보물은 일본에 있소』 『일본에 있다니?』 『우리나라에서는 당신의 목에 많은 상금을 걸었으니 보물은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겠소』

이러한 담대함이 이후 왜군들로 하여금 스님을 지극히 존경하게 만든 동기였을 것이다. 임란이 끝난 후에도 스님의 탁월한 활약은 계속 되었다. 스님은 왜군이 노략질해간 우리나라에서의 보물과 인질들을 회수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떠났다. 스님은 일본에서도 법력과 외교술로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고 왜인들로부터는 생불과 같은 예우를 받았다고 전한다.

 

4. 거목의 입멸

스님이 귀국하여 조정에 복명했을 때 선조는 그 공로를 높이 치하하여 개선대부 행용양위대호군을 제수하고 어마저의(御馬紵衣)를 하사하였다.

그러나 사명스님이 일본에 있는 동안 은사였던 청허스님이 입적하였다. 스님은 그 상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묘향산으로 달려가 그 영탑을 배려하고 보현사에 머물면서 복상하였다. 그는 또한 승도를 이끌고 종묘와 궁궐의 영선(營繕)을 지휘하기로 하였다. 선조는 스님에게 삼군을 지휘하는 직권을 내리면서 환속을 간청했지만 끝내 사양하였다.

1608년 스님은 선조의 부음을 들었다. 스님의 슬픔은 너무도 컸다. 곧 서울로 올라와 배곡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스님은 병을 얻게 되었다.

신왕 광해군이 등극하면서 스님에게 변방의 오랑캐를 방어하는 일을 맡기려 했으나 끝내 완쾌되지 못한 채 가야산에 머물었다.

광해군 2년(1610) 가을에 왕은 병세를 염려하여 서울에 와서 치료를 받게 하려 하였으나 그해 8월 26일 스님은 끝내 세속을 하직하셨다.

『사대가 모여서 된 이 몸이 장차 진원(眞源)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무슨 까닭에 부질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이 허깨비 몸을 수고롭게 하리오. 내가 이제 입멸하려 하노라.』하고 가부좌한채 세속을 하직하였다.

그때 스님 나이는 67세였으며 법랍은 55세였다. 제자들이 해인사의 서쪽산 기슭에서 유해를 다비 할 때에 상서로운 빛이 하늘에 뻗치고 새들이 올라 지저귀였다고 한다.

문도들은 스님의 사리를 얻어 부도를 세우고 안장하였다.

우리는 간혹 이 거목의 일생을 단지 정치권력적인 측면에서만 이해하고자 하는 단견을 본다.

다시 말하면 척불의 그늘에 가리운 불교의 재확립을 위해서 궐기한 정치적 제스츄어로 승병의 활동을 못 박고자 한다는 말이다. 물론 필자는 이러한 견해가 전적으로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탁월성은 역시 나라를 구했다는 위대함에서 뿐 만 아니라 그 공로를 남에게 돌리고 사문의 길을 걸었다는 점일 것이다. 입신과 출세의 유혹을 뿌리치고 산승의 면모를 잃지 않은 바로 그점이야 말로 대사일번(大死一飜) 할 줄 아는 불교의 참 면모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