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근본사상] 9.반야사상의 철학적 개념

<제9회>

2008-01-26     박중관

   ①  부처님이 설한 진리의 의미중심을 우리는 한마디로 「연기」하는 말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아함의 전승에 있어서는 「연기」라는 말은 주로 인생고뇌가 생기하는 원인을 밝히는 계열로서 등장한다.  즉 무엇으로 「말미암아」노병사가 있는가, 삶이 있는 까닭이다. 무엇 「때문에」생이 있는가.... 하고 추구해가서 인생고뇌의 근거가 식이라든가 갈애라든가 무명이라든가 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일이다.  이러한 계열을 따르는 방법에는 몇 가지의 종류가 있어 9지 10지 등과 같은 지연기설이 있지만, 12개를 가지고 정리된 것이 옛부터 잘 알려진 「12인연설」이다.  그러나 「연기」라고 하는 말의 깊은 뜻은 추구의 과정인 순서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의 존재는 다른 존재에 의존하는 일에 의해서 성립한다」고 하는 것에 있다. 

「이것이 있는 까닭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는 까닭에 저것이 멸한다.」고 하는 유명한 정형구가 「연기」의 참뜻을 잘 나타내고 있다.  아함의 사상에서는 이와같은 「연기」의 일반적 성격을 추상하는 일은 크게 중요시 되어지지 않았던 것이지만, 이 「연기」야말로 부처님 소설중의 제일의라는 것을 밝히려고 한 것이 바로 「반야」의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것의 존재가 타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 말하자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상대적 존재에 지나지 않다고 하는 것 뿐이라면 구태어 「연기」라고 하는 말을 번거롭게 끄집어 낼 필요가 없다.  오늘의 과학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개의 물체가 여러가지의 분자에 의해 구성되어져 있다는 사실 정도는 다 알고 있으며, 조금이라도 감수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의 존재가 사회나 부모나 스승이나 친지들의 은혜를 입으며 살고 있다는 정도는 다 느낄 수 있다. 

반야사상이 밝히려고 애쓴「연기」 란 그런 단순한 사상이 아님을 먼저 우리는 명심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반야사상 해석의 비조라고도 할 수 있는 용수는 우선 「중론」제일장에 있어서 사물은 무엇에서 생기는 것일까 하는 생기론을 제기한 바 있다.  예로 지금 나의 책상 위에 있는 찻잔은 무엇에서 생긴 것일까?  그것은 흙에서 생긴 것이다.  그럼 그 흙은 무엇에서....하고 물어갈 것 같으면 생기론은 마침내 존재의 근거를 찾아내게 된다.  기독교에서는 만물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 세상에는 우주는 우연에 의해 생겨진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물론 조물주와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연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교는 사물은 여러가지의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생겨 난다고 하는 「인연생기설」을 취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인연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인」이라든가 「연」이라든가 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존재해 있어서 거기에서 어떤 사물이 생겨난다고 하는 뜻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인」이라든가「연」이라든가 하는 것은 대체 어데서 생겨났는가 하고 묻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용수는 그래서 「인연에서 생긴다」고 하는 것은 사물 그 자체에 독립된 존재가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물질적 존재도 자기 자신도 우리의 아집이 만들어낸 고정개념 이것이었지 함된 실재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그려낸 「연기 ㅡ 무자성 ㅡ 공」이라고 하는 반야사상의 도식인 것이다. 

「공」이라는 말은 「반야경」이라고 하는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경전군에 의해 선양된 사상이지만, 반야사상은 「연기라는 것은 공이다」고 하는 주장을 내세움으로써 연기의 제일의가 사물의 존재성의 타파라고 하는 부정적 측면을 가졌다는 것을 밝혀냈던 것이다.  이 점이 소승불교의 연기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렇지만 대승불교, 특히 반야사상이 제창하는 「연기」란 결코 단순한 현상의 부정인 것은 아니다.  도리어 만물은 연기성의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이 성립되는 것이다.  만일 흙에 흙이라고 하는 불변의 성질이 있다면 결코 흙에서 찻잔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흙의 본성이 「공」한 것인 까닭에 그것은 찻잔도 되고 꽃병도 될 수 있다.  나의 눈 앞에 찻잔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여기에 「찻잔」이라고 하는 불변의 고체가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우리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의 근거를 찾는다는 것은 이 사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게 된다.  그리하여 반야사상의 존재론은 결국 인식론에로 향도되어지는 것이라 할수 있다.  사물이 실재한다고 하는 「생각」을 전환시키면「나는 존재한다」는 관념이 되고 마침내  「나의 것」이라 하는 집착이 된다.  이것이 인생의 온갖 고뇌의 진원지인 것이다. 

그러나 일체가 「연기공」인 것으로 관할 때에 모든 미망은 쉬어지고 자기도 우주도 혼연일체가 된 깨달음의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친다면 「연기」를 「관」하는 일이야말로 깨달음에 이르는 실천도인 것이며 바꾸어서 생각할 것 같으면 「연기」란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발해진 진리의 세계의 표현인 것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중론」제24장에 있는 「연기를 보는 자 그 사람은 고. 집. 멸. 도를 본다.」고한 계송은 말할 나위없이 이와같은 입장에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일체는 연기에서 생겨난 것인 까닭에 무상한 것이며, 그 무상성을 깨닫지 못하고 상주를 소원하는 데서 모든 괴로움이 생겨난다고 보는 것이 반야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②  불교는 그 처음부터 항상 유심적경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마음의 자세 여하에 따라 자기도 세상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 윤리적으로 보아도 마음이 깨끗하면 세계도 깨끗하고 마음이 더러우면 자기도 세계도 더러워진다고 말한다.  따라서 불교란, 마음의 본성은 본래적으로는 깨끗한 것이지만, 그 깨끗한 마음 가운데 번뇌라고 하는 더러움이 마치 거울속의 때처럼 묻어있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반야사상의 중심개념인 「여래장」의 사상이다.  이 입장에서 말할 것 같으면, 현실의 우리는 결국 욕망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으로 꽉찬 무지몽매한 우리는 본래적인 깨끗한 자기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것이 된다.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은 그 본원적인 존재양식(선하고 청정한 마음에서 이탈되어 소외된 존재양식 (악하고 오염된 마음)에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즉 현실의 우리는 존재적으로나 인식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본래적 자아에서 소외된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반야사상이 추구하는 본래적 자아란 소외되어지기 이전의 자아, 즉 「참 나」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다.  

 *  존재적.... 생노병사라고 하는 고적존재를초월하고 자기 존재에 대해서 자기 통제력을 갖는다.   *  인식적.....주관. 객관이라고 하는 이원적 대립을 지양하고 일원적으로 사물을 본다.   *  윤리적.....맑고 깨끗한 마음을 갖는다.  

  이 세 가지의 존재양식은 본질적으로는 하나에 돌아온다.  말하자면 하나의 「진실된 자아」의 세가지 다른 측면이라고 말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인식적인 존재양식이다.  확실히 우리의 인식은 객관과 주관과의 이원적 대립 위에 성립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르네쌍스 이후 신학의 속박에서 해방된 근세 사람들은 인간의 주체성을 다시 찾았었다.  그러나 주관으로서의 인간의 우위를 주장하고 객관으로서의 자연은 인간에 의해 정복, 이용되어져야만 한다는 인식에서 눈부신 힘으로 과학기술을 발달시켜왔다.  그러나 그 결과가 처참하게도 「인간소외」라는 패배로 끈나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반야사상은 그와 같은「소외」 라는 패배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반야사상은 그와 같은 「소외」의 근본원인을 「객관과 주관과의 분리」에 있다고 보고, 객관과 주관, 혹은 주체와 상황과 같은 이원적 대립의 인식을 부정하고 일원적인 관점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반야사상은 심리적「에네르기」를 이극으로 분리하지 않고 일극에 집중하는 인식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반야사상은 자아와 자연계와를 결코 서로 대립된 것으로 보지 않고, 자연은 자기의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며, 자기의 마음을 더나서 독립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극단적이며 차원 높은 「유심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자기의 마음을 떠나서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자연과 자기와의 일여관을 가지고 자연과 자기와의 관계를 티없이 맑고 깨끗한 「원점」에서 인식하려는 「철저적 일원론」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박중관 (불교사회문제연구소간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