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인물전] 호암 약휴대사

한국불교 인물전

2008-01-25     김영태

   ①  선암사 지객스님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숭유배불의 정책바람에 소위 양반집 자제와 글장이나 읽었다는 선비들의 코는 높아지고 반면에 죄없는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는 날로 땅에 떨어져 가서 그들의 발걸음은 인적드문 산속으로 숨어들지 않을 수가 없게 하였다.  그래서 승려들은 당시 양반사회에 있어서 가장 천한 사람 대접을 받아야 했고 온갖 수모를 참아가야 했던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양반 나그네들은 길을 가는데 가장 중요한 신발(삼과 짚으로 만든)이 필요하게 되면 가까운 절로 찾아가서 새신발로 갈아신고 가는 관습이 생겨 있었다. 

할일 없이 이곳 저곳에 무전취식으로 유랑하는 과객이나 일정한 목적하에 여행하는 나그네들은 물론이지마는 가난하고 게으른 선비들은 일부러 절로 찾아가서 낡은 신발을 벗어던지고 새 것으로 바꾸어 신고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절에서는 손님을 접대하는 소임을 맡은 지객의 소관으로 아예 신을 삼아놓고 행객들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미리 대령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의 절들은 어느새 양반 나그네들의 신발을 삼아 대어주는 구실을 하는 그러한 곳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실은 그 뿐만으로 그치지 않고 끼니때에 일부러 들러 밥을 요구했으며, 또 노자돈까지도 뜯어가기가 예사였다.  그와같은 폐단은 전라남도 조계산 선암사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절의 지객스님도 짚신을 삼아 모아 지나가는 나그네의 요구에 응할 준비를 미리 해놓았던 것은 물론이었다.  어느 날 이 선암사에 양반 손님이 들러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신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지객스님이 새 짚신을 갖다 대령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언제 어느때고 나그네가 들어와 신을 달라고 하면 즉시 주어야 하는 것이 지객의 소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 지객스님이 갖고 와서 건네주는 신발을 받아든 손님은 그것을 보는 순간 입이 딱 벌어지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는 지객을 쳐다보며, 「이게 신인가?  배지.」하면서 아예 신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지객스님 앞으로 신발을 내팽개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 신발의 길이가 한자 다섯치나 되었으니까 놀라는 것도 당연하였고 신어보지도 않고 집어던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시치미를 딱 떼고 그 신발을 집어든 지객스님은 「손님 발이 퍽 작은 편이군요.」하면서 나그네를 멀거니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러자 나그네는 「작은 신발을 냉큼 가져오지 않고 뭘 멍청히 보고 서 있는 거여.」하고 소리쳤다. 「아, 그러지요.  작은 것을 가져오지요.」 하고는 다시 지객스님이 가져온 신발은 또 너무 작아서 발에 들어가지를 않았다.  「무슨 놈의 신발이 요렇게 작아?  이걸 신발이라고 만들었는가?」나그네는 화를 벌컥내며 또 신발을 냅다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그 신발은 겨우 두치 닷푼밖에 안되었으니까 어른의 발이 거기에 들어갈 리가 만무였다.  바보처럼 히죽이 웃으며 서 있는 지객스님의 태도에 더욱 화가 난 나그네는 발에 맞을 만한 다른 신발을 얼른 가져오라고 호령이었다. 

그러자 지객스님은 딱하다는 듯이,「참으로 답답하신 손님이십니다.  애초에 손님의 발을 제가 만들지 않았으니 그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어떻게 미리 알고 마련해 놓겠읍니까?」하고는 「이왕 오셨으니 이 중에서 아무거나 신고 가시지요.」하고, 큰 것과 작은 신발 두 켤레를 나그네 앞에 밀어놓으니 웃을 수도 화낼 수도 없는 나그네는 어이가 없어하다가 결국은 단념을 하고 자리를 뜨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삼년을 지내니 신발을 얻기 위하여 선암사를 찾는 행객의 그림자는 저절로 없어졌다. 

한결같이 한자 다섯치와 두치 닷푼의 지나치게 크고 작은 두 켤레의 신발만으로 양반 나그네들에게 응하여 한번도 그들의 발에 맞는 신발을 준 일이 없었기 때문에, 양반 행객들은 아예 절로 가서 신발 얻어신을 생각을 단념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신발 바치는 폐단을 없게 한 재치있고 배짱이 센 언암사의 지객스님은 그 이름을 약휴라고 하는 젊은 스님이었다.  약휴는 호가 호암인데, 순천 쌍암면의 해주 오씨 집안에서 현종 5년에 태어났으며, 열 두살 때에 선암사로 가서 머리를 깍고 침굉 현변 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였다.  침굉선사는 서산대사의 제자인 소요선사에게서 법을 받은 고승이었다.

   ②  관폐 민폐를 바로잡은 영웅승

   약휴스님은 그 뒤 관청에 드나들며 문서를 전달하고 처리하는 소임인 수승이 되었다.  당시 승려들은 관리를 만나면 절을 하는 것이 통례가 되어 있었다.  수승이 된 그가 공사일로 고을의 관청을 출입하면서 피할 수 없었던 것은 관원들에게 절을 해야 하는 아니꼬운 꼬락서니였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 폐풍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어느날 관청으로 일을 보러 간 그는 관리 앞에 바싹 다가가서 넙죽 절을 하였다.  그러자 관원은 코를 움켜쥐고 비명을 질렀다. 

약후스님은 대로 만든 바람갓을 쓰고 관원의 코 밑에서 절을 하였기 때문에 그 바람갓의 끝이 관원의 코끝을 사정없이 찔렀기 때문이다. 「이 중아, 코 떨어지겠다.  머리리서 절을 하면 이런 일은 없을 것 아닌가.」 코를 연신 매만지면서 관원은 노발대발 소리쳤다.  이에 약휴스님은 「에. 에.  다음부터는 아예 멀리만치서 절하겠읍니다.  주의하겠읍니다.」하면서 사과하는척 하였다.  그러나 다음번에 그가 관청으로 갔을 때에는 아예 관원들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  절을 하지 않는 그에게 오만한 관원들이 그냥 있을리가 없었다.  그래서 꾸짖고 나무라면 그는 태연하게 「멀리서 절을 하라시기에 저 고개너머에서 미리 절을 다 하고 왔읍니다.」하였다. 

그로부터 그는 언제나 관청을 출입하면서도 만나는 관원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관리에게 절하는 풍습도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선암사에는 절의 논밭과 절 승려들의 소유로 되어 있는 전답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전답들은 대부분 인근 마을 농민들이 소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소작인들이 승려들을 얕잡아보고 소작료를 잘 바치지 않았다.  심한 경우에는 전혀 바치지 않고 떼어 먹어버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수모를 당하고만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약휴대사는 동지들을 모아 의화계를 만들었다. 

이 의화계의 동지들은 가장 악질적인 소작인의 집부터 불을 질렀다.  사실 바랑 하나 질머지고 떠나버리면 팔도강산 어디에서 잡아 낼 것인가, 결국은 집을 태우는 소작인들만 손해일 뿐이다.  그래서 소작인들은 겁을 먹고 다투어 소작료를 바치게 되니, 그러부터 소작료를 게을리 바치거나 떼어먹는 일이 전혀 없어졌다.  그러한 일이 있고부터 선암사 경내뿐 아니라 전라도 일대 승려들 사이에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고, 또 그를 영웅승이라고들 하였다.  그는 40대 이전에 벌써 선암사를 중수하고 원통각을 새로 지었으며, 사내의 풍기를 진작시켜서 그야말로 선암사 중흥의 기틀을 튼튼히 다졌다.

   ③  팔도도총섭

   그는 사무에 능한 사판승만은 아니었다.  공부에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에도 철저하였다.  그러한 그였으므로 오래지 않아 전라도 승풍규정도통이 되었다.  선암사 주지로서 전라도 승풍규정도통으로서 그는 호남 일대의 승풍기강을 바로 잡았으며, 관리와 토호 양반들의 사찰침탈을 힘써 막아내었다.  교통면으로 보아도 변방의 산사인 선암사에만 주로 살았던 약휴대사였지만, 그의 명성은 팔도승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한 연유로 그는 영조 십이년(1736)에 팔도도총섭으로 발탁이 되어 자헌대부 승군대장으로서 북한산성에 머물게 되었다. 

북한산성은 앞서 숙정 36년(1711)에 쌓았으며 산성안의 11사찰을 승영으로 삼고 각 절 곧 승영마다 승장을 두어 그 위에 총대장이 있어서 팔도도총섭을 겸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북한산 승군총대장 겸 팔도도총섭의 직책을 약휴대사가 맡은 것이었다.  그 때 그는 이미 73세의 노승이었다.  그러나 그는 노구를 무릅쓰고 맡은 바의 일에 힘을 다하였다.  그리고 그는 조정에 간청하여 승려들의 부역을 중지하게 하였다.  당시 역사가 생기면 언제나 승려들을 징발하여 부역군으로 일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그는 당시 승려들이 스스로 승려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 또 승려다운 자세를 갖지 못한 것을 개탄하였다.  사회의 멸시와 천대를 받을수록 승려는 무엇보다도 승려다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청규(호엄청규)를 지어 승풍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는 영조 14년 (1038)에 75세로 입적하였다.

   김영태  (동국대고수 불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