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참선은 어떤 것인가?

특집 Ⅱ/불교진리에의 초대

2008-01-25     탄허

부처님 마음자리인 견실심을 보는 공부이며 쓰는 도다. 그러므로 선은 만법의 근본이 되고 불교의 핵심이 된다.

  1. 선이란 무엇인가?

 선이란 인도 고대 말인 범어에서 따온 말인데 우리말로는 생각하여 닦는다(思惟修) 또는 고요히 생각한다(靜慮)는 뜻이다. 고요히 생각한다는 것을 정(定)과 혜(慧)의 등지(等持)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선이 고요히 생각하고 생각하여 닦는 다는 뜻이므로 이런 공부는 불교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는 성질의 것이라 본다.

 그런데 불교의 선은 좀 깊은 뜻을 갖고 있다. 고요히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을 생각하고 닦느냐에 특징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을 분류하면 네가지를 말 할수 있는데 육단심(肉團心), 연려심(緣慮心), 집기심(集起心), 견실심(堅實心)이다. 육단심은 우리의 육체적 생각에서 우러나는 마음이고 연려심은 보고 듣는데서 분별하여 내는 마음이고 집기심은 소위 제7식과 제8식이다. 이것은 망상을 내는 깊은 속 마음이다. 견실심은 본성으로 이것이 부처님 마음자리다. 참선은 부처님 마음자리인 견실심을 보는 공부이며, 쓰는 도다. 그러므로 선은 만법의 근본이 되고 불교의 핵심이 된다. 부처님의 교법도 필경 이 선의 경지를 깨우쳐 주려는데 근본이 있는 것이니, 그래서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과 교리는 부처님 말씀이고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선이 추구하는 부처님 마음자리를 깨치면 생사가 없고 일체에 뛰어난 대해탈인이 되며 완전한 진리의 지혜와 덕상을 갖춘 큰 성인이라고 일컫게 되는 것이니 그 까닭은 우주만유의 근원적 실상진리를 주체적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2. 참선의 시작

 부처님 당시에 선법은 어떻게 깨달아 들어갔는가를 예를 들어보자.

 부처님  당시 한 외도가 와서 물었다.『말이 있는 세간 법도 묻지 않고 말이 이를 수 없는 것도 묻지 않습니다. 이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십시요.』이때 부처님인 잠잠히 있었다(良久). 이에 외도가 일어나서 절하면서『세존께서 대자대비하시어 저의 미혹한 마음을 열어 주시어 저로 하여금 도에 들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하고 돌아갔다. 부처님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아난(阿難) 존자가 이상히 생각했다. 부처님은 한 말씀도 안하셨는데 무엇을 알고 무엇이 고마운가 생각되었다. 그래서 부처님께『부처님께서 한 말씀 안하셨는데 지금 외도는 알아 들었다고 하니 무엇을 알아 들었다는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에 하루에 천리가는 준마는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뛰어가지만 둔한 말은 궁둥이에 피가 나도록 때려도 가지 않느니라.』다시 말하면 영리한 사람은 말로 이르기 전에 다 알아차린다는 말씀이며, 지금 외도가 그렇다는 뜻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수행인이 근기가 수승해서 여러 말 하지 앟아??이렇게 알아 버렸다. 원래 도는 분별이 붙으면 외도라 하고 분별심이 끊어져야 비로소 도에 든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항상 산법을 드러내 주셨으니 이것은 눈 밝은 사람만이 아는 것이다.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여러 말이 있게 되고 여러 방법이 있게 된다. 선의 방법은 후대에 와서 이렇게 해서 발달된 것이다.

   3. 선의 목적

 선은  근본자성을 요달하여 생사를 끊는다. 우리들은 아무리 힘이 있고, 건강하고, 권세가 있더라도 죽음을 못 면한다. 그것은 마음에 나고,  머물고 ,변하고, 없어지는 이런 번뇌망상에 휘둘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노병사도 생긴다. 선은 마음속의 생멸을 없애는 것이 첫째의 목적이며 생멸없는 본성을 크게 희롱하는 것이 근복 목적이 된다. 마음의 생멸을 잡아 없애려 하면 더 일어난다. 오히려 이 나는 상이 어디서 나왔느냐?…¨고 관하게 되면 필경 나는 놈이 없는 줄을  알게 된다. 그때에 그만 생멸상이 드러 빠지게 된다.

  4. 선의 방법

 앞서 본 바와 같이 부처님 당시에는 모두 근기가 수승하여 선의 방법론이 조직화되지 않았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도 닦아가야 할 사람을 위하여는 세가지 기본방법이 있었다. 이것이 관법(觀法)이다. 세가지 관법이란 정관(靜觀), 환관(幻觀), 적관(寂觀)인데 천태(天台)선사는 공(空) ·가(假) · 중(中) 삼관이라 하였다.

 정관이란 한 생각 일어나는데서 고요히 관하기를 <이 한 생각이 어디서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일어나는 자리가 없는 것을 보면 고요해지니, 고요한 것이 극치에 이르면 마침내 밝아진다.

 환관이란 밖의 경계를 보는 공부인데 보고 듣는 그 모두를 헛것이라고 관하는 것이다. 꿈을 실이 아니라고 알므로 우리는 꿈에 집착하지 않는다. 우주 만상이 환임을 보게 되면 집착에서 여의고 자성이 밝아 온다. 거기서 온갖 착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

 적관이란 정관과 환관이 한덩어리가 된 것이다. 안으로 일어나는 것도 없고, 밖으로 모든 물상이다 빈 것이다. 여기서 적연부동한 경지를 얻게 되어 마침내 깨닫는다. 주관과 객관이 한덩어리가 되어 닦는 방법인 것이다.

 부처님 때로부터 천여년이 지나니 사람들 근기가 약해져서 여러가지 분별심과 나쁜 지견을 일으키므로 깨달아 들어가는 법에도 많은 방법이 더해 갔다. 참선법의 가장 체계화 조직화된 것은 중국 당나라 때인 대혜(大慧) 스님 당시라 보겠다. 대혜스님은 참선에 가장 착실한 방법으로 화두를  보라고 가르쳤다. 화두는 온갖 분별과 지견이 끊긴 알맹이 법이다. 조사들은 이 화두를 뚫어내고 깨친 것이다.

 화두를 보는 간화선 밖에 화두를 보지 않고  참선하는 묵조(默照)선도 있다. 교리적으로 들어가는 관법은 묵조선과 일맥 상통한다.

 참선은 반드시 화두를 보는 간화선이라야만 한다고 고집 할것은 없다고 본다. 교법에 의한 관법으로도 깊은 도리를 깨칠수 있으며 묵조선법으로도 깨친 조사가 실로 많다. 그것은 중생근기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5. 화두란 무엇인가?

 화두는 자성을 깨쳐 들어가는 법칙이다. 이것을 움직일 수 없는 법령이라는 뜻에서 공안(公案)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하고 물으니『삼 세근이니라』고 대답하였다. 또 다른 때에 묻기를『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하니『마른 똥막대기니라.』라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한 도리는 8만 대장경을 다 보아도 해결되지 않는다.

 이 알 수 없는 것을 참구하는 것이 화두를 보는 공부다. 이것은 사람들이 나쁜 지견과 분별심이 많으므로 그것을 없애려고 이런 말과 생각 길이 끊인「본분의 말」을 드러내어 악지악각(惡知惡覺)을 깨뜨리게 된 것이다.

 화두는 생사를 깨뜨리고 곧 바로 대도를 성취하는 길이므로 거기에는 반드시 본분 종사를 만나 배워야 한다.  대혜스님이 무자화두 하는데 있어 열 가지 잘못된 길을 가려 말한 것이 있다. 이것은 무자화두에만 한한 것이 아니다. 참선공부 하는 데는 모두가 이를 알아야 한다.

  6. 도를 깨친 스님들

 참선하는데 화두를 가져 참구하는 방법과 화두가 없이 공부하는 법이 있어 이를 간화선 및 묵조선이라 일러 온 것은 앞서 말했다. 그런데 어느 쪽이  더 우월한 방법이냐고 물을 때가 있지만, 우열은 없는 것이다. 근기따라 문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중국의 육조스님 법을 이은 5종 가운데 4종이 간화선이고 조동종만이 묵조선이다. 간화선 측에서는 묵조선이 옅은 공부라고 말하지만 그런것이 아니다. 조동종에서도 많은 조사가 나왔고 그 교세도 일본에서 보면 당당하다. 방법을 가지고 힐난할 것이 아니라 몸바쳐서 착실하게 참구하는 것이 요긴한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필경 이르는 문이 깨달음(覺)한 문이다. 예전에 어떤 학인이 <조사선>을 알았다고 하니까 조사가 물었다.『어떻게 알았느냐?』하니 자기가 안 경계를 대답하는데 이렇게 말하였다.『지난 해의 가난한 것은 가난한 것이 아니라 금년에 가난한 것이 비로소 가난한 것이다. 지난해는 송곳 꽂을 땅도 없더니 금년에는 송곳까지도 없다』하였다. 그러니까 그의 사형되는 스님이『여래선 정도는 보았다 하겠지만 아직 조사선은 못보았다』하였는데 왜 그러냐 하면 아직도 견해 없는 견해가 붙어 있기 때문에 확철히 깨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듣자 그 사람이 분발심을 내어 3년을 더 공부하였다. 삼년이 지나 자기의 허물을 알고 이렇게 말하였다.『나에게 한 고동(機)이 있다』하고는 눈을 꿈뻑하며『알겠느냐?』한다.『 만약 모르겠다 하면 <사미야!> 하고 어린 동자를 부를 것이다』
 이 스님은 이제 비로소 조사선을 안 것이었다.
 이하에 참선에서 오도한 예를 약간 들어본다.

  7. 남악회양 선사

 육조스님의 제자인 남악회양 선사가 숭산(崇山)에서 처음 왔을 때다. 육조스님에게 나와 인사를 하니 스님이 믈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 물음에 회양스님이 꽉 막혔다. 그리고서 그 뜻을 참구하였는 데 이것이 화두다. 8년 만에야 깨치고 육조스님을 찾아갔다.

『이제 알았습니다.』『어떻게 알았느냐?』『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도리어 닦아 증득할 것이 있느냐?』『닦아 증득하는 도리는 없지 않사오나 물들고 더럽히는 것은 없습니다.』망상에 사로잡히는 일은 결코 없지만 힘을 키우는 도리가 없지 않다는 말이다. 이때 육조스님이 말씀하였다.

『물들일래야 물들을 수 없는 이 자리가 모든 부처님의 호념하시는 바이다. 네가 이와 같고 나도 또한 이와 같다.』이렇게 되어 육조스님의 인가를 받은 것이다.

  8. 한암선사

 또한 이번에는 한암(漢巖)스님의 경우를 들어본다. 한암스님은 9세때 집에서 한학을 공부하는데 사략(史略)을 읽을 때였다. 선생님이『태고라 가장 옛날 천황씨가 있었다』고 하니『천황씨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물었다.『반고씨가 있었느니라.』또 묻기를『반고씨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이 물음에는 선생님도 대답을 못하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한암스님은 의심이 풀리지 않아 깊은 숙제로 안고 지나갔다. 20세 때까지 유학을 공부하면서, 숙제는 풀리지 않았다. 22세에 금강산에 구경갔다가 출가하였다. 금강산에 머물면서 신계사에서 경공부를 하는데 하루는 어느 암자에서 불이나서 사람이 타 죽었다고 한다. 소문을 듣고나니 세상이 아주 꿈같이 허망해서 경보는 것을 그만두고 경허(鏡虛)스님을 찾아갔다. 경허스님은 견성한 스님으로서 당대의 조사였다. 해인사에 머무는데 마침 경허스님이 법상에 올라 법문을 하셨는데『법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하면, 즉견여래(卽見如來니라.』무릇있는 바 상이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을 상 아닌 줄 보면 곧 여래를 본다 한데서 확연히 눈이 열렸다. 9세때부터 품어 왔던 의심이 그때서야 확 풀리고 말았다. 현대 한국불교의 높은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한암스님은 이렇게 하여 탄생했던 것이다.

  9. 경허스님

 이번에는 경허스님을 말해 본다. 경허스님은 다 아는 바와 같이 근대 한국불교선맥의 증흥조다. 계룡산 동학사 강원에서 학인에게 경을 가르치고 있었다. 한 해, 은사 스님을 찾아 뵈우러 길을 나선 그때 유행병이 한참 돌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 어느 집에 찾아 들어 쉬고자 하여도 못잔다고 한다. 열집을 돌아다녔지만 끝내 잘 곳을 못얻고 한 데서 밤을 새웠다. 그 당시 유행병에 수 많은 사람이 죽어 갔고, 집집마다 사람이 죽은 형편이었다. 무상이 뼈에 사무쳐 강원에 돌아와 학인들을 모두 흩었다. 조실방에 혼자 앉아 참선을 하고자 하여 전등록을 모두 뒤져 보았지만, 막히는 언구가 없었다. 조사언구에서 막히는 언구를 찾아 그것을 참구하며 참선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다가「여사미거에 마사도래(驪事未去에 馬事到來, 나귀의 일이 가기 전에 말의 일이 온다.)」라 하는 공안에 이르러서 꽉 막혀서 어루대지 못하고 참구하는데, 그때에 옆방에서 어떤 처사가 젊은 스님 보고 거침없이 법담을 하고 있는 것이 들려왔다.

『시주들의 정성들인 공양을 받아 먹고서 공부 잘못하면 죽어서 그집에 가서 소가 된다는데 그렇게 되면 어쩔테요?』하고 처사가 묻는다. 젋은 스님이 대꾸를 못하고 머뭇대니까 처사가 또 말을 한다.『소가 되어도 코구멍 없는 소가 되면 되지 않겠느냐고 왜 대답을 못하느냐?』한다. 경허스님이 옆방에서 이 말을 듣고 종전의『나귀 일이 가기 전에 말 일이 다가온다』에 막혔던 것이 확 풀렸다. 동시에 심지가 밟게 드러난 것이다. 그때에 경허스님이 다음과 같이 게송을 지었다.

『홀연히 사람이 코구멍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몰록 삼천 대천세계가 내집인 줄 알았네. 6월달 연암산 아랫길에서 들사람이 한가로이 태평가를 부르더라.』이것이 경허스님의 오도송이다.

【주】여사미거(驪事未去)에 마사도래馬事到來라… 전등록에 어떤 학인이 조사에게 묻기를「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하니 대답하기를「나귀의 일이 가기 전에 말의 일이 온다」고 대답한 것이다.

  10. 처음 참선하는 분에게

 비유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산골의 험한 길에서 삼짐을 허리가 부러지게 잔뜩 지고 몇 천리를 걸어갔다. 길을 가다가 금항아리를 만났다. 그 값어치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가는 보물이었다. 그 사람은 밤새도록 망설였다. 삼짐을 지고  가자니 금항아리는 버려야 하고, 금항아리를 지고 가자니 삼짐을 버려야 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마침내 금항아리도 중하지만 삼짐은 먼 길을 지고 온 전공이 아까와서 그대로 삼짐을 지고 가기로 하였다

 이것은 비유지만 이 얼마나 어리석은 노릇인가. 진짜 보배를 만났으면 아무리 공들여 얻은 것이라도 가짜는 버려야 한다. 참선문에 들어 오려면 묵은 지식, 묵은 알음알이, 선입지견을 깨끗이 버려야 한다.『이문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두지마라』하는 것이다. 오직 귀한 것은 진정한 선지식을 의지하여 종전 악지견을 모두 버리고 순직한 마음으로 법문을 받아들고 오직 실답게 참구하여야  한다.

 참선법문에 비하면 모든 교리는 삼짐에 불과하고 참선은 금항아리 같은 것임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인생의 가장 귀한 것은 정법을 만나는 일이다. 정법을 만났으면 결코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금생에 해탈문 중 큰 보배를 꼭 잡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오대산 월정사 조실 )   <문책기자>

 

                            남의 말하기 전에 자신을 다스리라
어떤 사람이 육조(六祖)스님께서「마음이 평등하면 어찌 계율지키는 일이 어려우며 행동이 곧으면 어찌 참선이 필요하리요」라고 했는데 나는 그에게 묻는다. 마음이 평등하고 곧은가? 만약 달밤에 아름다운 여인이 옷을 벗은 채 온몸을 드러내고 그대를 껴안는다면 그대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이 무리하게 그대를 욕하고 때린다면 그대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그대는 원수와 친한 이, 미움과 사랑, 나와 남,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아니 하는가? 전체적으로 그럴 수 있다면 입을 여는 것도 좋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헛된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參禪要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