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의 현대적 해명] 가정 불화의 원인

윤회의 현대적 해명

2008-01-24     김경만

   ①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인가?

  옛적부터 가정은 부권 또는 모권이 지배하는 군주국의 상태로 되어 왔다.  이러한 통치권은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으면서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여겨져 오고 있다.  유물론적 입장에서 본다면 자식들이란 어버이의 재산이라고 보아도 아무런 모순이 없다.  어머니의 희생과 노동으로 생명이 창조되고 아버지의 노고와 보호로 부양된다.  어버이들은 자식들보다 육체적으로 힘세고 성숙되어 있는 까닭에 비교도 안되게 높은 능력이 있으므로 자식들을 지배하는 것은 어버이의 당연한 권리이다.  유물론적 입장에서는 자식들을 이상과 같이 본다. 

그러나 영적 입장에서 본다면 자식들에 대하여 부모들이 지배권을 가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절대적인 의미의 광대한 영적 세계에서 볼 때에 모든 생명은 완전한 평등 그대로이다.  영적으로 볼 때에는 어버이가 자식들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 생명을 창조해 준 것도 물론 아니다.  다만 자식들을 지상에 서식할 수 있게 한 도관의 역할을 한 것뿐이다.  신비적 과정을 통해서 한 생명의 육체적 탄생을 인연짓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태어난 육체는 어버이들의 육체와 똑같이 영의 서식처이다.  어떤 시기 동안은 말로 못하고 무력한 상태에 있게 되므로 그동안 그 자식들을 돌보아주며 자식들에 대하여 책임감을 가지는 것은 보람있는 일이다.  이러한 일은 희생적이면서 애착을 갖게 한다. 

그러나 소유 또는 지배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자식들은 어버이를 통하여 오지만 어버이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  자식들은 어버이와 함계 있지만 어버이의 소유는 아니다.  자식들에 대하여 우월적 지배적인 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인정될 수 없다.  그리고 어버이와 자식의 만남은 결코 우연의 이루어짐이 아니다.  필연적 인과관계 속에서 만나게 된다.  그러한 까닭에 조건이 좋은 자식의 어버이가 되든 또는 반대로 원수스러운 자식의 어버이가 되든 그것은 피차간에 맺어진 인연이다.  전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불행한 부모들의 예만이 추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므로 이러한 것들을 교훈적으로 받아들이고 행복스러운 가정 창조의 원리가 무엇인가를 찾아보기를 권한다.

  ②  자기가 뿌린 씨는 자기가 거둔다. 

  유태계의 12살 먹은 소녀는 어려서부터 간질을 앓아왔다.  간질의 어려움과 두려움은 본인과 그 부모에게 말 할 수 없는 어두움을 던져주고 있다.  전생의 영독을 실시하여 보니 다음과 같다.  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딸의 세 사람은 옛적에 미국 독립운동 시절에도 지금과 똑같은 가족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양친은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것 보다 영국편에 드는 것이 경제적으로 유리하다고 보고 영국측에 유리한 정보 수집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한편 그 딸은 얼굴이 예쁘고 대담하면서 영리하였다. 

그리하여 이 양친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그 딸로 하여금 미인계를 쓰게 하고 많은 남성들을 방탕케 하면서 정치적으로 유리하게 이용하였다.  이 세 사람이 금생에 다시 만나서 고생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란 제가 뿌린 씨의 열매는 반드시 제가 거두어 들인다는 것이다.  성적인 방종은 수없이 다른 예에서도 밝혀졌지만 간질의 원인이 된다.  그러한 성적방종의 책임이 부모에게도 있었고 그 방종의 대가인(정보제공에 의한) 경제적 이득을 부모가 얻었으므로 그 딸은 간질을 앓고 그 딸로 말미암은 정신적 고뇌와 경제적 부담은 그 부모가 감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육체적 불행은 전생의 불근신이 그 원인이며 그러한 자식을 갖게 된 것도 부모들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③  이웃을 돕지 않은 과보

   또 하나아의 예는 뇌수종이라고 하는 흔치않은 난병을 앓고 있는 팔삭동이의 경우이다.  만삭전에 조산한 후 그 아기의 어머니는 3일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홀아비가 된 그 아기의 아버지는 천주교 육아원에 아기를 맡겨 놓고 슬픈 나날을 보냈다.  어머니 없이 자라는 어린 것이 어려운 병에 시달리는 것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실로 지옥 그대로이다.  그 아버지는 딸과의 인연을 「케이시」의 영독이 밝혀주기를 의뢰하였다.  「금생 이전의 전생에서 당신은 그 딸을 구하여 줄 수 있는 환경에 있었으면서 구하여 주지 않았읍니다.  그 딸은 이웃에 살고 있던 가난한 사람이었는데 장사를 하고 있던 당신은 부자이면서도 그 가난한 이웃을 모른 체 하였읍니다. 

 금생에는 당신의 딸로 태어나서 당신에게 구제의 책임을 다할 것을 강요 하고 있는 것이니 가엾은 그 딸을 정성껏 보살피시오」이 예에서 우리는 커다란 교훈을 얻는다.  즉 이웃의 곤란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지내는 일은 자신의 장래 (또는 후생)의 운명에 괴로움을 결과짓는 것이란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남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잔인한 죄악을 저지르지는 않을망정 남의 괴로움을 목격하면서도 그 괴로움을 제거할 구원의 손길 펴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이 있음을 본다. 

 그러한 소극적인 잔인성은 결국 자기 자신의 미래의 운명을 어둡게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왜나하면 모든 생명체는 본래 한몸 한 형제처럼 살아야 할 우주적인 규범을 지키지 아니한 죄는 무거운 죄로 나에게 돌아와야 당연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을 기대한 사람이 기대에 어긋남으로 말미암은 원한심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보복을 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예에서와 같이 자식으로 태어나서 보복하기도 한다.  보복을 위해 자식으로 태어난 다른 영독의 경우를 보면 어렸을 때 부모의 사랑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 변사한 것이 있다.  이 경우는 자기 원망의 대상인 어버이에게 단장의 슬픔을 안겨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영독은 밝히고 있다.

   ④  형제간의 업보

  이상과 같은 업보적 부채의 예는 부자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내의 형제간에서도 발견된다.  어떤 집의 자매가 반목으로 지내는 것을 고민한 아버지가 그들의 전생인연을 「케이시」에게 물었다.  언니의 이름은 「아리스」, 동생은 「로우」그 남편은 「톰」이다.  이 세 사람의 전생은 「버지니아」의 식민지시대 후기에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그때에는 「톰」은 「아리스」의 남편이었다.  「로우」는 같은 마을에서 독신녀로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었다.「아리스」가 친정에 간 사이에 「톰」이 어려운 병에 걸렸으므로 「로우」는 순전히 종교적 박애정신으로 「톰」을 간병하여 건강을 회복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 일이 있은뒤「톰」과  「로우」는 물론 친하게 지냈지만 탈선은 없었다. 

「아리스」가 돌아온 뒤에 근거없는 질투를 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로우」를 미워하게 되었다.  그때의 감정은 뼈에 사무쳤고 그런 세월이 지난 금일에 까지도 지워지지 아니한 상태에서 같은 부모밑에서 자매로 태어났고 「톰」의 아내는 뒤바뀐 상태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자매가 현재 반목 불화하고 있는 것은 현세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옛적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잊어서 안될 일은 인정하는 사태는 꼭 이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아리스」  가 근거없이 상상하면서「로우」 를 질투하였던  대로 남편은 「로우」에게로 가고 말았다.

   ⑤  환경을 맞이하는 마음가짐이 곧 창조다. 

  이상 몇가지 가족내부의 어려운 문제의 인연관계를 살펴 보았다.  우리는 흔히 운좋은 사람은 전혀 우연한 기회에 좋은 가족관계를 맺게되는 것으로 보며 반대로 운나쁜 사람에게는 원수스러운 자식들이 아무 이유없이 태어나서 괴로움을 주고있는 듯이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 이들 우연이란 없다.  현재의 모든 상태는 한없이 먼 옛적부터 뿌려온 씨앗들이 그 열매를 맺은 것이므로 필연적인 것이다.  그 열매를 거둘 책임은 씨앗을 뿌린 당사자 본인에게 있다.  자기가 뿌린대로 거둔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 안될 일은 과거만 무한한 것이 아니라 미래 역시 무한하다는 것이다.  현재라는 시점은 과거로 보아서는 결과이지만 미래로 보아서는 무한가능성의 씨앗을 뿌리는 찰나이다.  현재라는 시점에 과거를 거두면서 동시에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창조주로서 현재를 살고 있다.  그 창조는 현재의 환경을 재료료하여 수행한다.  그 창조는 물질이 재료가 아니다.  환경을 처해가는 마음가짐이 곧 창조이다.  재료로서의 환경은 거칠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거칠은 재료인 격경은 나의 무한가능성의 개발에 크게 도움이 된다.  가족관계는 어떤 무엇보다도 깊은 인연관계에서 맺어진다.  좋은 자식이건 좋지 못한 자식이건 그들은 모두 내마음의 성장을 훈련시키는 교사이다.  좋은 자식을 두었다고 자만하여서도 안되고 좋지못한 자식이라고 싫어하여서도 안된다.  다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뒷바라지하여 주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한생명력의 자재로운 발전에 기여하는 것뿐이다.  그것이 곧 부모인 나의 성장이기도 한 것이다.  또하나 잊어서는 안될 것은 이웃에 대한 베풀음을 게을리 마라는 것이다.  이웃 사람들도 본래 다 나의 형제들이다.  본래로 형제인 그들에게의 베풀음은 곧 나의 가족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며 또한 과거생에 이미 저질렀을지도 모를 죄를 소멸시키는 일이다.  우주법칙은 나에게서 좁은 울타리를 털어 버릴 때 밝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김  경  만  (대한불교 원각회회장,  불광법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