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의 세계] 출요경(出曜經)과 법구(法句)비유

출요경의 세계

2008-01-24     관리자

   이 경은 법구경(法句經)과 매우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가 있으며 그 시구(詩句)를 그대로 인용하고 그 뜻을 풀이하며, 그 시구가 나오게 된 연유가 무엇인가를 상세히 설명하였으며 다른 글을 많이 섞어 넣고 그 속에 담겨진 교훈을 실례로 들어가면서 설문으로 부연하였다. 그리고 또 법집요송경(法集要頌經)이라는 경전은 출요경과 거의 같은 내용의 교훈을 전부 시 형식에 담아 외우고 읽기에 편의하도록 되어 있다. 또 출요(出曜)라는 낱말의 뜻은 여러 경의 요점이 되는 말씀을 골라 풀이해 전달하고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려는 까닭이라고 밝혀 놓았다.
   이 경은 거의 전부가 이 세상의 무상함과 고통스러움을 시구로 표현하여 대중의 발심을 촉구하였으며 열반에 들기를 권장하는 한편 방심하지 않게 주의토록 하는 것이 전체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소행무상(所行無常)    모든 것은 무상하여
   위마멸법(爲磨滅法)    닳아지고 없어질 뿐
   불가시호(不可恃怙)    믿을 것 하나 없네
   변이부주(變易不住)    변치 않음 뭐 있으리

   그렇다, 옳게 보았도다. 우리 석가모니의 그 밝은 지혜의 눈을 무어라 찬양하오리까! 털끝만큼도 틀림이 없는 이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고 바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열반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갈파하는 부처님의 말씀이 진정 고맙기 그지없으며 만고에 변하지 않는 법인(法印)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이것은 출요경 가운데에서도 제2 무상품에 나오는 구절로서 이 세상 모든 것은 그 전부가 무상하다는 것을 상세히 짧은 글 속에 여지없이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무상을 상(常)으로 보는 것은 어리석은 중생의 소견이요, 무상을 무상으로 보는 것은 지혜 있는 성자의 소견인 것이다.
   무상을 무상으로 볼 줄 아는 여기에서 포고발심(怖苦發心)의 수행이 생겨지는 것이며 무상을 상으로 보는 여기에서 생사유전(生死流轉)의 한없는 고통이 영겁에 지속되는 것이다.

   신소관견(晨所觀見)    새벽에 보이던 것
   야즉불견(夜則不見)    저녁에는 안 보이는 것을
   작소첨자(昨所瞻者)    어제 있던 것이
   금석즉무(今夕則無)    오늘에는 없어졌네
   아금소장(我今少壯)    내 어제 젊었지만
   무소시호(無所恃怙)    믿을 수 없노매라
   소자역사(少者亦死)    젊어서 죽은 사람
   남녀무수(男女無數)    그 수를 알 수 없네

   역시 무상품에 나오는 말이다. 얼마나 현실을 그대로 파악한 말이며 진실한 비유이냐 말이다. 위산대원(潙山大圓)스님도 조존석망(朝存夕亡)이라 하였으니 눈 밝은 성자들의 보는 바는 거의가 비슷한 모양이다.
   새벽 나절에 있던 것이 저녁에 없어지고 어제 있던 것이 오늘에는 볼 수가 없는 것이 중생 세계의 허망된 현상인 것이다. 나는 젊었다고 뻐기고 뽐내고 힘을 자랑하고 싱싱한 체격을 가지고 우쭐대지만 언제 죽을지 믿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찰나이세(刹那異世)인 것이다. 눈 깜짝할 동안에 세계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어리석은 인식의 세계로부터 본체의 세계로 들어가자는 것이 불교도들의 가야 할 길이며 부처님께서 보여준 진실한 마음인 것이다. 칼을 가지고 살을 쪼개는 것 같은 절실한 비유이며 간절한 말씀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무상품 2에는 이런 말이 첫머리에서 나온다.

   여하사류(如河駛流)    달리는 냇물처럼
   왕이불반(往而不返)    한 번 가면 못 돌아오네
   인명여시(人命如是)    목숨도 이와 같아
   서자불환(逝者不還)    한번 가면 되 못 오네

   한번 죽으면 다시 못 돌아오는 것을 달리는 냇물에 비유하였다. 돌아오지도 못할 길을 무엇이 바빠 달리기는 왜 그렇게 달리는지 알 수 없더라.
   달리고 싶어 달리는 것이 아니라 달리지 않으려 해도 달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도록 무상의 급한 바람이 휘몰아치기 때문인 것이다.
   한 평생 6,7십년을 되돌아보라. 젊었던 시절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죽음의 검은 구렁이 눈앞에 다가오지 않았던가? 생로병사의 무상한 태풍 속에서 발버둥쳐 본다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겠는가?

   시일이과(是日已過)    오늘이 지나갈 때
   명즉수멸(命則隨滅)    명도 따라 줄어지네
   여소수어(如少水魚)    물 작은 못 고기처럼
   사유하락(斯有何樂)    무엇이 즐거우랴

   하루해가 저물 적에 내 생명은 그 만큼 짧아졌다는 것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마치 물이 줄어진 못 바닥에 파닥거리는 고기떼와 다를 바 없다고 비유하였다. 곧 물이 말라지면 전부가 모두 죽을 것이지만 그것을 모르고 억만년이나 살 것 같이 오욕(五慾)을 즐기고 있는 중생들에게 따끔한 경고를 주는 말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또 방일품(放逸品) 2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중생탐자상(衆生貪自喪)    탐심으로 제 몸 상해
   낙획세속정(樂獲世俗定)    그저 편키만 바라네
   윤전타생사(輪轉墮生死)    끝없는 생사에 돌아
   화재입세명(禍災入世冥)    캄캄한 세계에 들어가누나

   끝없는 생사의 바퀴 밑에 깔려 영겁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오직 탐심에서 기인된다는 원인을 분명히 밝혀 놓았다.
   이 문제에 있어 일찍이 원효스님께서는,「나지말거라 죽기 괴롭다. 죽지 말거라 나기 괴롭다.」라고 갈파하지 않았던가.
   생이 있기 때문에 사가 있는 것이며 사가 있기 때문에 생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생과 사는 영겁에 그치지 않고 수레바퀴가 돌고 있는 것처럼 무한히 돌고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내가 진정 아닌 것을 나라고 믿는 어리석음에서부터 영원한 생사의 고통이 지속되는 것이며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믿는 거기에서 어둡고 검은 탐심의 탁류(濁流)가 흐르게 되는 것이다.
   이 탁류의 근본을 막는 데는 오직 방일(放逸)하지 않아야 되는 것이며 헛된 망견(妄見)을 버리고 진실한 자아(自我)의 본체(本體)에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본뜻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탐심과 진심과 치심을 오죽해야 3독이라고까지 말했겠는가.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그것이 과중하게 될 때에는 바로 생사와 직결되는 것이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독이라는 것은 먹으면 당장에 죽는 것이며 살에 묻으면 살이 썩는 것이다.
   끝으로, 불자라면 누구라도 출요경을 한번쯤 읽어 보기를 권하며 또한 생사의 어두운 들판을 건너도록 뜨거운 발심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