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강의실] 9.보현행원품 강의

성전강의실

2008-01-24     광덕 스님

공양한다는 것은 내가 가진 물건을 아낌없이, 오히려 정성과 기쁨으로 부처님이나 그 밖의 사람에게 내어주는 것이니 이것은 자기 집착을 놓고 마음의 문을 여는 행위가 된다.  원래로 무한한 공덕세계에서 자기를 국집하고 자기를 내세워 스스로 자기를 한정하므로써 무한한 복덕세계를 등지게 된 범부들이 자그마한 국집을 떠나 큰 공덕세계로 뛰어나오는 행위가 공양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양은 완전히 무심이어야 하며 무조건이어야 하며 무주상이어야 최상의 공양이 된다.  무심. 무조건. 무주상의 공양에서 비로소 무한공덕세계와 합치된다.  반대로 대가를 바라는 공양이나 공양하였다는 생색내는 공양이나 공양한 생각에 머물러 있는 공양들은 모두가 적은 공양이며 따라서 그 공덕도 그만큼 적을 수 바껭 없다.  공양은 주는 것이다.  그러나 실로는 무한을 받는 것이다. 

본래의 입장에서는 주고 받음이 없이, 상이 없이 움직이는 청정공덕세계의 왕성한 무심순환이지만 이것이 중생편에서 볼 때 주기도 하고 받는 것도 있는 것이다.  공양의 본질이 무한공덕장의 활동상이며그것은 공덕의 무심순환인 것을 안다면 왕성히 주ㅡ고 받는 대공양을 교환하는 데서 번영이 있는 것이라 하겠다.  무심으로 주고 무심에서 받는 세계가 우기체의 자기관리 상태이며 복지사회가 도달할 최후의 경계가 아닐까.  이 도리를 안다면 우리는 끊임없는 공양의 연속으로 우리와 우리 국토의 평화 번영을 이룩할 지혜를 열어가야 할 것이다. 

   3.  공양하는 방법

  경에는 「낱낱 부처님 계신 곳마다 한량없는 보살들이 둘러계심에 내가 보현행원의 원력으로 깊고깊은 믿음과 분명한 지견을 일으켜 여러가지 으뜸가는 묘한 공양구로 공양.....」하였다.  일체세계에 어느 곳이고 항상 계시는 부처님을 분명히 믿고 그 모든 부처님께 깊고 깊은 믿음과 정성을 기울여 최상의 공양구로 공양하라 하시는 것이다.  부처님은 불국토에 계신다.  부처님 계신 곳이 불국토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공양하자면 부처님을 찾아가야 한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은 어디에에 계실까?  중생이 형상에 걸린 눈으로 볼 때 처처에서 중생과 죄악을 보는 것이지만 상을 여윈 반야의 눈으로 볼 때 일체세계에 불보살이 충만한 것이다.  고마운 이웃이 불보살이며 스승님이 불보살이며 부모님이 불보살이며 형제와 가족이 불보살이다.  온 세계 온 나라 사람들 모두가 불보살인 것이다.  저들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며 저들이 우리를 보호하고 기쁨을 준다.  깊고 깊은 믿음과 분명한 지견으로 불보살은 이 국토에 처처에 흩어져 있음을 보고 존경과 공양을 쉬지 않는 것이 이것이 보현행원의 공양이다. 

따라서 이 공양은 내가 얼마만큼 공양을 했다느니, 공양한 공덕이 있다느니 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오직 받들고 이바지하는 순수한 마음 뿐이어야 한다.  금강경에는 무주상보시의 복덕을 말씀하고 있다.  보시하되 보시한 상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그 공덕은 온 우주허공을 헤아릴 수 없듯이 공덕이 또한 무량하다 하였다.  그러므로 공양에는 공양하는 물건의 많고 적은 것이 전혀 문제가 안된다.  믿음과 정성 , 그리고 무주상 만이 참된 공양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4.  공양구

  무엇을 가지고 공양할까?  경에는 우선 꽇과 음악과 산개와 의복, 향 등을 열거하고 있다.  공양이 깊은 정성의 표현일진대 그것은 무엇이라고 한정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던지 제한할 것이 없을 것이며 받는 편의 불이익이나 불편을 생각할 수 없다면 나의 정성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것을 공양구로 삼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공양구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한다. 

다만 불보살에 대한 공양은 나의 정성을 다하는 의미에서 최상의 공양이라는 개념을 말할 수 있으나 이것이 구체적 현실사회를 향한 공양일 때는 구체적으로 사회의 건실한 이익과 향상을 가져오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정성을 다하고 고귀하다고 애착되는 생각을 끊고 하는 값비싼 공양구라도 그것이 현실적으로 공양받는 이에게 결실한 성숙과 사회적 이익이 되지 않는 거라면 이 공양은 그 방법을 새로이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경에는 공양구 가운데서 특별히 법공양 공덕의 뛰어남을 강조하고 있다.  공양구가 물질적인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라면 그 정도로 공덕이 한정되지만 중생을 성숙시켜 깨달음을 지향하여 나아가는 법공양은 법과 더불어 무한하고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양은 형상있는 물질로 행하는 것이지만 거기에 반드시 법으로 인도하는 공양이 함께 있어야 하겠으며 나아가 물질적 공양구에 의지함이 없는 참된 법공양에 이를 수 있는 길이 닦아져야 하겠다.

   5.  법공양

   재물로 하는 공양은 필경 육체적인 잠정적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다.  유한인 육체를 기르는 물질적 공양에 비하면 무한인 법신을 기르는 법공양이 공양 중 으뜸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물질적 재물공양은 공양을 받는 편에 잠시의 이로움을 줄 뿐 오히려 물질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를 벗어나게 하는 길과는 먼 것이다.  법공양은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공양,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공양, 중생을 섭수하는 공양, 중생의 고를 대신받는 공양, 선근을 부지런히 닦는 공양, 보살업을 버리지 않는 공양, 보리심을 여의지 않는 공양」을 말씀하셨다. 

법공양을 위와 같이 열거하고 있지만 역시 이것으로 한정된 것이 아님은 물론이며 그 말씀 속에 포함된 뜻은 무한하다.  그중에서도 「보리심을 여의지 않는 공양을 펴나가는 데서 무수한 법공양이 거기에 벌어진다고 할 수 있다.  보리심을 여의지 않고 청정한 자성을 뚜렷이 살려가는 것이 최상의 정진이며 보살업의 전개다.  일체 선근공덕은 여기에서 흘러나온다.  보리심의 활동적 전개에서 일체중생의 고를 대신 받기도 하며 일체중생에게 이로움을 줄 불국시설도 나오는 것이다.  보리심을 여의지 않고 청정자성을 보양임지하는 것은 깨달음의 자태적 전개이며 중생을 이롭게 하고 중생고를 대신 받는 대지혜. 대자비행의 전개는 깨달음의 대태적 전개인 것이다.  이와같이 보리심을 여의지 않는 수행에서 일체 법공양은 성취되는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자리적 수행이거나 이타적 공양이라는 것이 구별 될 수 없으며 재물공양. 법공양을 나눌 여지도 없다.  오직 법공양의 무한공덕광명만이 끝없이 펼쳐가는 것이다.

   6.  법공양이 왜 수승한가.

   경에는 법공양 공덕이 무엇으로 비유할 수 없으리만치 수승하다고 말씀하였다.  꽃이나 음악이나 향이나 의복이나 등을 가지고 아무리 많이 공양하더라도 법공양을 일념동안 닦은 공덕에 도저히 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부처님께서는 법을 존중하시는 까닭이며 말씀대로 행하면 많은 부처님이 출생하시는 까닭이며 법공양을 행하면 여래께 공양하기를 성취하며 수행이 참된 공양이 되는 까닭이라.」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법공양을 행하면 많은 부처님이 출생한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것이 많은 부처님이 출생하는 것일까?  중생이 미혹의 구름을 벗어나면 바로 부처님이 출생하시는 것이다.  중생이 깨달음의 행을 행하면 즉시에 부처님이 출생하시는 것이다.  법공양은 중생으로 하여금 미망의 구름을 없이하는 것이며 중생을 깨달음의 행으로 인도하는 거이며 법공양을 행하는 그 자신이 바로 깨달음을 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혹자는 중생이 법공양을 받아서 미망을 타파하였거나 보살도를 완성하였거나 법공양을 행하여 스스로 대각을 성취하면 이것이 부처님이 출생한 것이라 말할지는 몰라도 그런 것만은 아니다. 

원래로 중생이 없는 것이다.  원래로 미망이 없는 것이다.  미하고 중생이 되었다고 하여 실로 불이 변한 것이 아니다.  원래로 불은 원만하며 불변하며 영원하며 자재하며 소호의 결함도 없는 것이다.  미망이나 중생이란 것은 한낱 착각일 뿐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중생이라도 법공양을 행하면 법공양을 행하는 그것이 바로 여래출생인 것이다.  법공양에서 여래출생, 즉 깨달음의 발현을 보지 아니하고 중생과 중생적 형태만을 본다면 이것은 행원의 법공양을 바로 본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7.  법공양은 전법으로

   법공양은 필경 청정자성을 임지보양하는 것이며 청정자성공덕을 발현하여 일체중생의 미망을 타파하고 각심을 드러내고 발휘하는 것이라 할 것이니 이러한 법공양을 행하는 데는 불가불 여러 방편이 없을 수 없다.  그중에도 법을 전하여 중생의 생각을 바르게 하고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며 바른 수행을 하게 하는 전법은 법공양의 근본이라 할 것이다.  전법은 중생미망심에 직접 작용하여 그 어리석음을 깨뜨린다.  그러므로써 「많은 부처님을 출생」케 하는 것이니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 불국토가 아닐 수 없게 된다.  불법의 목표가 중생성숙과 불국토 실현에 있을진대 우리는 법을 전하여 법공양을 최대로 실천해 나갈 것을 기약하여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