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문화의 본질적 특성(10)

인도 문화 소개

2008-01-23     관리자

III. 인도 문화의 미래(계속)

   여성의 지위

   지난 반세기 동안의 힌두교의 부활은 인도 사회 구조 속에 많은 다른 근본적 변화를 나타냈다. 그것을 구태여 열거할 필요는 없지만 주요한 모습은 여성의 지위에 있어서의 향상이다. 유산상속 결혼법에 있어서의 변화, 승락연령의 높임 같은 특별한 항목의 합법화는 인도사회 속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버렸다. 여성의 지위가 과거에 어떠했건 우리 시대 이전의 천여 년 동안 여성들이 크나 큰 법적 능력에 피해 당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도「마누」법전의 다음 귀절은 강조될 수 있다. 즉「자신의 복리를 바라는 사람은 여성을 존대해야 한다.」그리고 여성이 존대받는 곳에선 신이 기뻐하나, 그들이 존대받지 못하는 곳에선 어떤 성스런 의식도 보상 받지 못하며, 여성 친족이 슬픔 속에서 사는 곳에 그 가정은 곧 멸망하며, 그러므로 복리를 바라는 남성은 언제나 여성을 존중해야 한다 하고 말하는 그 마누가「밤낮 없이 여성은 그들의 가족 중의 남성에 의존되도록 지켜야 한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그녀를 보호할지며, 젊어서는 남편이 그녀를 보호할지며, 노후엔 아들이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 여성이란 결코 독립될 자격이 없다」하는 진술의 장본인인 것이다. 이것은 의심할 것 없이 일반적인 태도이다. 벵갈에서 브라흐모사마즈(역주 1828년 람 모헌 조이가 창시한 개혁적 종교단체)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개혁의 전방에 여성의 자유를 두긴 했지만 이런 태도는 상당한 정도로 19세기 말까지 지속 되었다. 그러나 그 운동은 인도의 나머지 지역엔 거의 영향력을 갖지 못했고, 여성의 출현이 인도의 사회적 문화적 생활 속에 하나의 주요 특색으로서 중요시된 것은 다만 20세기에서 이미, 그것이 우리의 사회 생활 속으로 융화되기는 가까운 과거일 뿐이다. 과거에 인도 생활의 일부였던 여성의 종속은 분명 오늘날엔 더 이상 인도 문화의 일부가 아니다.

   촌락 본위의 신화

   인도 문화는 본질적으로 농촌 본위이며 수공업 경제에 속박되어 있다고 자주 말한다. 인도적 생활의 중심으로서 농촌에 대한 마하트마 간디의 강조가 이런 생각의 보급에 많은 것을 하였다. 그러나 인도의 생활이 과연 농촌과 어떤 전체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고려해봐야 한다. 인도인의 75% 이상이 농촌에 살고 있다는 것은 옳다. 그러나 인도의 문화가 농촌에서의 생활과 동일시되었던 때가 여태껏 있었던가? 가장 초기의 역사시대부터 문화란 도시의 생활에 지배되었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다. 교양인과 동일시하게 된 나가리까(Nagarika)라는 바로 이 말도 도시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붓다께서 그의 진리를 전교한 곳도 바나라스나 라쟈그리흐, 바이샬리 따위의 도시에서이다.「마하브하라따」는 근본적으로 하스띠나뿌라와 인드라쁘라스트하의 두 도시와, 빤다바스가 추방되어 방랑했던 숲들의 이야기이다. 농촌은 서사시에도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으며, 인도 문화엔 농촌 생활이란 전혀 나오지 않는다.「라마야나」에선 경우가 다른 것일까? 아요드흐야는 대도시로 서출되어 있으며, 빠우라자나빠다스에 대한 언급이 있고, 비록 따뽀바나(Tapovana, 고행숲)과 아쉬람(Ashram, 수도처)가 갠지스강 남쪽 지대의 숲으로 기술되어 있긴 해도 어떤 농촌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아요드흐야가 주요 도시 였던 것 같이, 끄리쉬나가 드와라까를 위해 준 야다와의 마트후라도 그러하다. 서사시가 표현하는 삶과 문화는 분명 촌락이 아니라 도시에 관계되어 있다.
   고전기에 와서는 어떠한가? 브하사(Bhasa, 역주 AD 3세기경의 극작가)의 무대는 우쟈인(Ujjain), 꼬삼비(Kausambi) 그리고 마가드하(Magadha)의 수도에 놓여졌다. 그가 묘사한 생활은 짠드라세나의 궁정이나 마가드하의 왕이나 밧사(Vatsa)왕국의 수도에서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깔리다사(역주 AD 5세기경 굽따시대 인도 최대의 극작가 시인.「사꾼딸리」가 가장 유명한 드라마) 는 도시와 매우 긴밀하여「라그후밤사」(역주 해양족의 유명한 왕 라그후 가계에 대해 읋은 시)뿐 아니라「메그하두따」(역주 깔리따사의 가장 인기있는 시「구름의 사자」로 번역되며 남편이 구름을 통해 멀리 떨어진 아내에게 편지를 전달하는 과정을 읊은 것)도 그의 도시 문화에 대한 사랑을 증거하고 있다. 특별히 내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메그하두따」에서의 우쟈인 왕국에 대한 그의 묘사와「라그후밤사」에서 아요드흐야의 슬픔이다. 둘다가 근본적으로 도시 문화에 대한 탁월한 묘사이다. 또한 깔리다사의 작품이나 싼스끄리뜨의 어떤 중요한 시인 · 작가의 작품, 어느 곳에 농촌 생활에 대한 묘사가 있는가 하고 물을 수 있다. 인도 문화는 다른 문화와 달리 촌락과 동일시된다는 생각은 그걸 뒷받침하기 위한 어떤 역사적 진리도 없는 것이다.

   수공업 경제의 신화

   더욱 옳지 못한 것은 수공업 경제와 인도 문화 사이의 근거 없이 주장된 연관이다. 간디 이후 수공업적 생산과 인도 문화 사이에 어떤 신비스런 관계가 있다는 것이 일반적 생각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수공업이란 18세기 이전엔 보편적이었다. 아시아 제국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산업은 수공업의 기초 위에 있었다. 그곳엔 특별한 인도성(性)이나 특성이란 없는 것이다. 그것의 중요한 특성은 그것이 소규모의 생산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억되야 할 것은 인도가 외국 지배하에 몰락한 것은 주로 서양제국보다 훨씬 오랫 동안 수공업을 지속하여 그 기술이 뒤진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성장의 쇠퇴였다. 그러나 이제 인도는 산업 혁명의 중도에 있다. 수공업엔 어떤 특별한 문화적 가치가 없다.
   그들은 산업 사회속에서 다만 사치품의 생산자로서만 잔존했고 따라서 인도 문화의 참된 경제적 이용이 수공업이라는 주장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 극히 일반적인 가정은 두 가지 그릇된 생각에 기인하는 것이니 그 첫째는 기계란 비인간화를 조장하여 인간의 덕성이 성장할 기회를 줄이는 기계 문명으로 이끄는 그 자체에 있어서 악한 것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인간의 영적 자질이 발달하는 것은 욕망의 제한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첫 번째에 관해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도는 물품의 생산을 위해 기계를 이용하는데 결코 반대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까우띨리야(Kautilya, 역주 마우리야 왕조의 사람으로 Arthashastra의 제자)에서 우린 어려운 기계를 다루는 기술자 마하얀드리까에 대한 언급을 찾는다. 수레도 조잡한 형태의 기계이다. 우리가 너무도 많이 신세진 페르샤 수레도 하나의 기계였다. 인도 문화가 기계의 사용에 원칙적으로 어떤 반대를 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사실은 유럽의 산업이 전기 동력의 기계에 바탕하여 온 1750년과 1800년 사이의 기간에 인도 정치는 파멸기를 목도하였고 따라서 새로운 방법을 채용하여 우리의 생산을 조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도의 생활은 나머지 선진 세계가 대규모의 생산을 향해 전진하는 동안 계속 수공업에 토대를 두고 나갔다.
   수공업에 기반한 문화와 대규모 산업 생산 사이의 차이란 대중의 요구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있다. 옷이나 기타 필수적 수요에 대한 대중의 요구가 채워지게 되는 것은 다만 전력과 기계의 사용 결과로 대규모 생산이 가능한 후의 일이다. 사실 수공업 문화란 한 계급의 문화가 되기 마련이다.
   소비자 중심의 생산이란 다만 대규모 산업화와 더불어 가능하게 되며, 대중 문화의 문제가 일어날 수 있는것은 대중의 물질적 요구를 만족시킨 후이다.
   그러므로 인도 문화는 수공업 본위이며 기계와 산업화에 반대한다고 하는 생각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