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불교의 기본교리

특집 Ⅱ /불교진리에의 초대

2008-01-23     관리자

대승교설은 아함과 밀접한 체게성을 이루고 있다.
불교의 기본교리는 아함 · 반야 · 법화의 삼부경에 전개된 교리 체계라고 말해도 좋다.

 불교는 소승(小乘)불교와 대승(大乘)불교로 크게 갈라진다. 소승불교의 기본이 되는 것은 아함경이고 대승불교의 기본이 되는 것은 반야 · 법화 · 화엄 · 정토 등의 초기 대승경전이다.  초기 대승경전 중에서도 반야 · 법화는 대승의 원시적 교설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원시적 대승교설은 아함의 교설과 밀접한 체게성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불교의 기본교리는 아함 · 반야 · 법화의 삼부경에 전개된 교리체계라고 말해도 좋다

 종교가 문제로 삼는 것은 의식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주와 인간과 가치에 관한 궁극적인 문제이다. 종교적 사유의 중심이 되는 이러한 세가지 주제중에서는 우주에 관한 것이 근본이 된다. 우주를 창조한 자가 누구인가?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와 같은 문제가 해명될 때 인간의 현실존재는 저절로 해명될 것이고 인간의 현실존재가 해명될 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생의 가치문제가 또한 저절로 해명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우주에 관한 궁극적인 문제를 명확하게 언설로 해명해 주고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덮어놓고 믿어야 한다. 최고의 권위가 부여된 그 말씀은 의심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될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그런 권위를 내세우려고 않는다. 종교적 진리는 스스로의 마음 속에 확인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궁극적인 깨달음을 이룰 것을 강조하고 그에 이르는  길만을 제시 하고 있다.

궁극적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중층적(重層的) 구조를 띄지 않을 수가 없다. 눈 앞의 현실에 집착해 있는 사람들을  이끌어 현실의 배후에 숨은 참다운 진리를 깨달아 가도록 교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학교 교육의 교과 과정 처럼…….  불교에 숫한 법문이나  복잡하게 시설되어 있음은 이 때문이다. 이들은 어느 것이나 깨달음에 이르는 한 맛(一味)의 법문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아함 · 반야 · 법화의 삼부경에 전개된 근간적인 교리체계는 다섯가지로서 이들을 원고지 18매라는 제한 속에서 극히 간략하게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업설(業說)

 부처님은 설하신다.「일체(一切)는 12처(處)에 들어가나니, 눈 · 귀 · 코 · 혀 · 몸 · 의지요, 색 · 소리 · 냄새 ·  맛 · 촉감 · 법이니라」[阿含]. 인식 할수 있는 것에서 부터 종교적 진리를 탐구해 들어감을 엿볼 수가 있다. 이 12처의 세게관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인간을  의지로 파악하고 그 대상을 법(法)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종교간의 견해는 일정치 않다.  불교는 자유의지의 존재를 엄연한 현실적 사실로 인식하라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자유의지에 대한 자각(自覺)을 강력한 인생관으로 전개되지 않을 수가 없다. 자기현실을 개척하고 타개해 나갈 것은 자기 의지력이라는 이치가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지적 작용을 업이라고 말하고 그러한 업에 의해 대상이 나타내는 필연적인 결과를 보(報)라고 한다. 업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한 보가 따를 것이며 이러한 업보의 인과 관계는 엄격하게 추구해 가면 숙세 · 현세 · 내세의 삼세에 걸쳐 전개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② 사제설

 부처님은 다시 설하신다.「일체는 덧없고 괴롭고 무아이니라.」아무리 좋은 업을 지어 천상에 난다고 하더라도 죽음을 면 할 수는 없다. 인간이 이렇게 죽음을 면 할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존을 지속하려는 괴로움을 더이상 감당 할 수가 없어 부서지기 때문이다. 생존을 지속하려는 이 괴로움은 왜 일어나게 될까?「나」아닌 것을「나」라고 집착하고 있기 때문 일것이다.

 이렇게 살펴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네가지 뚜렷한 사실에 눈을 뜨게 된다. 첫째, 인간은 그 존재 자체가 괴로움이다. 둘째, 그러한 괴로움은 잘못된 나의 집착 맹목적인 욕망에서 발생한다. 세째 괴로움의 근본적 해결은 잘못된 집착이나 욕망을 멸하는 데에 있다. 네째, 그러기 위해서는 참다운 나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고 올바른 종교적 실천을 닦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 네가지 사실을 사성제라고 한다. 아함경에 설해진 실천법 중에서 중추(中樞)적인 것이다.

  ③ 12연기설

 4제의 실천을 통해 마침내 밝혀낸 참다운 실재(實在) 이것을 명(明)이라고 한다. 생사의 괴로움을 발생시키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이제 이「명」에 대한 무지(無知)라고 말 할 수가 있다.

 따라서 부처님은 설하신다.「무명에 연(緣)하여 행(行)이있고, 행을 연하여 식(識) · 명색(名色) · 6처(處) · 촉(觸) · 수(受) · 애(愛) · 취(取) · 유(有) · 생生) · 노사(老死) 등이 일어나 하나의 커다란 괴로움을 발생 시킨다」(阿含經). 이러한 괴로움은 무명을 다함에 의해 함께 사라질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이 교설을 12연기설 이라고 하는데 아함경에서는 이것을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말할 정도로 최고의 법문으로 치고 있다.

  ④ 육바라밀설(六波羅蜜說)

 언설이 뜻하는 바는 세간에서의 좋은 과보이다. 4제설과 12연기설은 그러한 과보도 바라지 않는다. 생사로부터의 완전한 해탈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종교적 방향은 열반에 안주하면 세간을 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제 그 열반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되돌아 보자. 절대적 존재성을 인정 할 수가 있는가?  생사와 열반이라는 두 법은 서로 의존 관계에 있다. 그렇다면 다같이 연기(緣起)한 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고 동시에 그들의 자성(自性)은 공(空)하다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모든 법이 공함을 부르짖는 대승불교는 바로 이러한 자각에서 흥기한 교설이다. 생사와 열반에서 비롯된 일체의 분별을 초월하여 무한한 실천으로 참다운 진리의 깨달음을 추구한다. 이러한 사람들을 보살이라고 말하고 그들의 지혜를 반야라고하며, 그러한 반야가 궁극적으로 도달할 종교적 경지를 바라밀이라고 한다. 보살은 열반과 같은 법에도 안주하지 않으므로 대사회적 활동 또한 쉬지 않는다. 반야 바라밀 외에 보시(布施) · 지계(持戒) · 인욕(忍辱) · 정진(精進) · 선정(禪定)의 다섯  바라밀을 함께 행함은 이 때문이다.

  ⑤ 일불승설(一佛乘說)

 보살은 이렇게 사회적 관심을 잃지 않지만 그럼 반야가 궁극적으로 이를 바라밀은 피안(彼岸)의 성격을 벗어 나지 못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최상의 깨달음은 이러한 피안에 있어서의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은 설하신다.「모든 법의 참다운 모습(實相)은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서로 주고 받을 뿐이니라, 부처가 세상에 출현함은 오직 이 부처의 깨달음을 사람들께 열게 하기 위함이니라. 세상에는 오직 이 목적을 위한 한줄기 불승이 있을 뿐이다.」 4제 · 12연기 · 육바라밀의 삼승은 일불승에서 짐짓 그렇게 분별한 것에 불과하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으로 제시된 이러한 깨달음은 어떤 성격을 띄고 있는가. 부처님은 그것을 깨끗한 땅이 아니라, 더러운 땅에 피는 하얀 연꽃에 비유하고 계신다. 모든 부처는 열반에 들지 않고 항상 세간에 머물어 무수한 불국토를 건설하며 중생을 교화한다. 이 진실한 법에 믿음을 이르킨 사람들께도 장차 성불하여 훌륭한 불국토를 건설 할것을 사명으로 짊어 지우고(授記) 계신다. 어렴풋이나마 최상의 깨달음이 어떤 성질의 것인가를 짐작 할수가 있을 것이다.

 불교의 목적은 열반이나 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달아 진실한 인간생활의 가치를 구현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