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保寧) 성주사(聖住寺)

한국의 고적/신라 九山禪門地를 찾아서(8)

2008-01-22     관리자

  성주사는 폐사된지 오래이며 옛 절터가 현재 충청남도 보령군(保寧郡) 미산면(嵋山面) 성주리(聖住里)에 남아 있다. 산호(山號)를 성주산(聖住山)이라 하고 신라 문성왕(文聖王 839-857)때 무렴국사가 산문(山門)을 열었는데 국사는 무열왕(武烈王)의 8세손으로 헌덕왕 (憲德王) 13년에 당나라에 건너가 수학을 하고 문성왕(文聖王)  8년(846)에 귀국하였다. 다음해(847)에 남포(지금의 보령) 오합사(烏合寺)에 들려 사액(寺額)을 「聖住寺」라 바꾸어 聖住寺門을 열었는데 이후 경남 함양군의 영각사(靈覺寺), 충북 중원군의 정토사(淨土寺), 제천군의 월광사(月光寺), 경기도 양평군의 보리사등은 모두 성주산맥의 대찰(大刹)로 이름난 절들이었다.
  현재 성주사지는 상당히 넓은 지역으로 남아 있으나 모두 경작지로 변해졌으며 장대석(長大石)으로 높직하게 구축한 법당을 중심하여 이곳의 개산조인 무렴대사의 부도비, 즉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를 비롯하여 5층석탑 (보물 제19호), 중앙3층 석탑 (보물 제20호), 서3층석탑 (보물 제47호) 석등 등의 석조물이 주변에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대사의 부도는 그 파재(破材)가 뒷산 골짝에서 근년에 수습되어 절터의 현위치로 운배해 놓았다.
  낭혜화상의 탑비는 신라시대의 비석으로는 큰 편에 속하며 각부가 완전하다. 귀두(龜頭)는 용두화(龍頭化)하고 배면(背面)에는 귀갑문(龜甲紋)이 조각 되었으며 중앙에 비좌(碑座)를 마련하고 비신(碑身)을 세웠다. 이수는 밑에 앙련(仰連)을 조각하고 4면에 구름속에 싸인 용을 웅위(雄偉)한 솜씨로 조각하였으며 배면에 제액(題額)이 있는데 이 탑비는 고운 최치원의 찬문(撰文)으로 특히 유명하고 당대를 대표할 만한 비석이라 하겠다.
  5층 석탑은 남향한 사지(寺地) 중앙에서 금당(金堂) 앞쪽에 건립되어 있다. 2층 기단위에 5층 탑신을 세운것으로 기단이 작아지고 약화되었으나 세부수법은 신라의 일반형을 따르고 있다. 탑신과 옥개가 모두 1석씩인데 다만 제1탑신 밑에 방형(方形)의 1목석을 끼워서 받침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중앙 3층석탑은 금당 뒷쪽에 배치되어 있으며 2층 기단위에 3층 탑신을 놓은 신라 일반형이다. 옥개가 평박하고 전각의 곡률이 크며 받침은 4단이다. 신라 말기의 섬약한 기풍을 지니면서 우아한 솜씨를 보이고 있다.
  서3층석탑은 이 밖에 다른 2기와 함께 금당지 뒷편에 일렬로 나란히 서있어 이렇게 3기의 3층석탑이 있음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배치라 하겠다. 2층 기단위에 3층 탑신을 세운 신라 一般型石塔이라 하겠는데 이들 3기의 탑은 고승들의 부도가 아니라 근년에 새로 알려진 「聖住寺事蹟」에 의하여 모두 불탑임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