背理의 도시, 칼카타

부처님 나라 순례기

2008-01-22     관리자

  가야로 다시 되돌아 와서 칼카타행 기차를 탔다. 삶에 지쳐버린 예(例)의 군상 속에 파묻혀 육체를 비천(卑賤)하게 열차의 바닥에 눕혔으나 성지순례(聖地巡禮)의 감동이 나의 정신을 장엄하고 있었다. 열차의 더러운 바닥이 성자(聖者)의 침소로 변할 수도 있었고 얼굴을 넘나다니는 무례한의 가랭이가 윤회(輪廻)의 수레를 끄는 마각(馬脚)처럼 가엾어 보이기도 했다. 그때 잠결에서 노랫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감미로우면서도 애조(哀調)를 띈 인도 특유의 민요였는데, 저만큼 열차의 구석에서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중성의 광대들이 여장(女裝)을 하고 북과 손풍금으로 가락을 맞추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동시에 그 패거리 중의 한사람은 넓적한 냄비를 들고 다니면서 동전을 걷어 들이고 있었다. 인도에서는 이들이 그룹을 만들어 가무를 익히고 광대놀이를 배워 남의 집 잔치에 불려 다니면서 돈과 음식을 벌고 있는 것이다.
  새벽 뱅골리만(滿)에서 솟아 오르는 붉은 태양을 바라보면서 칼카타 역에 도착하였다. 소개장을 휴대했기 때문에 세계대각회 본부에 찾아갈 예정이었으나 너무 이른 새벽이어서 올 데도 갈 데도 없었다. 인도에서라면 쉬고 기다리기 위해서 다방이나 벤치를 찾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들고 다니는 이불 꾸러미를 내려 놓고 깔고 앉거나 베고 누워버리면 그만 인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했다. 이불을 깔고 앉아서 준비해 온 여행안내서를 꺼내 칼카타의 지도를 면밀히 조사해 보았다. 먼저 대각회 본부의 위치를 찾았고 바로 그 앞쪽이 유명한 칼카타 대학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내가 더욱 열심히 찾고 있었던 곳은 중국 음식점이었던 것이다. 내가 칼카타에서 하려는 계획 가운데는 중국음식을 먹으려는 것도 매우 중요한 항목이었다. 어차피 한식은 체념한 상태이니까 중국음식을 먹을 수 있겠다는 기대 만으로도 칼카타에 온 보람이 상당히 충족될 정도였다. 그런데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던가! 찾았다. 지도에 표시될 정도라면 호화판 고급 음식점임에 틀림없다.
  어느듯 거리가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역을 나와 빨간색이 칠해진 영국식 이층 전차를 타고 칼카타 대학 앞에서 내려 대각회 본부로 찾아 갔다. 그곳에서 사무 총장직을 맡고 있는 진나라타나 스님을 만나 소개장을 전달했다. 그는 나를 극진히 맞이해 주었고 우리나라의 박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을 내보이고 자랑을 했으나 속되지 않고 어린이 처럼 순진해 보였으며 나의 칫솔과 치약까지 보살펴 줄 만큼 자상한 분이었다. 그는 내가 어떤 음식을 좋아 하는지 물었다. 나는 파렴치할 만큼 당돌하게 중국음식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그날 점심시간이 되자 식탁 위에는 난데없이 중국식 볶음밥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혼자였다. 만약 누구든지 열쇠구멍을 통해서라도 나를 엿보았더라면 신성한 법당에 아귀가 들어 왔다고 믿고 나를 몰아 냈을 것이다. 그날 저녁에도 역시 볶음밥이었다.
  나는 그날 하루는 이곳 대각회의 사업이며 현황을 구경하고 진나라타나 스님과 함께 한국불교며 세계불교 운동 및 그 전망들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모처럼 한국과 세계를 연결하는 사명감에 들떠 있었다.  사실 내가 칼카타를 방문하게 된 주된 목적은 현재 일본에 계시는 능가스님의 소개로 불교를 통하여 세계 인류와의 대화를 모색하고 한국의 불교문화를 세계에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보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개인의 학문을 추구하는 일개 학자로서만이 아니라 자신이 속하는 국가의 일원으로서 조국에 기여할 바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오전, 칼카타 박물관에 찾아갔다. 엄청난 자료가 깨끗치 못한 진열장 속에 고물상의 폐물들 처럼 겹치기로 쌓여 있었다. 그러나 인도의 어느 구석에서도 나에게 영감을 주고 흥분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은 인도의 조각미술이었다.  종교적 신비주의가 근원에서 분출하는 표현의 마력이 담겨있는 것이다. 다음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기념관을 방문했다. 제국의 영광이 돌로 굳어져 여전히 인도인의 정신을 노예로 만들고 있었다. 기념관 전체가 대리석으로 건축되어 있었는데 제국식 궁륭을 머리에 이고 좌대에 떠받혀 보좌에 앉아 있는 여왕을 중심으로 회랑에는 역대 총독들의 초상화며 입상 혹은 훙상들이 즐비하여 제국의 권능에 인도를 억누르고 있었다. 기하학적 정원이며 공간처리는 추상미를 나타내고 있어서 인도의 환경과 대조시켜 보면 마치 연꽃 잎위를 구르는 물방울 같았다.
  칼카타인들은 시성(詩聖) 타골(Ravindre Tafor)을 자랑하며 타골의 시(詩)로 변한 그들의 언어—뱅골리—)를 사랑한다. 뱅골리는 그 음이 부드럽고 구르는 듯 하다. 그런데 그 언어를 입에 담고 종알거리는 거리의 많은 사람들은 사기성이 많고 이곳은 어떤 다른 도시 보다 더럽고 범죄가 많다.  인도에 기독교가 들어와 가장 활발한 곳이 이곳이고 남녀 관계가 비교적 개방되어 있어서 젊은 남녀가 손을 마주잡고 공원벤치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거리와 골목에는 뚜장이가 득실 거린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내가 깔리데비(권력과 복수의 女神)를 모셔 놓은 힌두 사원에 가보았을때 가장 강렬하게 느꼈다. 인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채식주의자(菜食主義者) 이고 불교사상의 영향으로 비폭력주의(Ahirpsa)를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서양인의 육식 문화(肉食文化)를 비난하고 무력(武力)앞에 무저항주의로 대항했던 것이다. 그러나 입언저리에는 피가 낭자하고 혀를 디룽거리면서 인간의 해골로 목거리를 해걸고 있는 깔리데비를 위하여 푸쟈(예배)를 드릴 때마다 약 5분 간격으로 살아있는 양의 목을 일격에 칼로 자르느 것이다. 그러면 피가 고인 가장자리에 개들이 몰려와 홀짝거리며 마신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칼한 장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