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본 인간관] 2. 원시불교의 인간관

2008-01-21     고익진

 인권선언(人權宣言)과 관련해서 불교의 인간관을 살펴보고 싶다는 것이 편집인의 내용에 대한 설명이다. 필자는 원시불교의 아함경(阿含經)에 설해진 인간관을 그런 각도에서 간단히 소개해 달라는 것이다. 편집 방향이 그렇다면 마땅히 인권선언이 있게 된 역사적 과정부터 조사해 보는 것이 필자의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럴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인권선언의 그「인권」이라는 것이 어떤 내용의 개념인가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인권선언은 현대사회의 인권유린을 떠나 생각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런 성격의 인권유린은 다시 현대사회의 인간주체성 상실을 떠나 생각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인권선언적인 각도에서 원시 불교의 인간관을 다룬다는 것은 곧 인간의 주체성을 원시 불교에서는 어느 정도로 인정하고 있는냐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자랄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아함경에 설해진 여러가지 인간관을 살펴 볼 때 필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을 그곳에서 볼 수 있는 인간관의 특질로 지적하고 싶다.

   ① 힘찬 의지적 존재

 첫째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극단적인 인정이다. 부처님 당시의 인도 사상계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 대립이 있었다. 우주의 창조와 그 본질을 범(梵)으로 보는 바라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되, 피조물(被造物)로서의 한계 안에서 인정하였음은 물론이다.

 한편 사문(沙門)들은 바라문들의 이러한「범」을 부정하고 우주의 근본을 몇 가지의 물질적인 요소로 보았는데, 이들 중의 순세파(順世派)와 사명파(邪命派)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부정하였다.
특히 사명파에서는 인간의 결정된 운명적인 삶을 어쩔 수 없이 살아갈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계파(離繫派)는 우주의 구성 요소를 물질적인 것(非命)과 정신적인 것(命)과의 둘로 가르고, 후자에게는 의지가 있어 물질적인 계박으로 부터의 해탈이 가능하다고 설하였다. 그러나 이것 또한 철저한 의지론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니, 두 요소의 결합 문제는 숙세(宿世)에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의지에 대한 이러한 여러 가지 견해에 대해서 부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하셨는가. 아함경에 설해진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은 육근설(六根設)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이에 의하면 현실적으로 인간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은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감관기관(根)이다. 그런데 이런한 다섯 감관기관을 통합 주재하고 있는 주체(主體)를 곧 바로「의지」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인간의 주체적 의지는 아무 것에도 예속될 수 없는 극히 자유로운 것임을 현실적으로 의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만일 인간에게 의지가 없다거나, 또는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은 신이나 운명같은 것과의 연속관계속에서 인정한다면, 인간의 죄악이나 의욕과 같은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을 것이다.
죄악이라는 것으 그것을 범한 자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지워질 수 있을 때에 한해서 성립될 것이며, 인간에게 의욕이 있다는 현상 또한 현실적을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서 부처님은 인간의 행 · 불행도 신이나 운명에 의해서 또는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의지적 행동에 의해서 초래된 것이라고 설하고 계신다. 눈앞의 현실을 극복하고 타개해 나갈 것도, 신이나 운명, 또는 우연에 힘입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의지적 활동 뿐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입장이 바로 원시불교의 업설(業說)의 내용임은 물론이다.

   ② 괴로움에 제약된 존재

 아함경에 인간은 이렇게 강력한 의지적 존재로서, 아무 것에도 예속될 수 없는 극히 자유로운 주체성을 지닌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은 내적으로는 괴로움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또한 밝히고 있으니, 이것을 우리는 원시불교의 인간관에서 주목해야할 두째번 특질로 들 수가 있다. 인간존재에 대한 원시불교의 분석적 고찰은 六근설에서 다시 五온설(五蘊說)로 전개되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앞서 소개한 여섯 부문으로 구성된 인간존재는 그 하부조직(下部組織)으로서 다시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으로 이름 붙일 수 있는 다섯 개의 근간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하부조직의 속성을 「괴로움」이라고 고 규정하고 있다.

 六근설에 이어 설해지는 이러한 五온설은 인간의 의지가 극히 자유로운 주체성을 지닌 것이로되, 그것은 보다 근원적인 괴로운 존재는 끊임없이 편한 것을 추구하기 마련이고, 이러한 본능적인 욕구는 인간의 의지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의지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유혹이나 강압에 쉽사리 지지 않을 수가 없고 그러한 괴로움이 감당할 수 없는 극한상황에 이르면 자체붕괴를 면할 수가 없다. 강력한 의지적 존재이면서도 안으로는 이렇게 덧없는 나약함을 지닌 것이 바로 인간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원시불교 또한 인간적 의지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를 주고 있는 원인을「범」이나 숙명과 같은 외적인 것에서 찾지를 않고 인간 내부에서 발견하고 있으니, 여기에서 다시금 우리는 원시불교의 인간관이 매우 주체성을 띄었음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③ 스스로 구원해야 할 존재

 그러나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원시불교의 의식(意識)은 이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들어가, 인간의 의지를 계약하고 있는 그 괴로움은 어떻게 하여 있게 되었는가를 밝힌다. 그리고 그것을 진리에 대한 인간의 무지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죽음」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괴로움은 무명(無明)에서 연기한 것이라는 十二연기설(緣起說)은 이러한 교설의 대표적인 것이다.

 바라문이나 이계파(자이니즘), 또는 오늘의 기독교와 같은 종교들은 인간의 현실상황을 모두 비참한 것으로 보고 있다. 불교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어떻게 해서 있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서로 설명이 다르다. 바라문교는「범」의 욕심에 의한 것으로 설하고,「자아니즘」은 속세에 있어서의 정신과 물질의 결합으로 보았다.
기독교에서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신의 뜻을 어긴 인간의 오만심에 대한 신의 벌로 설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모두 인간의 괴로움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으로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그러한 괴로움의 원인을 인간 스스로의 무지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 견지에서 괴로움의 근본적인 극복 또한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을 뚜렷이 한다. 인간 내심의 무지를 타파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힘에 의할 수밖에 없다. 부처는 오직 길을 가리킬 뿐. 자신을 등불로 삼고 깨달음을 이루라는 것이 아함에 끊임없이 되풀이 되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제할 능력이 없고, 오직 창조주 신에 대한 속죄를 통해서만이 구원이 가능하다는 다른 종교의 입장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따라서 이 점을 다시 필자는 아함경의 인간관에서 세째번의 특질로 들고 싶다.

 이렇게 살펴볼 때 원시불교는 시종일관 인간을 아무 것에도 예속되지 않는, 또는 예속시킬 수도 없는 뚜렷한 주체성을 지닌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다른 종교사상에서는 예를 찾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인간의 권리와 주체성이 문제되는 현대사회에서 원시불교의 이러한 인간관은 새로운 관심을 모아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