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수기] 불자임을 자각하는 날

신앙수기

2008-01-21     강정희

 「엄마 몇 살이죠?」「세살이란다」「세살? 설흔셋? 마흔셋?」「그저 세살」「그럼 엄만 나 보다 어리게?」국민학생인 세째가 으아해서 처다 본다. 아이들은 흔히 부모의 나이를 인식 못한다. 어느날 문득 우리 엄마가 몇 살일까? 궁금해져서 물어 보는 것이겠지. 이 셈이 안되는 세살이란 답을 대뜸 대어 놓고 알아 듣게 풀이해 주느라 땀을 뺀적이 있다.

  부처님이 올라른 법을 만나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사십년간은 헛살았다는 내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시절에 넓은 들길을 걸어서 혼자 학교를 다녔는데 온갖 들꽃과 풀포기, 개구리, 꿩, 메뚜기 등이 내 친구였다. 집으로 올아오면서 보리깜부기를 뽑기도 하고 빨기를 한웅큼씩이나 뽑아 갖기도 하고 가을엔 보라색, 흰색의 들국화 냄새를 맡으며 외로움을 달래었다.

그 곳 논뚝기을 따라 나직한 산이 비스듬히 솟았다기보다는 누워 있었는데, 그 중턱엔 나한자들이 군데 군데 움막집을 지어 살고 있었고 산모퉁이에는 상여집이 있어서 가끔 흰꽃 분홍꽃이 달리 상여를 내가고 오가고 하는 적도 있었다.

  철따라 온갖 풀꽃과 곡식들이 나고 시들고 없어지고 또 그것이 반복되는 것을 보고 느끼면서 몇년을 그 들길을 오고 갖다. 이 시절에 깊이 깊이 스며 들어 버린 고독과 공포와 신비감이 나를 사색과 우수에 잠기게 했고 그 습성을 어른이 된 뒤까지도 나를 지배했다. 나의 인생관은 허무적이고 비관적이어서 「이세상이 한장의 종이라면 박박 찢어 없앴으며····」이런 엉뚱한 생각도 하고 내가 존재해야할 이유와 가치를 따져보면서 의욕이 없는 세월을 보내기도 했었다.

  결혼후 집안일과 아이들이 늘어남에 따라 분주한 나날을 보내 마음은 허전하고 망망해서 할일을 못한 것 같고 마치 낯선 고장을 이 거리 저 거리 헤매면서 뭔가를 찾고 있는 고달픈 나그네처럼 서글프고 피곤한 심정이었다. 이 알 수 없는 공허감을 메꾸어 보려고 교회나 성당이나 전도관까지 두루 쫓아가 보았지만 덩그라니 혼자인 나를 의식할 뿐 허사였다.

  시댁에서는 할머님과 어머님이 절에 열심히 다니셨는데 나에겐 아무런 의미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울로 올라와 살림을 하게되고 나의 정신적 방황은 더욱 심해져가고 있었는데 수년이 흘러 남판이 진급을 하자 시골에서 온 어머님 편지에 「내가 부처님께 빌어서 진급을 했노라」는 내용이 적여 있었다. 나는 심한 저항감이 느껴져서 답장에다 「부모란 자식의 마음을 편히 해주고 알뜰히 보살피는 것이어야지, 돌부처 앞에 빈다고 무슨 덕이 있겠느냐」는 투의 오만 불손하기 짝이 없고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끔찍스런 소릴 써 보냈다. 그만큼 불교란 미신이상의 아무 뜻도 없어서 관심 밖이었다. 불교를 깊이 믿는다는 집안에서 내 인식을 바꿀 수 없었다는 것은 뭔가 잘못 돼 있다는 것과 캄캄한 무지란 죄의 바탕이 되는 참으로 무서운 것임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목마른이에게 물이 필요하건만 바로 물을 앞에 놓고도 물인줄 모르는 무지에다 아무도 물임을 가르쳐주지 않는 그런 상황속에서 수년이 흘러갔던 것이었다.

  올바르지 못한 인생관은 현실생활을 무척 고달프게 이끌어 나갔고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 나가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당하기만 하는 억울함 속에서 탈퇴할 수가 없었다.

  마흔이 가까와 오는 무렵에 어느날 친한 친구의 권유로 절에 가게 됐는데 이래 저래 시달리다 보니 볼교란 어떤 걸까 알고 싶기도 하여 따라 가 봤더니 정능에 있는 경국사였다.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외고 있었는데 노스님께서 우리들에게 염주바구니를 안기시며 「관세음보살을 불러요」하셨다. 오는 사람마다 그렇게 시키고 계시더니 「잠깐 내 말을 들어요」하시며 중지를 시키시고는 「교만을 버려야 돼요, 수심을 가져서는 안돼요.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해야 돼요」이런 말씀을 일러주시곤 했다. 또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염하면 헌병이 우리를 보호하는 것과 같아서 어떤 재앙이나 악도 침범치 못한다 하시며 실례를 들어서 말씀해 주셨다. 나는 감명 깊게 새겨 듣고 경건한 마음으로 염주를 헤며 관세음보살을 외다가 순서를 따라 법당으로 올라갔는데 촛불에 비친 금색칠한 부처님 앞에 절을 자꾸 하며 자욱한 향내음새를 맡으면서 「이것이 불교인가 보다」하고 생각하면서 하는 알아듣기 힘든 스님의 목소릴 듣고 있었다.

  나는 그 이후부터 노스님의 말씀을 따라 관세음보살을 쉬지않고 마음 속으로 외우며 지냈다. 그곳엘 다니면서 차츰 생각이 바꾸어 지기 시작했다. 억울한 해를 당하면 전생의 빛을 갚는다 생각하고 고난이 닥치면 지은 죄의 갚음을 받는다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고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전연 남을 원망하거나 탓 할일도 없고 전부 나에게 원인을 두니까 살아가기가 편했다. 피해를 입는 입장에서 벗어나서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있으며 진심으로 도우고 남과 나를 차별 없이 남의 필요에 응해서 성의를 다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자 힘썼다. 이러한 적극적인 자세는 나와 내 주의를 밝게 정화시켜 가는 느낌이었다.

  그 후 남편이 전근으로 일본에 가서 살게 됐는데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보고 듣고 배우면서 분주한 나날을 보냈는데 마음속으로는 항상 관세음보살을 잊지 않았다. 그곳에서 격은 즐겁고 흐믓한 여러가지 체험을 다쓸수가 없으나 생소한 타국일지라도 내 마음을 지어가는 바에 따라 좋은 인연을 지어서 얼마든지 정답게 살 수 있음을 실감했다. 재일교포나 일본 사람이거나 우리가 사권 분들은 한결같이 따뜻하고 친절해서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 지금도 가득하다.

  귀국후 2, 3개월이 지난 이른봄 약간 안면이 있는 분을 만나게 됐는데 어느절에 다니느냐는 이야기가 나와서 그분이 다닌다는 절에 가기로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관음재일인 음력 24일에 가르쳐 주던 데로 찾아 가니 주안(朱安)의 용화사였다. 시키는대로 전강(田岡)스님께 삼배를 드리고 법당에 들어가 설법을 들었다. 무슨 내용의 말씀인지 잘 알 수가 없어서 애써 귀를 기울이고 있으려니까 「이 뭣꼬를 해 보란 말씀이여」하시며 높은 단상에 앉으신 채 묵묵히 계시는 것이었다. 법당안에 모든 사람들도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묵고? 面黙考인가? 가만히 생각하라는 건가보다 하고 나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곳엘 다니며 몇번 설법을 듣고서야 이 뭣꼬?가 話頭이며 「이」하고 한 생각 내는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의심하는 것이며 그것이 내 몸을 끌고 다니는 주인공인데 그 주인공을 찾는 공부를 가르쳐 주는 곳이란 것을 알게 되여 생사를 해탈해야 한다는 스님의 법문은 내눈을 번쩍 뜨게 했다.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나는 수십년을 목말라 찾아 헤매다 물을 만난듯, 캄캄한 그믐밤에 횃불을 만난 듯 기쁘기 한량 없었다.

  내 몸뚱이가 난줄만 알던 나에게 나의 참다운 주인공이 따로 있으며 내가 나를 주관하고 있다는 이 이치는 큰 용기를 주었다. 내 아닌 딴 힘의 지배로 내가 좌우된다면 별별 노력은 허사가 되기 쉽고 뜻대로 되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의 주인공이어서 온갖 행, 불행의 열쇠는 내가 쥐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이치인가? 나는 위대한 자유의 소유자이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 위대함을 망각하고 이 고장 저 고장으로 떠돌며 迷兒처럼 헤매고 고달픈 나그네 생활을 해 왔지 않았는가? 이 생활을 청산하고 영원한 자유와 행복의 本鄕을 찾는 길을 가르쳐 주신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을 간절하고 애타게 자비로운 마음으로 일러주시는 스님께 한 없이 감사하였다. 나는 본래가 迷兒가 아니고 대자유인이 될 수 있는 佛子라는 이 기쁜 사실을 어찌 이제사 알게 됐는가 안타까웠다. 이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더욱 안타까웠다. 올바른 가르침을 만나지 못해서 믿지를 못하고 믿지를 않아서 내가 불자임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옛날에 나는 무서운 꿈을 가끔 꾸었는데 무섭게 생긴 괴물이 쫓아오면 도망을 쳐야겠다는데 두발은 천근같이 무겁게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무진 애를 쓰다가 붙잡히려는 순간에 내 몸뚱이를 눈에 보이지 않게 없애자 하고 생각하는 순간 공기처럼 투명해진 나는 통과하여 그 괴물은 놓쳐버린 나를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그 때 나는 몸이 없는 채로 통괘한 기분이 되었다. 또 어떤 때는 막다른 골목까지 쫓겨가서 어쩔 수 없이 잡히게 되는 순간, 이건 꿈이다, 꿈이니깐 깨면 되지하고 깨어나버렸다. 깨고나서의 안도감, 안온한 방안, 이부자리 속에 누어있는 自身을 얼마나 다행으로 여겼던가? 공포에 떨던 꿈속의 나는 가짜이며 그 가짜를 조종하는 나는 자리에 누워 있었다는 것을 깨닫듯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살이가 한바탕 꿈이며 이것을 조종하는 힘을 가진 「참 나」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불교는 가르치고 있어서 내가 꾸었던 꿈과 묘한 비유를 이루었다.

  꿈을 꾸면서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자각을 하면 언제고 깰려고 애를 쓰겠지만 꿈을 꿈인지 모르고 울고 웃으며 고통에 시달리고 괴로워하고 허둥거리다가 일생을 보내게 되니 언제까지 이 노릇을 되풀이 할 것인가?

  本鄕찾는 길을 가르쳐주신 부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佛子임을 일깨워 주신 자비로우신 아버지시며 인도자이시며 스승이심을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불자인 내가 할 일이다.

  불자임을 자각하기 이전에 저질러 놓은 무지의 소치로 인한 온갖 죄업을 깊이 참회하면서도 오랫동안 깊이 배긴 습성을 불자로서의 본성을 앞서서 떠돌이 행토를 내기도 한다.

  「엄만 불교신자면서 성을 내요?」「그래 내가 지옥 가더라도 너희들 옳게 가르치려니 성을 안낼 수 있어야지」「그럼 우리가 엄마를 지옥에서 구해내면 되지」궁색한 엄마의 변명에 아이들은 예사롭게 대꾸하며 웃는다. 예사일이 아니라는 내 마음속은 알지도 못하고···.

  「무한한 생명과 자비와 완전한 지혜이신 부처님, 불자인 저에게도 본래 갖추어져 있는 무한한 생명과 자비와 지혜를 現두하여 증명케 하소서」이런 기도로 하루가 시작되고 다시 그러한 내일을 기억하면서 무한한 생명과 지혜와 자비로 이끌어 주신 오늘을 감사하며 잠자리에 든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그리운 고행을 찾아 나선 佛子임을 자각하면서 보내는 하루 하루는 결코 허망하지 않고 용기와 희망에 찬 환희와 감사의 나날이다.

 

법장궁 강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