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강의실] 15.보현행원품 강의

성전 강의실

2008-01-21     광덕 스님

󰊶 어떻게 청법하는가

  원래로 법문은 산하에 가득하고 허공에 가득차며 우주에 넘쳐 있으나 그 법문을 능히 듣지 못하는 자가 없는 것이다. 다만 스스로 자기 귀를 가리고 자기 눈을 가리기 때문에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고 그 설법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을 비울 때 곳곳에서 선지식을 만나고 곳곳에서 제불의 설법을 듣는 것이다. 아집과 편견과 三毒에 빠져 있을 때 선지식을 만나고도 못보며 설법을 듣고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설법을 듣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비워 그릇된 소견을 모두 털어 없애고 아집과 아만의 산을 허물어 버려야 한다. 옛부터 이르기를 「마음을 비워야 부처시험에 급제한다」는 말은 이 뜻이며, 여러 경전에 부처님께 법을 청하였을 때 부처님께서는 「자세히 들어라」라고 먼저 말씀하시는 것도 마음을 비워 온전한 설법을 들어라는 뜻이다. 그렇거늘 어찌 설법주를 믿지 아니하거나 그 말씀을 비판하려 하거나 어떤 말을 하는가 들어보겠다는 자세로 공경심이 없다면 법을 들을 수 있을까.

  법을 들으려는 자는 믿음과 공경과 진실을 다하여야 한다. 설법이 자기 생명을 영겁으로 건져주는 최대의 은혜로운 계기라고 생각하고 환희심과 용기를 내어 온갖 장애나 구실을 이겨내고 법을 듣도록하여야 한다. 설법을 듣고 싶어도 「바빠서 시간이 없다」는 구실은 진정한 청법자에게는 없는 것이다. 생명에 영겁의 광휘를 줄 법문보다 소중하고 귀한 것이 또 있다는 말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말세중생이 선지식을 구하여야 깨달음을 얻는다 하였고, 또한 선지식을 만나면 신명을 바쳐 섬기라 한 것은 청법자의 기본자세를 결정적으로 말씀해 주신 것이다.

 

󰊷 법을 설하는 사람들

  앞서 법문은 허공에 충만하였다고 하였다. 그렇거늘 어찌 부처님이 법문을 설하지 않겠으며 대보살과 대선지식이 법을 설하지 않겠으며 스님들과 삼보제자들이 법을 설하지 아니할까.

우리들은 모름지기 그 모두에게 친근하여 청법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는 모양이 비롯 아무리 초라하고 그의 말씨가 아무리 눌변이라 하더하도, 또한 그가 아무리 지식이 부족하고 그의 형세가 아무리 낮아 보이더라도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법문은 우주를 싸고남은 대법인 것을 믿고 오직 공경하는 마음으로 청법하여야 하는 것이다,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하신 부처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법으로서 생명을 삼는 자신의 본분을 일깨워 주는 가르침도 있지만 설법주의 형상에 매어달려 분별심을 내어 혹은 친근하고 혹은 배척하는 것을 경계하신 말씀인 것이다. 또 범망경에는 「설법자는 방석 하나라도 더고여 높은 자리에 앉으라··········· 」하신 것도 설법주의 사람됨이 다른 사람들 보다 존귀해서가 아니라 법을 존중히 하는 뜻임도 또한 알아야 하겠다.

󰊸 說法의 요건들

  경의 말씀에는 「몸과 말과 뜻으로 가지가지 방편을 지어 설법하여 주시기를 권청하라」하셨다. 설법에서 우주의 광명이 비롯되고 생명이 감로를 받게 되며 국토가 진리로 장엄되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지극 정성 다 하여 설법하여 주시기를 청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몸을 다하고 말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방편을 다하여 설법을 청하는 것이다. 설법주를 공경하고 법문을 찬탄하며 청법대중을 모으고 설법장소를 마련하고 법회를 원만하고 화애롭게 이끌어 나아가는 것은 이것 또한 중요한 청법 요건인 것이다.

  부처님 당시 죽림정사(竹林精舍)가 지어지고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 지어져서 억겁으로 전해질 부처님의 대설법이 열리게 된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설법할 시설과 현대적 여건을 구비하는 것도 청법이다. 서로가 화합하고 환희하며 서로 힘을 합쳐서 법륜이 크게 구르도록 힘쓴다면 거기에는 여러가지 방편이 나오게 된다.

  법을 배우는 거룩한 무리들을 환희 찬탄하고 비롯 먼 곳이라 할지라도 원근을 가리지 안니하고 청법하며 거룩한 법회의 이름을 크게 드날리는 것도 또한 설법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善知識을 받드는 일

  끝으로 한 말 더할 것은 선지식에 관한 것이다. 원각경에 말씀하시기를 「말세중생이 큰 마음을 내어 선지식을 구하는데 있어서는·········」 마땅히 이러이러한 사람을 구하여야 한다 말씀하시어 선지식되는 기본요건을 말씀하고 있다.

  첫째 정지견(正知見)인 사람이다. 이 사람은 마음이 상(相)에 주착하지 아니하며, 성문 연각 등 소승경계에 머물어 있지 아니하며, 비롯 번뇌가 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항상 청정하며, 또한 여러 허물이 있음을 보이더라도 항상 청정행을 찬탄한다 하였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이루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수행하는 사람은 먼저 선지식을 구하고 선지식에 의지하여야 하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계시거니와 또한 선지식을 받들어 섬길 것도 함께 말씀하고 있다. 「말세중생이 이와 같은 사람을 보거든 마땅히 공양하되 신명을 아끼지 말라」하였으니 법률이 영원히 굴러 이 땅에 감로의 비가 끊임없이 내리고 청정법의 광명이 영겁으로 빛나게 하기 위하여서도 우리는 마땅히 선지식을 바로 섬기는 것을 배워야 하겠다. 그리고 우리의 근본서원인 사홍서원 중에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은 청법을 게으르지 않는데 있음을 다시 명념하여야 할 것이다.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여도 나의 항상 일체부처님께 바른 법 설하여 주시기를 권청하는 것은 다함이 없다········」한 경의 말씀은 진정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인 것을 명심하자.

 

 說法의 社會的 條件

  앞서 설법은 어둠이 던져지는 진리의 빛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개인에 비쳐지거나 어떤 사회에 던져지거나 어떤 시대와 상항에 던져진다는 것은 그것이 진리가 그곳에 구현된다는 의미에서 실로 막중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개인에게 밝음과 변혁을 주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역사의 방향을 이르는 데까지 광범한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실법의 사회적 조건의 보장이라 하는 것은 그 시대와 역사발전에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대체로 인간생활이라 하는 것은 욕망의 추구와 그것을 위한 사회적 조화에 직접 동기가 있다. 이러한 범부시정과 욕망실현을 위한 활동과 사회에 올바른 진리의 빛이 던져지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투쟁과 야망만이 있을 것이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욕망충족을 위한 질서 이상의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계발하자면 적절한 지도와 사회적 조건이 보장이 또한 필요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설법이 없는 사회는 지혜의 빛을 잃은 기동차다. 십자가두 위에서 좌충우돌하는 것으로 비유될 수도 있다. 끊임없이 최상의 지혜의 빛에 의하여 인간역사와 인간사회와 인간의 행위와 그 마음이 비쳐져야 한다. 영예로운 인간역사의 발전을 위하여는 위 없는  지혜의 끊임없는 조명(照明)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동시에 종교를 맡고 있는 교단이나 자각적 불자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불교의 빛을 역사와 사회와 인간의 평원 위에 펴 나가도록 하여야 한다.

  불법이 인간 개개인의 정신문제 뿐만 아니라 인간이 바르게 성장하고 생활하며 참된 가치가 발현되도록 사회적 시설로 되도록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설법은 마땅히 이와같은 사회 구조면을 향하여 끊임없이 퍼져나가야 한다. 현대의 인간들이 스스로의 자각에 의하여 자주적으로 자기결단을 내리고 자기활동을 전개하는듯이 보이지만 실로는 그런 것이 못되는 것이다. 환경과 생활조건과 주어진 지식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일반인 것이다. 말하자면 자주적으로 스스로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 속에서 주어진 지식을 선택하고 결정한다. 현대인의 상황의존적인 이러한 특징은 문명이라는 조건성숙과 함께 더욱 더 해간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미혹에 의하여 스스로 넘어지고 잘못된 사회사상에 의하여 더욱 방황하고 그릇된 사회구조를 통하여 자기 방황은 더욱 더 해간다. 설법이 인간이 살고 있는 모든 상황에 부어지도록 보장된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생활과 역사 위에 끊임없는 진리의 조명이 계속되는 것이 이것이 필경 불토를 가구는 근본 자세다. 한 국가나 사회가 참되게 번영하자면 이런 의미에서 종교의 자유와 설법의 자유와 그 여건과 사회적 시설이 보장되어야 할 것도 당연히 이해가 갈 것이다.

  이러한 설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비로소 이 국토를 인간의 영광을 가꾸는 국토로 만들며 인간의 역사를 탐욕추구와 그 조정의 역사에서 벗어나 진리구현의 과정이며 시설인 것을 이루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중생계가 다하고 허공계가 다하여도」 설법의 광명은 영원한 것이지만 이에 못지 않게 설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등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