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쉬운 교리강좌] 조선불교(朝鮮佛敎)의 특색

알기 쉬운 교리 강좌

2008-01-21     관리자

조선시대 불교는 한마디로 말하면 국가 배불정책의 영향아래 산중일색의 산승불교로 특정 지워진다고 하겠다. 고려시대에 전성기였던 불교가 억불척승의 법란시대로 거의 일관 되었던 것이다. 이를 그 시대적 특성에 따라 다시 제1선교양종(禪敎兩宗)시대, 제2산승가풍(山僧家風)시대, 제3삼문수업(三門修業)시대의 불교로 크게 나누기도 한다.

제1기는 조선왕조가 개국된 태조원년(1392)으로부터 명종 20년(1565)까지, 선교양종(禪敎兩宗)과 승과(僧科)가 존립했던 시기이다. 종단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려 말 11종의 종단이 7종으로 축소되고❲태종❳ 이들이 다시 선종과 교종으로 통폐합하여 양종불교가 되었다. ❲세종❳ 고려대부터 지속된 승과와 이 양종이 한때 중단되었던 때도 있기는 하나 ❲연산, 중종조❳, 명종조에 다시 부활되었든 것이다.

제2기는 산승가풍이 확립된 시기이다. 즉 서산대사 휴정(1520~1604)과 그 문하 및 법손들에 의하여 가풍이 확립되고 흥성되었던 시기이다. 양종으로 묶여진 종단도 오래가지 못하고 깊은 산속에 자리 잡은 승가는 종단 부재의 산승불교가 되어버렸으나,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산승 휴정이 산승가풍을 중흥시키고 그 법맥이 사자상승(師資相承)되었던 것이다.

제3기는 산승불교시대 중 간경(看經), 참선, 염불의 3문수업의 전통이 확립되어 존속되는 말기에 해당된다. 산승의 법난시대는 승려의 도성출입이 해금될 때(1895)까지 계속되었으나, 공부에 충실한 이판승과 사원의 행정을 맡아 사무를 관장하든 사판승이 있어서 각기 혜명(慧命)을 계승하고 사원을 유지시켜 갔던 것이다.

조선 개국 초기에는 창업 이전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고 신불자(信佛者)였던 이성계에 의해 불사가 많이 행해졌다. 당시 정도전 등 창업의 중신과 유생들의 척불 주장이 드높았음에도 불구하고, 태조는 즉위 전부터 관계가 깊었던 무학 자초(無學自超, 1327~1405)를 왕사로 삼고(태조원년), 조구(祖丘)를 국사로 삼아(태조3년) 어려운 건국이념을 완성코자하였다. 그리하여 조탑(造塔), 조사(造寺)를 비롯하여 대장경(大藏經) 인경(印經), 금은자(金銀字) 사경(寫經), 반승(飯僧), 법석(法席) 등 불사가 많이 행하여졌다.

그러나 그 후의 왕들에 의해 배불정책이 철저히 실시되었다. 태종이 즉위하면서 숭유척불에 의한 배불정책은 과감하게 단행되었다. 궁중의 불사가 파하였으며 사원과 승려수가 삭감되었고 사찰토지와 노비의 수가 제한 몰수되었다. 왕사제와 국사제도 없어지고 도첩제(度牒制)가 엄히 실시되었으며 종단도 폐합되어 종파까지도 축소되었다. 그때까지의 11종이 7종으로 병합된 것이다. 즉 조계종(曹溪宗),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 천태법사종(天台法師宗), 화엄종(華嚴宗), 도문종(道門宗), 자은종(慈恩宗), 중도종(中道宗), 신인종(神印宗), 총지종(摠持宗), 남산종(南山宗), 시흥종(始興宗)의 11종이(태종6년 3월)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의 7종이 되었다.(태종7년 12월)

그러다가 세종대에 다시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둘로 종단이 통폐합되었다. 세종은 예조(禮曹)의 계청(啓請)에 의하여(세종6년) 조계종, 천태종, 총남종을 합쳐서 선종 하나로 하고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시흥종을 합쳐서 교종으로 하여 그때까지의 7종을 선종과 교종의 양 종파로 하고 전국에 36개의 사찰만을 남겼다. 또 사찰토지 및 거주하는 승려수를 한정하였다. 승록사(僧錄司)를 폐지하고 서울안의 흥천사(興天寺, 정릉 동쪽)를 선종의 총본사인 도회소(都會所)로 하고 흥덕사(興德寺, 동대문구)를 교종의 총본사로 삼아서 덕행이 높은 승려로 하여금 양종 각각의 제반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세종은 중년이후 불교를 신앙하였으나, 숭유억불의 당시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으며, 다음 문종도 승니(僧尼)됨을 금하고 승니의 왕성 출입을 금하는 등 배불정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배불정책에도 세조의 즉위로 외면되었다. 조선조에 있어서 대호불왕(大豪佛王)이라 할 수 있는 세조는 원래 불심이 깊고 신미, 수미, 홍준, 학열 등 여러 고승들과 친교가 두터웠다. 세조는 일찍이 수양대군으로 있을 때 부왕 세종의 명으로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보상절을 지었으며, 즉위 후에는 불전을 국역잔행하고 대장경을 인간하였다. 삼보를 받들어 승려의 권익을 옹호하며 사원 중흥의 불사를 크게 일으켰으며, 불교음악을 위시한 불교문화사업을 대흥 시키는 등 적극적인 호불 정책을 펴나갔다.

이처럼 세조의 숭불 호법으로 불교는 전성기였던 옛 고려시대로 돌아갈 것 같은 기운이 감돌기도 하였으나, 다시 성종의 즉위로 더욱 척불의 정책이 감행되었다. 성종은 국역 사업을 하던 간경도감(刊經都監)을 폐지하고 승려는 환속시키고, 사찰을 폐사시키며, 불전(佛典)에 대한 공불(供佛)과 창사 및 도승(度僧)을 금하는 등 숭유척불 정책을 철저히 하였다. 다음왕인 연산군 때에도 그의 방종무도(放縱無道)에 의하여 불교는 더욱 박해를 받게 되었으며 승과도 중단되었다.

승과 제도는 고려 광종 때에 시작된 이래 고려 일대는 물론 조선조에까지 계속되어 왔으나 연산조에 이르러 양종 도회소가 폐지됨으로써 양종은 가까스로 광주의 청계사에 물러가서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승과의 실시는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자연 중단되게 된 것이다. 중종조에는 생모 정헌왕후의 신불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왕조보다도 더 심한 폐불 정책을 보여주었으니, 연산조의 폭정에 의해 한때 중단되었던 승과가 합법적으로 폐지되고 말았던 것이다.(중종2년, 1507) 승과의 폐지는 결국 선종과 교종의 종단 자체까지도 그 존재가 무의미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다가 명종의 즉위로 섭정하게 된 중종비 문정황후와 함께 힘을 합한 보우대사의 흥불로 선교양종과 승과가 부활되었다. 봉은사를 선종본사로 하고 봉선사를 교종본사로 하여 교단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고 유능한 인물이 모여들었다. 서산대사 사명대사도 이때 승과 출신이었다. 도승(度僧)의 금을 풀고 퇴락 황폐한 전국사찰을 새롭게 일으켰다.

그러나 문정황후가 별세하자 이듬해인 문종21년 4월에 기어이 양종의 승과가 폐지되고 도승법(度僧法)도 금지당하고 말았다. 문정황후의 별세로 흥불 사업이 중단되고 중흥불사의 중심인물이던 보우대사가 요승이라는 악명을 쓴 채 장살(杖殺) 당하자 불교계는 다시 힘을 잃고 말았다. 결국 불교는 다시 산중으로 깊숙이 숨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조선불교는 본격적으로 산승불교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해주 스님은 청도 운문사에서 출가. 공주 동학사 강원대교과를 졸업하였으며, 동국대학교와 동국대대학원에서 화엄학을 전공하였다. 현재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