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불교미술] 8.신라의 금속공예

한국의 불교미술

2008-01-20     황수영

一 

우리의 금속 사용이 비롯한 것은 아득한 기원전의 일인데 근년에 이르러서는 고고학의 시대 구분에도 청동기 시대가  새롭게 등장되기도 하였다. 이같은 금속사용은 물론 석기 사용에 뒤따르는 것이지만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면서 역사시대에 들어와서 한층 발달되었던 것이다. 최근년에 경주에서 발굴된 고분출토품의 찬란한 모습은 주로 금은주옥의 금관 금대등 장신구를 말하는 것이나 그와 반출된 청동 또는 철제의 각종 모기나 기구들도 또한 그당시의 높은 금속문화의 발달을 실물로서 보여준 것이다. 이같은 높은 기술과 금속제련의 발달이 또한 불교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용품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으뜸되는 것은 주로 불구(佛具)로서 예를 들자면 범종이나 향로 금고 같은 장엄구나 불사리의 봉안을 위한 각종용기에 이르기까지 그 종별은 매우 다채롭다.

二  

먼저 신라의 금속공예 중에서도 범종은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의 범종은 오늘 국내에서 오직 3구만이 전래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작은 1구는 수년전 청주시내의 옛절터에서 우연하게 발견된 것이다. 신라의 범종을 그 연대순으로 들면 다음과 같다.

①  오대산 상원사종(725년)  ②  경주 성덕대왕신종(771)  ③  청주출토 동종(공주박물관)(9세기말경

이와 같이 오늘날 국네에서 전래하는 3구의 범종 이외에도 일찌기 일본에 건너가 사찰과 신사에서 전하고 있는 신라의 동종이 모두 4구가 있으나 이들은 모두 3척내외의 비교적 작은 것뿐이며 그중 2구만이 명기가 있어서 그 연대가 신라 말기인 9세기와 10세기 초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이같은 국내외에서 전래하는 신라의 범종 이외에도 해방후인 1948년 강원도 양양군 설악산 옛절터에서 우연하게 발견 되었다가 6.25 전란에 월정사와 더불어 불타버린 정원(貞元) 20년 명의 선림원 종을 잊을 수가 없다. 이종은 높이 1.22미터의 대종으로서 그 형태가 아담하고 종체에 새긴 무늬가 아름다운 점에서 신라 9세기초의 범종으로서 국보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새종이 발견된지 3년만에 전화에 녹아버린 사실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필자가 이 가련한 동종에 대한 깊은 회한에서 우리나라 범종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생각하면 기묘한 인연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같은 국내전래의 가장 오랜 종인 신라의 범종은 그 당시의 중국 또는 일본의 그것과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다.  첫째 형태에 있어서 다른 나라 종에서 전혀 볼 수 없는 용통(甬筒)이라고 부르는 원통을 용뉴(龍紐)와 함께 정상부에 갖고 있다.  둘째는 그 몸체에 외국종과 같은 종횡의 선대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오직 상하의 띠와 어깨 네곳에 방형의 유곽을 지녔으며 그 동체에는 많은 공간을 두고서 주악하는 비천과 둥근 당좌를 각기 상대하는 두곳에 배치하였을 뿐이다.

그중에서도 주악비천은 신라종의 가장 아름다운 무늬로써 오늘에 전하는 유례에서 모두 볼 수가 있다. 하늘을 나르는 천인이 각기 다른 악기(피리, 북, 공후등)를 연주하는 모습은 여운이 길고 맑은 종소리와 함께 옛 신라의 솜씨를 오늘에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신라의 종이 다른 나라의 것과 곧 구별될 수 있는 것은 위와 같은 특색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⑴ 상원사종(국보36호)  

신라종의 특색을 개별의 유례에서 말한다면 먼저 상원사종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종은 원래 경북 안동 누문에 달려 있었는데 조선조에 이르러 세조대왕의 특명으로 오대산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이같이 먼 길을 인력으로 옮길 때 하나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그것은 이 종이 안동을 떠나서 죽령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래서 어깨에 있는 젖꼭지 하나를 따서 안동에 보냈더니 다시 이종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오늘도 36개의 유두 속에서 오직 하나만이 없는 것은 그때의 이야기를 전하여 주는 것이다.   그것은 운반에 따르던 이야기는 그만두더라도 이 종은 연대가 가장 오랠 뿐아니라 형태가 아름다운데 특히 종의 배가 불러지면서 다시 밑으로 줄어든 종의 배가 불러지면서 다시 밑으로 줄어든 곡선에서 볼 수가 있다. 또 종체에 고운선으로 양각된 주악하는 한쌍의 비천은 신라종에서 으뜸이 될만 하다. 그리고 이 종만이 오늘 비록 자리를 옮겼다 하드라도 박물관이 아닌 옛 사찰에서 긴세월을 한결같이 전래하여 조석으로 타종의 기능을 감당하고 있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⑵  성덕대왕신종(국보29호)  

이종은 그 명문에서 전하듯이 신라의 경덕대왕이 선왕인 성덕대왕의 복을 빌고저 동(銅)12만근을 모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의 아들인 혜공왕때에 이르러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크기는 명문에 1장종 이라고 있어서 열자의 종임을 알 수가 있다. 이 종의 형식은 상원사종과 같으나 규모에 있어서는 불교세계에서 제1의 대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종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래한 곳엣는 조선조에 들어서 세종대왕의 특별한 배려가 있었다는 사실도 아울러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 종은 현제 새로 마련된 경주 박물관으로 옮겨서 새 종각에 달려있다.

⑶ 공주 박물관종   

이종은 위의 두종이 지상에서 전래한 사실에 비할 때 절터의 지하에서 발견된 것은 특이하다. ⑴ ⑵에 비하여 비천도 작으나 그양식은  신라종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신라의 금속공예는 먼저 불교의 동종으로서 대표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비록 범종의 기원은 중국의 오랜 청동기에 있다고 하겠으나 그것을 이어받아서 보다 우수하고 한층 아름답게 변모시켜 세계 제일의 종으로 발달시킨 곳에 신라 미술의 발달과 신라인의 뛰어난 솜씨가 있다. 신라의 무수한 사원이 경향 각지에 이룩되었고 그에 따라 대소의 범종이 마련되었는 바 다행하게도 그중 최대의 걸작을 오늘에 전하여 준 것은 우리의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진실로 신라의 동종은 동양 불교국에서 다시 볼 수 없는 뛰어난 예술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