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寺의 향기] 강화 전등사

古寺의 향기

2008-01-19     관리자

전등사의 내력

강화도(江華島)는 한강 입구에 자리한 면적 435㎡의 큰섬(主島)과 그 밖의 크고 작은 30여개의 섬을 이르는 것인데 강화는 단군신화가 서려 있는 마니산(摩尼山)과 고려시대부터 근세 일본침략 때까지 민족의 숱한 시련을 겪어온 역사의 고장으로 오늘의 우리에게 민족혼을 일깨우고 호국의지를 심어주는 산 교육장이다.
전등사는 이 섬의 남쪽, 길상면 온수리의 정족산성(鼎足山城 : 三郞城)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정족산 <삼랑성>의 유래는 마니산(摩尼山)의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나가다 이 지역에 이르러 세 봉우리로 형성된 것이 마치 솥의 세발과 같다 하여 정족산이라 하였다 한다. 이 정족산 성은 둘레 2㎞, 높이 2m ~ 5m의 석성(石城)인데 이 성 중심이 전등사다.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72년)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개산(開山)하여 처음에는 진종사(眞宗寺)라고 했다고 전해 오는데 상세한 것은 알 길이 없다.
오늘의 전등사의 이름은 고려 25대 충렬왕(忠烈王)때에 기원한다고 전해 온다. 즉 충렬왕비 정화(貞化) 궁주(宮主)가 부처님께 옥등(玉燈)을 현공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으면서 헌공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으면서 옥등이 만대를 이어나기를 기원한대 연원한다고 한다.
고려 27대 충숙왕, 28대 충혜왕때 크게 중수하였으나 조선 선조 38년 화재, 다시 복원하였으나 광해군 6년 또 화재로 전소된 것을 지경(志敬)스님 등이 6년의 역사 끝에 광해군 13년(1621년) 완전 복구하여 옛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18대 현종(顯宗), 산원각(璿源閣), 장사각(藏史閣)을 묘향산으로부터 옮겨 짓고, 19대 숙종(肅宗), 때 실록(實錄)을 보관하기 시작하여 이때부터 전등사는 사고(四庫)를 보관하는 사찰로 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고, 21대 영조(英祖)는 이 사찰로 와서 취향당(翠香堂)의 현판을 친필로 남겼다.
영조 25년(1749년) 영조의 발원으로 중창되었다.
22대 정조(正祖) 때 전등사내 정족창(鼎足倉)이 세워지고 23대 순조(純祖) 28년(1825년) 양곡 5천석을 보관할 수 있는 40~50간(間)으로 확장, 조정의 양곡을 보관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이 사찰의 스님들을 승군(僧軍)의 역할까지 하였다.
이후 부분적인 중수 불사는 계속되었으며 또한 병인(丙寅), 신미(辛未)의 두 양요(洋擾)를 겪은 후 강화도의 군사적인 중요성을 감안하여 승군(僧軍)으로 하여금 수호하게 하였으며 고종(高宗) 3년 1866년 10월 양헌수(梁憲洙) 등과 정족산성을 쳐들어온 프랑스 군을 격퇴 시킨 기념비가 입구에 세워져 있다.

전등사와 정화궁주

고려 25대 충렬왕은 원(元)나라 세조(世祖)의 딸 미실공주(迷失公主)와 결혼하여 원(元)에서 살다가, 그의 아버지 원종(元宗)이 죽은 뒤 고려로 돌아와 왕을 계승하였고, 왕위(王位)에 오르면서 정화궁주를 비(妃)로 맞아들였다. 이때부터 공주와 궁주는 서로 심한 질투로 사이가 나빴는데 궁주가 무녀(巫女)를 시켜 공주를 저주한다는 투서 때문에 궁주는 왕의 노여움을 받아 갇히게 된다. 곧 풀려났지만 왕을 만나지 못하고 별궁에서 쓸쓸히 보내면서 깊은 신앙에 젖었다. 그래서 전등사를 원찰(願刹)로 삼고 대대적인 중수 불사를 하고 대장경을 인출(印出) 전등사에 봉안한 것이다.
또한 전등사의 사찰명은 정화궁주의 옥등에 연유한다고 구전되지만 오히려 법등을 전해 오며 이 땅을 밝힌다는 불교 본연의 뜻을 지닌 사명(寺名)이 그 전부터 있었는지도 모른다.

삼랑성의 전설

정족산 유래는 앞에서 설명하였다. 그런데 정족산에 세워진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과 또는 삼랑(三郞)이라는 신하를 시켜 쌓았다는 전설만 있을 뿐 어느 때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으며 4개의 성문과 705개소의 화살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강화도의 성은 대부분 토성(土城)인데 비하여 이 성은 돌로 견고하게 축성 된이 특징이다. 고려 고종때 몽고의 침입을 피하여 강화도에 천도하면서 임시 궁궐을 지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축성된 성이 확실할 뿐이다.

나녀상의 전설

전등사 대웅전 4귀퉁이를 살펴본 사람은 누구나 기둥 위에 있는 여인(또는 원숭이상)의 형상이 조각되어 추녀의 무게를 떠받치고 있는 괴이한 형상을 볼 것이다.
전해오는 말로는 조선시대 광해군 때 대웅전을 맡아 공사를 하던 노총각인 도편수가 마을의 주모를 연모하여 돈과 패물을 맡겼으나 주모는 멀리 도망을 갔다. 주모의 도망은 도편수로 하여금 울분과 실망을 안겨 주었다. 도편수는 법당을 지으면서 여자는 요물이며 죄인이니 옷을 벗겨 여러 사람 앞에 망신을 당하고 무거운 추녀는 들고 있으면서 염불소리를 들어 지은 죄를 참회하여야 한다는 뜻에서 나녀상을 깎아 추녀에 끼워 악녀를 경계 캐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는 납득할 수 없는 몇 가지가 있다. 무엇보다도 도목수가 임의로 자신의 사감을 법당 조각에 표현한 것이 허락되느냐이고, 또 하나 여인의 덕성을 존중하는 우리 사회 우리 불교에서 여인을 조종하는 형상이 있을 수 없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러한 추한 형상을 어찌 만들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아마도 여인상이 아닌 다름 뜻이 숨어 있는 것으로 보아지는 것이다.

문화재

대웅전은 (광해군 13년 :1621년 건축) 보물 제178호이며, 약사전은 보물 제178호 범종은 보물 제393호로 중국 송(宋)나라 시대 작품이다. 그 밖에 전해오는 유물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