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쉬운 불교] 청정심(淸淨心)

알기쉬운 불교

2008-01-18     관리자

  1 사람마다 모두 깨달을 사람

 사람에게는 여러 종류가 있다. 마음에 때가 적은 사람도 있고 많은 사람도 있으며 어진 사람도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있다. 성질이 착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으며 가르치기 쉬운 사람도 있고 가르치기 어려운 사람도 있다.

 비유로 말하면 연못에 청 · 적 · 황 · 백등 여러색의 연꽃이 피어있다 하자. 물위에 나오지 않은 꽃도 있고 물 표면에 머물러 있는 꽃도 있으며, 물에서 나와 물에 젖지 않는 꽃도 있는 것 같다.

 이런 차별 밖에도 또한 남녀의 구별이 있는 것이나 사람의 본성에는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남자가 도를 닦아서 깨달음을 얻는 거와 같이 여자도 또한 도를 닦아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코끼리를 부리는 기술을 배우는 사람은 신념과 건강한 몸을 갖고 부지런하고 거짓이 없으며 그 위에 다시 지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을 따라서 깨달음을 얻는 데도 역시 이 다섯가지가 있어야 한다. 이 다섯가지가 있으면 어떠한 환경이나 성격인 사람이라도 또한 남자이든 여자이든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깨달음을 얻을 것이며 오랜 기간의 수행도 아닌 아침에 법을 듣고 저녁에 깨달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까닭은 사람은 누구나 깨달을 종자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2 무엇이 마음의 본체인가

 깨닫는 길에 있어서 사람들은 눈으로 부처님을 보고 마음으로 부처님을 믿는다. 그와같이 사람으로 하여금 오늘날까지 생사의 길을 돌아다니게 한 것도 또한 이 눈과 마음이다.

 눈을 뜨면 먼저 방안의 것을 보고 다음에 창밖의 숲을 본다. 방안의 것은 보지 않고 바깥 것만 보는 눈은 없다. 그러나 만약 이 몸안에 마음이 있다면 무엇보다 먼저 마음 안의 것을 자세히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몸 밖의 것을 잘 알고 있어도 몸 안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마음이 몸 안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만약 마음이 몸 밖에 있다고 한다면 몸과 마음은 서로 떠나 있어 마음이 아는 것을 몸은 모르고 몸이 아는 것을 마음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마음이 아는 것을 몸이 느끼고 몸에서 느끼는 것을 마음은 잘 알고 있으니 그러므로 마음이 몸 밖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마음의 본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3 움직이는 마음은 본심이 아니다

 원래 모든 사람들이 시작을 알 수 없는 옛날부터 업(業)의 동아줄에 결박되어 미(迷)를 거듭하는 것은 두가지 근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생사근본인 미한 마음을 자기의 본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고, 둘째는 깨달음의 본성인 청정본심이 자기 속에 갖추어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주먹을 쥐고 팔을 들면 눈은 이것을 보고 마음은 이것을 안다. 그러나 그 아는 마음은 참 마음이 아니고 분별된 마음이다. 분별된 마음은 욕심에서 일어나며 자기의 편의대로 분별하는 마음으로서 인연 따라 일어나는 마음이니 이것은 실체가 없어 항상 변하여 마지않는 마음이다. 이마음은 실체가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미(迷)가 일어난다.

 다음에 그 주먹을 펴면 마음은 주먹을 편 것을 알아 이것은 손을 편 것일까, 사람이 보기에 따른 것일까? 또는 움직이는 것은 손인가, 마음인가?

 손이 움직이면 마음도 움직이고 마음이 움직임에 따라 손도 움직이나, 그러나 움직이는 마음은 마음의 표면이지 근본된 마음은 아니다. 

   4 본심은 언제나 청정하다

 모든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청정한 본심이 있다. 그것이 바깥 인연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번뇌의 티끌에 덮히게 되지만 그러나 어디까지나 번뇌는 손(客)이고 주인은 아니다. 하늘의 달은 잠시 구름에 덮힐지라도 구름에 더럽혀지지는 않으며 또한 움직이지지도 않는다. 그런까닭에 사람은 움직이는 번뇌를 자기본성이라고 생각하여서는 아니된다. 움직이지 아니하고 더럽혀지지 않는 깨달음의 본성을 깨쳐서 참된 자기에 돌아가지 않으면 아니된다. 움직이는 번뇌에 사로 잡히기 때문에 거꾸로 보는 견해에 덮혀서 미혹의 거리를 방황하는 것이다.

 분별하는 마음은 욕심에 이어지고 인연따라 일어나는 것이니 인연을 떠나서는 분별하는 마음은 없다. 이 인연이 오던 또는 가던 상관없이 영원히 움직이지 아니하고 멸하지 않는 마음이 사람 마음의 본체이고 또한 주인이다.
손이 갔다고 하여서 숙사(宿舍)가 없어졌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인연따라 생멸하는 계교(計較) 사량(思量) 분별심이 없어졌다고 해서 자기가 없어졌다고는 할 수 없다. 밖의 연(緣)따라 움직이고 변하는 분별심은 마음의 본체는 아니다. 

  5 현상과 분별을 초월한 본심

 여기에 강당이 있는데 해가 뜨면 밝아지고 해가 지면 어두워진다. 밝음은 태양으로 보내고 어둠은 밤에게 돌린다고 하자. 그러나 이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을 아는 힘은 어디로 돌려보낼 수가 없다. 그것은 마음의 본성이며 본체에 돌릴 수 밖에 도리가 없다.

 해가 떠서 밝다고 보는 것도 한 때의 마음이고, 해가 저물어서 어둡다고 보는 것도 한때의 마음이다. 그와 같이 밝음과 어둠의 바깥 연(緣)에 끌려 밝것나 어두운 것을 아는 마음이 일어나지만 밝음과 어둠을 아는 것은 한 때의 마음이요, 마음의 본체는 아니고 그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을 아는 힘의 근본이 마음의 본체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바깥 인연에 끌려서 생멸하는 선(善) · 악(惡) · 애(愛) · 증(憎)의 생각은 한 때의 마음이며 객진(客塵)이다. 이 객진에 휩싸여도 물들음이 없고 때묻지 않은 본래 청정한 본심이 있다.

 둥근 그릇에 물을 담으면 둥그러지고, 모난그릇에 물을 담으면 모가 나 보인다. 그러나 본래 물에는 둥글거나 모난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형상이 없는 물을 잊고 물형상에 집착하고 있다.
선악을 보고 호오(好惡)를 생각하며, 유무를 생각하고 그 생각에 부림을 받고, 그런 견해에 결박되어 다른 물건을 쫓으며 괴로워 한다.

결박된 견해를 그의 연(緣)으로 되돌려서 결박되지 아니한 자기 본성에 되돌아 가면 몸도 마음도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스러운 천지를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