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昌原) 봉림사(鳳林寺)

한국의고적/신라 구산선문지를 찾아서(6)

2008-01-18     관리자

 경상남도 창원군 상남면 봉림리에 鳳林寺 옛터가 남아있다. 봉림사는 효공왕(孝恭王) 때(897-912)개산조사를 현욱(玄昱)으로 모시고 진경(眞) 심희(審希)대사가 산호를 봉림산이라하여 도량을 크게 열었으니 이가 곧 봉림산문의 개산인인 것이다.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보물 제 362호)
 절은 폐사된지 오래이고 현재 절터에는 별다른 유적이 없으며 다만 1919년 3월에 옮긴 진경대사 보월능공탑과 그 탑비가 현재 경복궁안에 각각 보물 제 362호와 363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이 두 석물은 탑비문에 의하여 확실한 건조연대를 알 수있을 뿐만 아니라 부도에 있어서는 주인공의 생애, 행적 등 여러 가지 관계내용을 알 수 있다. 즉 비문에 의하면 진경대사는 문성왕 16년 (854)에 출생하여 경명왕 7년(923)에 70세를 일기로 입적 하였으며 이후 시호를「眞鏡大師」라 하고 탑명을 「寶月之塔」이라 하였다.
그리고 경애왕 원년(924)에 탑비를 세웠던 것이니 신라시대의 석조물로서는 가장 뒤늦게 건조된 것이라 하겠다.

923-924년대라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후삼국기(後三國期)로서 신라는 경명왕 7년 경주중심의 위축된 세력이며, 후백제가 견휜에 의하여 세워진지 32년이 되는 강력한 세력권이고 철원에서 일어난 고려는 왕건 태조 6년이 되는 때였다. 이렇듯 정치적으로 크게 변하고 있었던 때이므로 비록 신라 판도안에서 건조된 부도와 탑비라고는 하나 실제 10세기 이전의 신라양식을 그대로 잘 계승하고 있지는 않으며 각부 형식이나 조각수법에 있어서 변화를 보이고 있으니 신라에서 고려의 양식으로 넘어가는 하나의 초기의 과도기적인 면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석물이라 하겠다.

 부도에서 보면 신라 석조부도의 전형인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삼아 기단위에 탑신부와 온개석, 상륜부를 차례로 올려놓고 있으나 기단부에 있어서 중대석이 편구형이고 탑신에는 각면에 양쪽 우주뿐 아무런 조각도 없으며 옥개석에 기와골이 표시되지 않은 점등은 크게 두드려진 변화로 볼 수 있다.

 특히 기단부 하대석 안상에 삼산문이 밑에서 솟아나고 있는 것 또는 옥개석 낙수면의 처리등은 하나의 특징을 보이고 있는바라 하겠다.

 탑비에 있어서도 거북이의 받침돌 위에 비신을 세우고 정상에 용트림의 개석을 올려 놓은 것은 통일 신라시대 석비의 전형을 취하였으나 거북의 머리와 목이 위축되고 발톱이 둔해졌으며 비좌의 조각도 형식에 흘렀고 이수(螭首)에 있어서도 둔중함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러한 모든점은 역시 신라말기의 약화된 시대적인 특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