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문화의 본질적 특성 (2)

인도 문화 소개

2008-01-17     관리자

  (1) 관용의 전통 (계속)

  이 인도 종교의 기본적 특징은 기본적 교리로서 계시의 궁극성을 믿는 계시 종교와 구분된다. 끄리쉬나(역주 : '바가바드 기따'의 주인공 아르쥬나의 마부로 화신한 비쉬누신)가 기ㅡ따(역주 : 힌두교 3대 성전의 하나)에서 '그가 나에게 대하는 대로 그의 상태에 맞춰 응하리라' 하고말할 때 그는 모든 힌두 사상에 기본되는 주의를 선언한 것이다. 즉, 종교란 배타적인 도그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힌두의 가르침의 본질은, 남도 그들이 추구하는 방식에 있어서 꼭같이 바를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감정, 너그러움이다. 남의 신앙이나 믿음에 대한 존경과 삶의 문제에 대한 타인의 접근법을 이해함에 있어서의 너그러운 자비, 그것은 진정 인도 문화를 구분짓는 표식으로서 여겨질 정도로 그렇게 힌두 생활을 착색시켜왔던 것이다. 문화 인도인의 내면 생활에 조화를 주는 것은 이 관대와 보시의 센스인데, 왜냐하면 그 자신의 신앙이 굳건한 한, 그는 열린 마음으로 남의 신앙에 기꺼이 접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관대함의 결과가 인도적 생활의 풍부함과 다양성에 보태져 왔다. 힌두종교가 아마도 이러한 사실에 대한 최선의 실례를 제공한다. 이 위대한 종교의 기본적 외적인 형태조차도 많은 세기를 통해 변화하지 않고 남아있는 반면, 타 종교에 대한 관용에 의해 야기된 세력들의 상호작용은 그 주의의 계속적인 재해석과 삶의 문제에 대한 그 방법의 재조절로 이르렀다. 불교가,어머니 교단이라고 불려질 수 있는 조직체에 흡수된 과정이 하나의 두드러진 실례이다. 비록 붓다의 종교는 천 여년 전에 인도에서 사라져버렸지만, 그의 가르침은 힌두교와 긴밀하게 얽혀들었다. 회교의 영향은, 아마도 중세 인도에 있어서의 일신교적 가르침의 재강조에 책임이 있다. 낡은 힌두교 조직체 속으로 새로운 활력을 준 14, 15, 16 세기의 결과이다. 기독교 역시 유사한 결과을 가져왔다. 인도에서의 기독교의 맹렬한 선교는 정통파에게조차 거의 분개를 야기치 않았다. 반대로 그것은 기독교에 비추어 본 힌두 가르침의 재음미에 토대한 현대 인도에 있어서 가장 활기찬 운동의 하나인 힌두교의 대개혁으로 유도했다.

  (2) 종합의 센스

  인도 문화의 두 번째 커다란 특성, 즉 사상들의 지속적인 종합의 이상은  이 관용의 이상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늬 문명생활의 시작부터 인도 사상가들의 시도는 다양한 요소로부터 종합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힌두 문명의 기초를 놓은 것은 아리안과 드라비디안의 종합이다. 본래의 제도와 촌락, 가정, 그리고 광범한 법적 체계에 있어서 인도의 단일함은 이 종합의 산물이었다. 인도 예술의 발달 또한 이 커다란 과정의 증거가 된다. 예를 들면  인도 조각의 특성이 모헨죠다로에서 발견된 작은 입상 (B. C. 2,500)과 19세기 남인도의 사원 조각에서 명백히 확인되지만, 왜래 사상과 기술의 채용도 또한 계속되었다. 마우리야의 예술은 의심없이 페르세폴리스의 전통에 영향받은 것이었다. 불교 조각의 그 위대한 간드하라 학파도 매우 단정적이며 입증될 수 있는 그리스적 특성을 띠고 있다. 그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16세기에 무그훌 인들이 인도에 페르샤 회화를 도입 보급했다. 그러나 아크바르 자신의 시대의 기록이 증명하는 바와 같이, 인도 화가들은 단시일내에 그 기법을 정통하여 무그훌 회화로서 알려져 있는, 새로운 인도ㅡ파르샤 화파가 인도의 예술적 정통을 풍성케 하였다. 토착적인 화파조차도 페르샤와 무그훌 스타일에 상당히 영향받았다. 동화와 종합의 유사한 과정이 오늘날도 예술 활동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인도 문명의 현저한 특색의 하나인, 외래한 것에 대한 협조적 태도는, 인도가 동양과 서양사이의 조화를 이룰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인도는 역사적으로 그것을 위한 충분한 자격이 있으며, 정신적으로는 그 둘 모두와 혈연관계를 주장하고 있는, 그 둘의 이상적인 회합장소이다. 왜냐하면, 인도는 비록 근본적으로 동양에 속하나 백십년간의 유럽의 지도적인 나라와의 밀접한 접촉으로 서양과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 세력을 동화하여 자기 삶의 형태로 직조하는 인도의 기나긴 전통은, 지금 일세기 넘어 풍성한 결실을 거두고 있다. 이 동과 서의 새로운 종합은 ㅡ 그 중에서도 힌두 개혁과 현 인도 르네상스가 가장 의미있는 발현으로서 특기될 수 있는데 ㅡ 중요한 것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하는 바이다. 그 사회 구조 못지 않게, 인도 경제의 급격한 변형도 또한 동과 서의 융화를,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에 있어서의 최선의 것의 종합에 토대한 새로운 사회의 진전을 향한 이 운동의 타당성의 명백한 증거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종합의 천재의 독특한 실예는 바로 마하뜨마 간드히 자신이다. 아힘사 (Ahimsa, 역주 : 불상생 비폭력으로 역) 혹은 비폭력에 대한 그의 주의는 전통적으로 인도적인 것이다. 그것은 불교와 쟈이나교의 중심적 교리이며 또한 바이쉬나바(역주 : 비쉬누 신을 믿는 종파의 하나)에서도 수용된 신조이다. 그러나 간드히는 그 자신이 인정한 바와 같이 똘스또이, 소로우, 그리고 다른 서양 사상가들을 통해 이 근본적으로 인도적인 주의에 대해 깨닫게 되었으며, '산상의 수훈'으로 그의 신앙을 굳혔다. 그가 아힘사 혹은 비폭력에 대한 그의 개념에 이르른것은 이러한 근거를 통해서이지만 이 사상의 해석 작용에 있어선 그는 인도적 근원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스텐리 제본스는 간드히에 관한 그의 책 속에서 그의 도덕적 위대성을 기독교적 근거에서 추적하였다. 회교가 심오하게 간드히의 신앙에 영향주었다고 주장하는 몇몇 무슬림 성직자를 나는 알고 있다. 분명히 그는 마지막 날에 자신이 정통적 힌두라고 주장했으며, 람의 이름을 입술에 올리며 임종했다. 간드히 자신의 힌두교에 대한 정의 속에 이 모든 것이 설명되어 있다. '만일 나에게 힌두교의 신조를 정의내리라고 요구한다면, 난 간단하게 말할 것이다. 즉, 비폭력적 수단을 통한 진리에의 모색이라고. 어떤 사람은 신을 믿지 않을지 모르나, 그래도 여전히 그를 힌두라고 부른다. 힌두교란 진리에 대한 철저한 추구이다. 우린 신에 대한 부정은 알고 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부정을 우린 모른다'하고 그는 선언했다.

  인도로 하여금 관용의 정신을 함양케 하며, 영구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이면 언제든 두려움이나 주저 없이 타로부터 수용하게 하며, '다양 속의 통일'의 철학을 강요하는 것, 그것은 바로 진리에 대한 가차없는 추구인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