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노래 半生記

佛敎노래 開拓者의 縱橫談

2008-01-16     관리자

1. 내가 세운 30年 目標
 돌이켜보니 내 생애의 황금기를 아마도 이 운동에 던졌는가 한다. 나의 천직이 불교 공부이고 보니 경을 읽고 조사 어록을 읽으며 또한 산골에 틀어 박혀 참선에 몸을 바치는 것이 나의 전 생애 일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내가 오늘과 같이 거리 노중이 되고 포교승이 된 것은 불교 정화운동이 그 전기가 된다.
 불교 정화가 일단락 되니 어쩔수 없이 우리들은 가람을 수호하여야 했고 포교도 해야 했다. 걸망지고 참선만 하고 다닐 수는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도들을 만나보니 불교에 대한 이해정도가 말이 아니였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역시 그 책임은 스님들에 있었다. 경전이 한문으로 되어있고서는 일반 신도들이 불교를 알 도리는 없는 것이다. 또 하나는 불교가 성인만을 상대하고 있는 점이다. 어린 때부터 불법과 가까이 지내도록 하여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사실 어린이 포교가 제일 중요하다. 그런데 이제까지 불교계는 어린이에 아주 소홀했다. 타종교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적극 힘쓰는 것은 참 잘하는 일이다. 처음에 어린이부터 상대하고 차차 어른을 상대하여 포교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불교 믿는 부모들이 자녀들과 함께 절에 올 줄 알아야겠다. 종교는 자유다 하여 부모는 불교 믿으면서 자녀들은 다른 종교에 나가도록 무관심 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 아니다.
 이런저런 생각에서 청소년포교에 30년 목표를 세우고 시작했다. 이제 거진 20년을 지냈는데 그 동안 불교 뿐만 아니라 사회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나와 같은 뜻을 가진 분들도 많이 드러났고 종단 관심도 크게 달라졌다. 이게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다.

2. 한권의 책보다도 한곡의 노래를
 처음에 목포 정혜사(定慧寺)에서 코흘리개들을 모아 시작했다. 차츰 큰 아이들이 모였고 중학생들이 모여 마침내 한 단체가 되었다. 군중이 모여있는데 불가불 음악이 필요하더라, 그래서 무리하게 시작하였는데 가사는 내가 짓고 곡은 흔히 부르는 노래를 갖다 붙였다. 그게 쉬운 것이 아니였다.
 그후 부산에 가서 불교성전이란 포교책자를 만들면서 부처님 찬송가 몇개를 부록으로 넣었는데 그것이 그곳 지방 포교당의 아이들 놀이에서도 불려 지게 되었다. 한번은 진해 포교당에 가니 마당에서 아이들이 뛰어놀며 내가 발표한 노래를 불렀고 법회에서도 내 노래로 법회를 하고 있었다. 참으로 감개무량했다. 불교 포교에 한권의 책을 만드는 것보다 부처님 노래 한곡 만드는 것이 더 효과가 크다는 것을 믿고 용기를 내었다.

3. 쫓겨 다니면서 퍼지는 노래
 불교노래를 만든다고 하는 것은 그 소재가 아주 무진장이다. 팔만대장경이 온통 예술적 보고인 것이다. 불교노래 소재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많은 작곡가분의 도움으로 내가 지은 가사에 곡을 붙여갔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어린이를 모으고 청소년을 모아 부처님 말씀을 나누었고 부처님 말씀을 노래했다. 대구 관음사 시절에 추월성(한득민씨)선생을 모시게 되어 많은 협력을 얻었다. 그런데 신도들의 반대에 부닥쳤다. 절에 들어오는 돈을 가람수호에 쓰지않고 밤낮 어린이 음악 가르치는데 쓰니 안 좋아 할 만도 했다. 서울 대각사에서는 회암스님이 찬성해서 어린이 모임을 가졌었는데 법당에서 노래부르고 손뼉치며 수선 떨었다고 대중스님의 반대로 그만 쫓겨났다. 그때에 총무원장도 불교정화가 방금 끝난 이 시기에 어린이노래 부르는 것이 못마땅 하다는 생각으로 나에게 반대하기도 하였으니 이때야말로 종단시책도 황무지였지만 포교는 그야말로 가시덤불속의 행로였다. 여러차례 「교화운동이 정화운동이다」하고 설득해서 근근이 조계사에서 어린이 모임을 시작했는데 그러자 불교사에 생소했던 어린이 포교운동은 차츰차츰 크게 호응을 얻게 되어 얼마 안가서 어린이부, 중고등학생부로 굉장히 확대해 갔다. 그 무렵 많은 분들의 격려와 힘이 있었던 것은 잊을 수 없다. 기독교인이면서 예술을 아끼는 심정에서 적극 힘써주신 김 주영씨(현 소년한국일보 합창단 지도자)는 그중에서도 특출한 분이다. 그밖에 이찬우(부산). 김기우(계명대학교수). 정민섭. 김규환(KBS 합창단). 김희조. 이호섭교수. 남송일선생 등의 협조는 참으로 컸다. 청소년운동과 음악운동은 이렇게 함께 커갔던 것이다.

4. 청소년운동에 미쳤던 시절
 그무렵 나는 청소년 운동에 완전히 미쳐있었다. 그런만큼 성과도 있었고 협조도 많이 받았지만 반대도 많았다. 「참선이나 하지 무슨 노래가 가당한 것이냐」하는 것은 그래도 나를 아는 사람의 말이었다. 대구에서 당시 총무원장 청담스님의 주선으로 진주 연화사로 갔다. 거기에는 다른 데와 달리 어린이회와 중고등학생회가 이미 있었다. 또 재미있는 것은 매주 일요일 새벽이면 중고등학생들회와 청년회가 시내를 누비면서 목탁을 울리고 염불을 하였는데 어린이에게도 권했더니 토요일이면 무슨 피난이라도 가는 양 모포를 싸들고 절에 와서 잤다. 그리고 새벽 네시면 도량석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추월성선생을 모셔 와서 어린이를 지도하였는데 비록 팔개월밖에 있지 않았지만 나로서는 많은 경험을 했던 것이다. 그해 바로 4.19가 터지고 나는 해인사로 갔다.
 해인사에서는 교무를 맡았다. 거기서도 어린이 운동을 했다. 산내 암자의 국민학교 학생을 모으니 30여명인데 그들이 친구를 모아 오니 금방 백여명이 넘었다. 해인사 대중의 반대로 사중에서는 법회를 못하고 해인국민학교로 가서 교장선생님의 협력을 얻고 그 곳 학교에서 법회를 했다. 그때 교장선생님의 환영해 주신 얼굴, 그리고 마음 놓고 어린이들이 부처님노래 부르던 모습들, 정말 그리운 추억이다. 그곳 법회는 매 일요일날 하였는데 어린이들은 모두가 평소 학교가는 날과 같이 아주 책가방을 짊어지고 법회에 모여들었다. 참으로 순진하고 고운 아기들이었었다.
 그 무렵도 진주 연화사에는 가끔 가서 돈을 얻어서 어린이운동 비용에 보탰다. 한번은 진주에 갔더니 마침 은사스님을 뵈었다. 신도들이 「운문스님은 밤낮 그 짓만 하고 다닌다」고 일른 모양이다.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 이놈, 중이 되었으면 참선염불을 하던가 경을 읽을 것이지 하필 노래가 다 뭐냐」하시는 대단한 꾸짖음이었다. 말씀드려도 용서해 주시질 않아 마침내는 솔직하게 「저는 설사 지옥에 가더라도 이 운동을 안 할 수 없습니다. 」한적이 있다. 은사스님께서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해 주신 것은 사뭇 뒤의 일이다.

5. 최초의 찬불가집 三천부의 운명
 서울에 와서 그동안 모았던 불교음악 발표회를 동국대학 중강당에서 가졌었는데 그것은 부처님 오신날 축하를 겸한 것이었다. 일부에 뜻있는 분들이 이렇게 협력을 해주었지만 아직도 일반신도들은 어린이 불교를 이해해 주지 않았다. 조계사에 있으면서 수백곡을 작곡하여 찬불가집을 내었다. 이 책으로 찬조금을 모아 어린이 운동기금에 보태려 하였지만 당시의 조계사 신도 五천명은 되었는데 돈내고 책가져간 분은 겨우 십여명 뿐이었으니 가히 알만하다. 결국 그때 책 三천권은 전혀 호응이 없어 무상으로 다 나누어 주었다.
 조계사에서 청소년을 중심으로 한 연화합창단을 만들었을 때 일이다. 입회를 무료로 하게 되니 출입이 심해서 좀체 합창단 조직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회비를 받기로 하고 색동저고리 합창단복을 만들어 입게 했다. 그랬더니 합창단이 안정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오늘날도 불교행사는 대개 사찰이나 일부 독지가가 비용을 부담하고 일반에게는 대개가 무료봉사다. 이러고서는 잘 안된다. 반드시 돈을 내고 나올 수 있는 정도의 성의가 있어야 조직이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七二년에 조계사에서 나올 때까지 그 동안에 불교청소년운동은 거의 그 기초가 잡혀 갔다. 그동안에 많은 작곡가들의 신세를 졌다. 그중에도 김희조. 김주영. 정민섭씨 등 여러분의 신세는 말할 수 없이 컸다. 요즘은 하모니카 할아버지로 애칭을 받는 이해창 선생이 나를 도와 주고 있다.

6. 불교음악 진흥책은?
 불교음악을 일으킨다는 것은 이것이 불교예술의 문제만이 아니다. 나는 당초부터 불교포교를 목적했던 것이고 그 포교의 가장 효과적인 것을 노래라고 보았던 것이고 그래서 지난 20년을 몸바쳐 왔다. 그런데 불교음악을 진흥시키려면 첫째 종단부터가 이 일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종단이 직접 성가집을 편찬해야 한다. 성가가 제대로 나오려면 철저한 불교 신앙가의 손에서 곡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지금 같이 명자불교인이나 비불교인들이 우리들의 요구에 의해서 나오는 곡 가지고는 안된다. 하나의 곡이 나오려면 깊은 깨달음의 경지와 깊은 신앙의 경지와 깊은 서원의 경지를 체험하여야 한다. 그리고 작곡가로 하여금 그런 체험을 가질 수 있도록 충분한 환경과 여건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나의 필생의 소원인 오페라 팔상록같은 것은 한 작곡가의 필생의 사업이다. 평생토록 연구와 생계에서 지장이 없도록 보장이 있어야 한다. 그밖에 곡을 만들려면 끊임없는 기도를 하면서 작곡을 하여야 우리의 신앙감정이 맞고 또 많은 사람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음악적 운율로 전달할 수 있는 힘이 담겨지는 것이다. 불심으로 작곡하고 불심으로 노래하는 여건이 불교음악진흥의 요결이라 하겠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끝없이 높고 깊어서 모든 중생은 그속에서 영혼의 안식을 얻는다. 음악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으로 부처님의 이 가르침을 모든 중생에게 전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근일 불교방송국 시설론이 자주 대두된다. 불교계가 단결하면 못할리 없다. 그러나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신심으로 단결하지 않고는 설사 세워줘도 운영이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부터라도 이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전문가를 양성하고 방송국의 시설을 많이 활용해서 불교프로를 대량 엮어가는 것이 아쉬운 것이다.
 불교음악은 포교와 일치한다. 종단은 승가집과 함께 포교전을 펴내야한다. 해마다 새로운 내용으로 교재가 짜져야 하고 권위있는 편찬위원에 의해서 그 내용이 알차게 다듬어져야 한다. 종단이 이 일에 등한한 한 결국 불교는 절 지키고 혼자 수도한다는 말을 면할 길 없는 것이다.

7. 맺으면서
 나는 가끔 기독교 찬송가 연습하는 광경을 볼 때 가 있다. 가정에서도 하는 것을 보았다. 참 부러웠다. 우리 불교도도 집에서 염불하고 독경하고 참선하는 분도 없지 않지만 가족이 함께 찬불가 부르는 집이 몇집이나 될까? 안되는 것은 아니다. 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진주에 있을 때 어린이들이 고무줄을 넘으면서 노는데 그 고무줄 넘기 노래로 불교어린이회 노래를 시켰더니 금방 퍼져서 온 진주시내에 유행이 되어 버렸다. 어린이노래 뿐만 아니라 사회 각층에 적당한 불교노래도 얼마든지 연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자면 조그마한 불편도 이해해 줘야 한다. 좀 떠들어도 이해해 주고 아이들이 싸우고 장난을 해도 너그러이 봐 줘야 한다. 성북동 어느 암자에서 어린이 법회를 몇차례 잘했다. 그랬는데 동네아이들이 절 밭에 들어와 도마도를 몇개 땄다. 물론 법회에 나오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것 때문에 난리가 났고 어린이회를 없애버렸다. 또 서울 창신동 某寺에선 주지스님의 고마운 뜻으로 어린이법회를 또한 가질 수 있었다. 그랬더니 얼마 안가서 참선스님들이 반대해서 법회가 없어지게 되었는데 참 기가 막혔다. 포교를 하고 어린 것들을 모아 가르치자니 돈 손해도 나고 귀찮을 것은 말할것도 없다. 그렇다고 불자의 지상과제인 포교를 어찌 그만 둔단 말인가.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겠다고 모여든 어린이들을 어떻게 무참히도 흩여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스님들이 교양도 높아지고 사찰도 대개 윤택한데 그 심정들을 이해할 길이 없는 것이다.
 내가 청소년운동을 하면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청소년 교화연합회의 안병호. 황해진. 이용택. 김안수 여러 거사님과 그리고 석주스님, 지환스님, 현보스님 들은 모두가 한국불교청소년 운동에 기리 빛날 이름들이며, 나로서도 진정 감사를 드려 마지않는다. 나는 앞으로도 동지들 뒤에서 힘껏 이 일에 몸 바칠 생각이다.  

 * 행복이란 참마음에 따라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佛心의 실현이다.         <불광聖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