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행원품 해제(3)

2000-12-03     관리자

3.현대 사회에서의 보현행원의 중요성

그런데 보현행원품이 실천 수행의 진수로서 예로부터 강조되어 왔던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현재 우리 나라 불교계에서 행원을 수행법의 하나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는 분은 매우 드문 것이 현실이다.

이 결과, 보현행원은 그냥 단순한 생활 실천 불교의 하나 정도로만 가
볍게 생각하고 깨달음과는 전혀 무관한 하챦은(?), 또는 근기 낮은 가르침 정도로 여겨 그냥 말로만 보현행원을 인식해 온 것 같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모든 것을 우선하는 최고의 목표로 간주하는데, 단지 실천 불교의 하나인 행원을 하여서는 깨달음을 전혀 얻을 수 없으므로 깨닫기 위해서는 다른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현행원은 단순한 실천 불교의 한 방편만이 아니라,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깨달음을 반드시 이루게 해 주는 뛰어난 수행법의 하나이다. 조사선이 화두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는 수행이라면 행원은 '행'과 '원'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불교의 수행법이라 하면 참선, 관법, 진언, 염불, 독경 등을 거론하나 앞으로는 행원 역시 훌륭한 수행법의 하나로 필히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행원 수행의 특징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 하나는 바로 <지혜와 자비>의 <동시 성숙(同時 成熟)>이다(화엄경이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 보살'과, 대행을 상징하는 '보현 보살'을 중심으로 설해진다는 것은 바로 화엄 사상이 '지혜와 자비행의 완성'을 뜻하는 것으로 볼수있다).

불교 사상의 가장 큰 핵심은 바로 <지혜와 자비>이다.
불교는 이 세상의 중생계가 형성되고 중생들이 고해에 빠지게 되는 가장 근본 원인이 바로 <어리석음(無明)>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 보고 인간과 중생사를 밝게 헤아려 아는 <지혜의 완성>과 그 밝음을 실제로 나눠 갖는 <자비의 실천>을 궁극적 수행 목표로 두는데, 이는 다른 종교의 사상과도 다르지 않다.

사실 종교라면 이 두 가지가 원만히 발달되어야 할터인데 현실은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본시 예수님이야 그렇지 않았겠지만 예컨데 기독교는 지혜의 발달보다는 자비의 실천 쪽에 더 무게가 주어진 경향이 있고, 불교도 본래는 그렇지 않았지만 근래에는 지혜의 완성 쪽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짙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깨닫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가치가 없고 모든 것을 오직 깨달음을 얻은 연후로 미루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바로 근대 불교의 이런 점 때문에 불교에 인연 있는 많은 분들이 다른 종교로 관심을 돌려, 현재 불교가 일반인들에게 멀어져 가는 원인이 된 것은 아닌가 한다.

즉, 지금 잘 알려져 있는 불교 수행법의 대부분이 지혜와 자비를 동시에 성숙시키는 데에는 조금 한계가 있는 듯이 보인다. 이론(지혜)과 현실(자비)을 동시에 만족시키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예로부터 정혜쌍수가 대단히 강조되는 것도 그만큼 수행에서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행원의 가르침에는 지혜와 자비가 '동시에 성숙된다'는 결과만을 말할 뿐 굳이 이런 두 가지 면을 일부러 힘써 닦아라는 말은 설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행원 자체가 이 두 가지 면을 완벽하게 서로 보완하며 조화를 이루게 하기 때문이니, 바로 '원'과 '행'의 개념이 그것이다.

'원'은 이론(지혜)이며 '행'은 현실(자비의 실천)을 의미하여 행이 가는 곳마다 원이 있어 자칫 맹목적이고 지나치기 쉬운 행동을 조절하고 완벽하게 만들어 준다.

행원의 공덕으로 초래되는 지혜의 완성과 자비의 실천은 특히 게송 곳곳에 여러 번에 걸쳐 반복, 강조된다.

행원으로 일체 모든 중생을 섬기고 공양하며 그들의 모든 번뇌를 없애고 신통과 공덕과 자비의 힘으로 국토를 깨끗이 하고 장엄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모든 중생을 해탈케 한다는 말과 함께 보현행으로 반드시 보리를 이룬다, 깨달음을 얻는다, 는 말이 조금은 지루할 정도로 반복된다.

이는 그만큼 보현행은 지혜와 자비의 완벽한 조화를 가져 오는 수행인 것이며 그만큼 행원 수행이 뛰어남을 구도자들에게 깨우쳐 주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보현행원은 '부처가 부처 되는 수행'이다. 못 깨친 중생이 깨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중생이 닦아서 부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자비가 본래 구족된 '본래부처(本來佛)'가 그 자리에서 '더 큰 부처'로 되는 것이니, 굳이 정확히 표현한다면 '작은 부처'가 '행원'을 통해 '큰부처' 되는 것이 보현행원에서 보는 수행관이라 하겠다.

행원은 불성이라는 불길에 기름을 퍼붓는 격이다.
행원을 통해 잊혀졌던 우리의 불성이 노도(怒濤)와 같이 일어나기 시작하며, 행원을 통해 꺼져 가던 우리의 불성의 불길이 크게 불붙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21 세기는 시절인연이 이미 이론과 현실이 조화를 이루는 가르침만이 설득력을 얻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근대 불교가 지혜의 완성(이론)을 더 강조하는 듯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일반 대중과 멀어져 가는 현실에서, 지혜와 자비가 동시에 성숙되게 하는 보현행원 사상은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되돌려 놓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우리 불교계가 나아가야 할 바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