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선의 사상 : 선禪과 과학科學

禪의 思想

2008-01-14     관리자

  한산시(寒山詩) 가운데 「나의 마음은 가을 달이 푸른 심연(深淵)에 반영되어 맑고 청결하게 빛나는 것과 같다. 어떠한 사물도 이 마음에 비교될 만한 것은 없다. 누가 나에게 이 마음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吾心似秋月 壁潭淸皎溪 無物堪比倫 敎我如何說) 라는 선어(禪語)가 있다. 아마도 중추절의 보름달을 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시(詩)의 표현 속에 나타나 있는 무관심의 희열(喜悅) 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무의식 중에 어떤 자연현상과 접할 때 무아(無我)의 경지를 체험한다. 아마 앞에 내놓은 시(詩의) 표현 속에도 주객을 초월한 몰아(沒我)  의 경지를 나타낸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내가 달을 보고 달이 나를 본다. 나와 달은 이미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단지 침묵 속에 신비의 삶이 있을 뿐이다.  무언(無言)속에 무한한 신비의 세계가 열려있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은 결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동양인들은 일찍이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왔으며 자연과 일체가 되어 자연의 고동을 하나 하나 자기의 혈관을 통하여 느끼고 그러한 맥박 속에 평화의 삶을 누리어 왔다.

  선(禪)은 그 본질에 있어서 자기와 전존재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최고의 지혜요, 무명(無明)에 의한 고뇌와 속박으로부터 자기를 해방하는데 있다고 한다. 또한 선(禪)은 본래 우리 마음속에 구비되어 있는 창조적이고도 자비로운 충동과 지혜를 깨어나게 하는 것이요, 자유롭게 활동하게 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결국 선(禪)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실상 그대로의 진실을 깨닫는데 그 목적이 있다. 깨달은 사람은 이 세계에 대하여 마음이 열려있어 일체의 자연과 서로 상승하게 된다. 나는 자연에 생명을 주고 자연은 나에게 생명을 준다. 어떤 선사(禪師)는 말하고 있다.

「내가 깨닫기 이전에는 강은 강이었고 산은 산이었다. 내가 깨닫기 시작한 때는 강은 강이 아니었고 산은 산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내가 깨달았을 떄는 강은 다시 강이고 산은 다시 산이다.」

  선(禪)의 근본 뜻은 본래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실상 그자체로 있게 하는 기술이라고 하는 점에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술이 습득되려면 대사일번(大死一番)의 노력과 수행이 뒤따라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선(禪)은 결코 이성으로 분석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절대로 운위될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선(禪)은 정의(情意)적인 것으로서 수행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어떠한가.  과학은 철저하게 분석적이고 개념적이다. 그것은 분별적이고 객관적이고 조직적이며 비인간적이다. 과학은 자연의 일체를 대상화하고 객관화하므로서만 다시 말하면 나와 자연을 분리하므로서만 과학이 된다. 왜냐하면 과학은 모든 것을 추상화하고 개념화할 때에만 그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과학은 단지 자연을 이용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의 생명을 죽일 망정 그것과 함께 호흡하지는 못한다.

 禪은 이와는 반대로 모든 자연의 창조의 원천 속으로 뛰어들어 그 안에 내재해 있는 모든 생명력을 들이킨다.

 과학은 분명히 인간들에게 많은 편리한 기구들을 제공해 주었다. 자동차, 기차, 비행기, 라디오, 텔레비전, 전축, 전기 등등 수많은 문명품들을 인간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문명의 기계들은 아무리 그것이 인간에게 편리를 제공한다 해도 그것들은 철저하게 비인격적이고 비창조적이며 비생명적인 것이다. 과학은 결코 자발적인 자유에 의한 창조적인 삶을 살게 하지 못하며 정신적인 내면에 살아있는 예술이나 윤리적 숭고성 내지 종교적 구원을 체험하지 못한다.

  극도로 산업화되고 기계화된 오늘에 사는 우리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같이 과학과 기계는 절대적으로 필요불가결한 것이며 그것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사회로부터 동료로부터 마침내 자기자신으로부터 소외 당하고 말았다. 구름과 같이 밀려오가는 사람의 떼속에 있으면서 어느 누구도 군중 속의 고독을 씹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생생한 생명력이 기계에 의한 물량화에 매몰되어 인간성은 몰락하고 박제된 기계적 인간들만이 소용돌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禪)과 과학은 반드시 반립하는 것만은 아니다. 과학이 선(禪)의 입장에서 볼 때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단점 때문에 자연의 생명력을 매몰시키는 면이 있으나 실제로 오늘과 같은 인구팽창의 시대에 있어서는 과학이 없이는 인류를 살릴 수 없는 것이다. 어떤 하나의 기계가 움직일 수 있게 되려면 분석적이고 수학적인 지식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인간의 탐욕이 과학을 오직 공리적이고 이기적인 면으로만 받아들이려는 데에 큰 오류가 있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과학은 결국 종교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어떤 하나의 직선(선분)을 二분의 一(절반)로 나누고, 다시 四분의 一로 나누고 또 八분의 一로 나누고 계속 이와 같이 분석해간다면 작은 하나의 유한한 직선 속에 무한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물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물질을 분석해 들어가면 먼저 분자로 나누어지고 다음에 원자로 나누어지고, 또 다음에 입자로 나누어지고 또 중간자와 같은 소립자로 나누어지고 계속 계속 나누어진다. 여기서도 역시 유한한 물질 속에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무한한 신비가 깃들여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유한과 무한의 상응성에서 「라이프니츠」라는 철학자는 미분방정식을 발견하여 우주의 예정조화를 깨닫게 되었고 세계적인 물리학자 「파울리」는 인간의 외면과 내면의 단일성 내지 물질과 정신의 상보성에서 진정한 자연의 신비를 파악하려고 하였다. 즉 파울리는 종교적 인식과 과학적 인식의 관계를 하나의 상보적인 면에서 보려고 하였으며, 따라서 인간은신(神)이나 중국의 도(道)나 인도의 삼마디나 불교의 열반(涅槃)과 일체가 되는 것과 같은 신비에 있어서 과학의 세계도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현대의 과학자들 중에는 물질 속에서 정신을 보려고 하는가 하면, 또한 정신 속에서 물질을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엑클레스(Eocles)와 같은 생리학자는 물질로 구성된 「대뇌피질(大腦皮質)은 유령이 조작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기계」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정신과 물질간의 「양방향적 왕래」를 실험하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불교의 극락왕생을 연상시켜 준다. 물질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는 결코 별개의 세계가 아니다. 이 분리된 것같은 두 세계는 동시에 통일체로서 직관하므로서 무분별지의 세계, 곧 해탈에 이르려는 것이 禪의 목적이다. 현대과학은 바로 이러한 경지로 육박해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禪)과 과학은 마치 동일한 굴을 양쪽에서 파들어오는 것과 같으며 결국 한 곳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