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선의 사상 : 선禪과 문학文學

禪의 思想

2008-01-14     관리자

 차원있는 불교문학을 이야기하려면 뭐니 해도 선문학(禪文學)에 있는것 같다.  오도문학(悟道文學)의 오도적 필력을 휘두르는 데는 아무래도 이 선문학이 아니고는 안된다.

 불교적 깊은 철학이나 사상이 산문에 의해서 묘사될 수는 있지만 이것을 작품화 할 때는 직관적 직접적인 힘이 약해지기 때문에 직관에 의한 문학의 힘은 역시 선문학(禪文學) 의해서 가능할 것이다. 산문에 의한 사상과 직관에 의한 시, 이것은 반드시 일치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일반적인 통념과 실제는 그렇게 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은 가능한 것이다. 작가와 작품과의 문제에 있어 작가의 정신이나 사상적 영향이 그 작품에 반영된다. 생각하는 입장에서 이 작가적 상상의 힘을 기르는 이 선문학은 절대적인 것이다.

  선(禪)의 마음은 분별이 없고 상대가 없다. 한물건을 들어 전체에 통하기도 하고 한 게송을 지어 법성일여(法性一如)의 경지를 읊기도 한다. 우리의 상식적인 통념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이 선(禪)의 세계에선 용납되고 그것이 또 시화(詩化)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은 반드시 비유적으로 암시적으로 또는 상징적 영탄(詠嘆)식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에 선문전수(禪門傳受)의 심법(心法)이 있고 문학작품이 생겨지는 이유가 있다., 때문에 선계문학은 표면상으로는 평범한 것 같지만 내용상으로는 무한한 함축성을 가져 선(禪)의 경지를 모르는 사람은 그 본의를 이해할 수  없다. 선게(禪偈)가 은유나 비유로 표현하지 않으면 표현될 수 없는 숙명을 가지는 것도 선의 그 내용이 사량할 수 없이 깊고 깊기 때문이다.

  때문에 문자나 책을 멀리하고 오직 마음만을 추구하는 선문(禪門)에서는 대문학가와 명문학이 많이 나왔지만 선 이외의 천태(天台)나 법상(法相)과 같은교상학파( 敎相學派에서는 뚜렷한 문학가나 문학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심오한 문학은 추리나 상황 묘사에만 있지 않고 역시 그러한 선의 문악에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선(禪) 그 차제 문학이 아님에도 그것이 훌륭한 문학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은 선(禪)은 창작하는 힘과 시적영감을 만들어 주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참문학은 우리의 최고의식에 의하여 이상과 현실을 일치시켜 이를 사건이나 인간에게 잘 조화시켜 주는 것이다. 즉 우리의 이상을 객관화한 것이 참문학이 아닐 수 없다.

  선림(禪林)의 본래의 성격은 오히려 문학적 요소를 부정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선림(禪林)에 문학이 더 발달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한낱 자연발생적 현상이 아니라 선(禪)이 인생에 대한 여유와 감동의 자연 세계를 그대로 표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선승(禪僧)과 문학가는 그 표현의 원천이 되는 창작정신에 무언가 일치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물론 불교는 제법(諸法)의 실상을 체관(諦觀)하는 것이고 문학은 인간의 가치체험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영역에 있어선 이 양자가 구별되는 것같지만 좀더 고차적 입장에서 보면 문학가는 예술적 직관에 의해서 자기를 투영, 시화(詩化)하는 것이다. 즉, 자기에 의해서 자연을 특수화 개성화하는 것이요, 선승(禪僧)은 종교적 자연에 의해서 자연의 구체적 생명으로 만물과 나를 일체의 절대경으로 한 것이다. 그 밑뿌리를 보면 문학가의 문학작품도 선승(禪僧)의 시구(詩偈) 도 다 구체적 자기의 무한의 전개에 불과한 것이다. 선자(禪)者가 아무리 무일물(無一物) 가운데 무진장(無盡藏)이라 해도 이것을 문학가는 자기에 의한 객관을 특수화해서 발전시킨 창작과 상통하는 것이라고 답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심천(深淺)의 차가 있을 뿐이다.

  선(禪)에선 직관을 중시하고 언어를 초월하기 때문에 그 초월된 언어가 상징적으로 나타날 경우 이것이 곧 문학이 되고 이런 경우 선승(禪僧)의 게(偈)는 곧 시문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이 적절하게 차원있게 나타나는 것은 이 언어가 초월한데서 오는 것이다.

  이처럼 선문학은 깊은 세계와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장르다. 풍부한 상상과 예리한 관찰로써 사물과 인생을 보고 이를 작품화 할 때 명문학(名文學)이 나온다.

  그런데 이 선문학(禪文學)의 대표적 장르는 시다. 선에의한 산문문학이 불가능한것도 아니지만 산문(散文)하면 무언가 의식적인 작용과 의도가 내포되고 있기 때문에 즉발적인 선문의 것과는 좀 거리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선이 결코 시에만 해당된다는 재래의 관념에 집착할 것은 아니고 선도 산문으로써 우리의 생활의식에 보다 접근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리하여 선문학의 귀족화라는 말이 붙지 않게  선문학의 대중화로써 보다많은 독자와 낮은 근기를 대할 수 있는 시기를 잡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우리 문학 풍토와 진실의 세계로 향상될 수 있는 문학수준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선(禪)은 시에서 깊은 연관을 찾을 수 있다. 시선일치(詩禪一致)의 주장을 내 세울 수 있는 근거가 이 두 세계에는 있다. 가령 선승(禪僧)이 시게(詩偈)를 읊을 때 반드시 그 풍물의 밑에는 전일적인 자기를 힘차고 있는 것이다. 즉 일초일목(一草一木)을 묘사해도 거기에는 생명있는 전일적 본체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을 반대로 이야기할 때에 생명적인 전일적인 경계가 객관적 사물을 대상화 상징화하고 있는 것이다. 상징화되지 않으면 생명적인 의미의 세계가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생명적인 제일의(第一義)를 상징화하는 일은 선문학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이 생명적인 의미가 바로 선 그것이요 불타(佛陀) 인 것이다. 때문에 생명적인 의미가 상징화된 것은 그 생명적 의미도 중요하려니와 그 그림자와 같은 상징도 생명적 의미의 분신(分身)으로서 역시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선승(禪僧)이라 할지라도 깊은 선경(禪境)에서 시를 읊지 않고 단순한 흥으로 시를 썼다면 이 시는 선과 일치하지 않고 단순한 시인이라 할지라도 그 시에 선경의 경지를 나타났다고 하면 이 시는 높은 수준의 시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선문학에 있어서의 문제는 그 경계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감상하는 측에서도 그 경계에 이르지 않고는 바른 감상을 하기 힘들지만 이것은 부차적인 문제요, 쓰는 측에서의 경계가 중요한 것이다. 때문에 시선일치(詩禪一致)에 대한 이론은 그것이 온당한 이론이긴 하지만 실제상에 있어서 시선을 일치시킬 수 있는 작품을 찾기는 어렵다. 선(禪)과 문학이 깊은 내용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실제에 있어서 그 효과가 쉽지 않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