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선禪은 이론으로 가능한가?

해오解悟와 증오證悟의 과제課題

2008-01-14     관리자

 ① 印度禪과 中國禪

  「禪」이란 본디 梵語(Dhyana)의 音譯으로서 中國音으로 「禪」(덴) 또는 「禪那」(덴나)라고 그 음을 옮긴 것이다.

 印度에서 말하는 「디야나」는 「생각을 잘 정리(思惟修)한다. 또는 「고요히 생각(靜慮)한다」의 뜻으로 풀이하는데 中國에 와서 「達磨禪」의 第六祖라고하는 慧能大師 이후에는「생각을 정리한다.」「고요히 생각한다」라는 범주를 떠나서 바로 그 마음을 직관하여 담박(頓悟) 깨쳐 見性하는 것을 그 宗旨로 내세우므로 印度에서 말하는 禪과는 그 性格을 달리하였다.

 印度에서 말하는 禪 은 「戒· 定·慧」三學에 있어서는 「定」이되고 布施 · 持戒 등 六바라밀에 있어서는  第五 禪那波羅密이 되는데 그 禪은 우리 마음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시끄러운 생각을 잘 정돈하고 고요히 정신을 한데 집중하여 나중에는 그 정신이 아주 寂靜한 不動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定」이라 하고 또「禪那波羅密」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中國에서 말하는 「禪」은 그와 같은 것이 아니다. 생각을 정돈하느니, 고요히 생각하느니 할 것도 없고 바로 自己의 本來佛性을 바로 보아 깨치라고 하였다. 곧 「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見性成佛」이라는 표방을 내세운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印度禪은 「不立文字」니 「見性成佛」이니 하지 않았고 먼저 부처님의 敎義와 敎訓을 착실히 받들어서 三學 · 六道의 모든 行을 닦으면서 그 가운데 禪도 닦으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敎義 밖에 따로 禪이 있다고 할 수 없음과 아울러 모든 敎義와 理論을 무시하거나 제거하고 禪만 닦으라고 한데는 없다. 다만 文殊般若經에서는「만일 사람이 잠깐 동안이라도 靜坐하면 恒沙의 眞金塔을 조성한 것보다 낫다. 寶塔은 마침내 부서져 티끌이 되지만 한 생각 바로 깨침은 부처를 이룬다.」

 라고 하여 萬行가운데 禪行이 가장 우수하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런데 中國에 있어서도 처음 達磨禪에서는 稜伽經으로 指針을 삼아서「佛語心品」에서 부처님이 말씀한 가운데 마음을 第一義를 삼았다. 그리고 文字에 의지하지 말라. 文字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는 등의 文句에서 차츰 敎義밖에 따로 마음을 보고 깨닫는 법을 지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뒤 第五대 弘忍和尙은 「본래의 眞心을 지키는 것이 열반의 근본이며 道에 들어가는 要門이며 十二部의 宗이며 三世諸佛의 祖이다」라고 하여 本來로 로 淸淨하여 不生不滅하는 眞如心을 잘 수호는 것이 佛法의 第一義가 된다고 하였다.

 다음 弘忍의 第子 神秀의 作이라고 하는 「觀心論」에서는 「마음을 觀하는 한 法이 모든 行門을 총섭한다」고 하여 印度的 禪과 차츰 그 면모를 달리하여 갔으며 다음에 어떤 禪師에 의하여 지어진「血脈論」에서는

「앞의부처와  뒤의부처님이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할 뿐 文字를 세우지 않았다」고 표방하여 「以心傳心 不立文字」라는 모토가 여기에서 비로소 나타났다. (이 論을 達磨說이라고 하나 실은 神秀以後에 나타난 글이다.)

 그리고 「血脈論」에서 비로소 「成佛하려면 모름지기 見性해야 한다. 見性을 못하면 因果等語가 다 外道法이 되고만다」하였고 또 이르기를

「만일 本性을 보면 十二部經이 다 쓸데없는 文字일 뿐이다. 千經 萬論이 다만 이 마음을 밝히는 데 있다.」

 라고 宣言하여 「不立文字 見性成佛」의 宗旨가 차츰 世上에 빛보이게 되었다. 이 뒤로 「수百年을 지나는 동안 溪南宗의 五宗 · 七家가 전개되면서 北宋元符年間(西紀一O九八~一一OO)에 편찬한 「祖庭事園」에 비로소 「敎外別傳․不立文字 ·  直指人心 · 見性成佛」이라는 四句의 표방이 天下에 公開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中國的 祖師禪은 印度的 觀心禪 修定禪과 그 性格을 달리한 특수한 禪門이 成立되었던 것이다.

 

   ② 禪과 理論

   禪은 근본 마음의 체험을 그 骨子로 하기 때문에 본디 理論으로 禪을 풀이하거나 그 이치를 체득하려고 하여서는 아니된다.

 다시 말하면 禪은 말길(語路로)과 뜻길(義路)이 끊어진 그 자리를 바로 直觀하여 체득하는 것을 그 要諦로 하기 때문에 理論으로 禪理를 말하고 義理를 따져 이해하려는 것은 學問이지 禪은 아니다. 그러므로 옛經에서도 그 경지를 가리켜 「言語道斷 · 心行處滅」이라고 하였다. 곧 말길과 마음으로 생각하는 길까지 꺼진 그 자리를 慧眼으로 바로 보는 것이 곧 禪이다. 그러므로 그 자리는 「입을 열면 그릇되고 생각을 움직이면 어그러진다(開口卽錯 動念卽乘)」고 함이 그것이다. 그에 대하여 淸虛大師는 禪敎限界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말 있는 데서 말 없는 데까지 가는 것은 敎이고 말 없는 데서 말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禪이다.」라고 하였다. 요는 禪이란 모든 敎理的 理論과 思惟的 探索을 떠나서 本來로 虛靈 ·  空寂한 그 마음의 본 바탕을 바로 觀照하고 수호하는 것이 곧 佛 · 祖가 가르쳐 보인 「禪」이라고 보면 틀림없으리라.

 

   ③ 解悟와 證悟

   中國에서 完成된 禪宗은 「見性」을 그 主旨로 하고 있는데 그 見性은 어떤 것이냐?

「見性」이라면 그 참 뜻을 모르는 이는 별 기특한 것이거나 神秘스러운 것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렇게 기특한 것도 아니고 또한 신비할 것도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見性」이라는 말은 自己의 本然의 心性을 보았다는 말이니 見性을 곧 깨달았다(悟)라고 한다. 깨달았다는 것은 自己 心性의 참모양, 곧 本然의 모습을 바로 보아 알았다는 뜻이다.

 그러면 自性의 참 모양은 어떤 것이냐? 그것을 古人들은 대체로 말로 이런 것이라고 說破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그러나 눈을 뜨고 보면 大乘經 · 論이나 祖師語錄에서 털끝만치 숨김없이 분명히 마음의 본 바탕을 드러내 보였다. 般若經계통이나 三論系에서는 「空」의 한 글자로 마음의 본바탕을 표현하였지만 기타 大乘經傳에서는「本來淸淨」하여 번뇌가 꺼졌고「寂靜如如」한 그 자리를 곳곳에 드러내었다. 꼭 禪門에서만 마음의 참모습을 밝힌 것이 아니다. 또 禪門에서는 「昭昭 ·  靈靈」이라거나 또는 「空寂靈知」라거나 요약하여 「寂 · 昭」라고 하였다.

   신령스러운 빛이 홀로 밝아(靈光獨輝)

   六根(主觀) · 六廛(客觀) 경계를 다 벗어났다 (廻脫根廛)

   그 바탕이 眞常 그대로 들어나 (體靈眞常)

   어떤 文字에 걸려있지 않다 (不拘文子)

   항상 고요한 三味가 (大寂三昧)

   본래로 구족하니(本自具足)

   다만 妄想만 여의면(但雜忘想)

   곧 바로 如如한 부처니라(卽如如佛)

 라고 한 法問은 바로 그 마음의 본바탕과 깨달은 경지를 남김없이 說破한 것이다. 그것을 그대로 알고 보면 그것이 바로 見性이며 悟道며 「大智慧 光明藏」이며 「般若波羅密」이며 「보리」「열반」이다.

   그 이치를 알지 못하는 이는 그밖에 무슨 見性이 있고 悟道가 있고 神通光明이 있다 생각할 것이다. 그 心性의 본바탕을 혹은 「本淸淨」이니 혹은 「本來無一物」이니 「空寂靈智」등등을 표시하였다. 요악하여 「寂 · 昭」라고 하였다. 항상 고요하면서 昭昭하게 빛나는 것이 心性의 참모습이니 모든 부처와 祖師는 항상 그 「寂 ·  昭」의 경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것이 「無上大涅 槃 ·  圓明常寂 照」라고 한 六祖의 法門일 뿐 아니라 모든 佛 ·祖의 自受用法身이다.

   그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것이 見性인데 그 見性은 오랫동안 禪定을 닦고 번뇌가 寂滅한 경지에서 그 心性을 확실히 체득하여 다시 분별 妄想에 끌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證俉」라 하겠지만 다만 그 心性을 보았더라도 아직 煩惱의  習氣가 있고 無明의 뿌리가 다 녹아 없어지지 않았으면 그것은「解悟」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見性」이 아닌 것은 아니다.

   흔히들 敎家는 解悟만 있고 證俉가 없으며 禪家의 見性은 證俉이고 解悟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으나 그것은 큰 偏見이다. 禪門에서 見性했다는 것도 大部分이 解悟가 많다. 그러므로 解悟한 뒤에 반드시 保任를 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普昭國師는 「頓悟 · 漸修門」을 세워서 千聖의 通軌를  삼았다. 누구나 見成을 하고 六祖의 가르침에 따라 無念 · 無住의 保任行을 하라고 한것이 바로 曺溪大師의 宗旨이며 普昭國師를 宗祖로한 高麗曺溪宗의 指道理念인 것이다.  普昭國師도 「頓悟頓修 ·  頓修頓悟」의 證俉를 부인함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萬人共通의 規範이 될 수 없다하여 누구나 自性의 본바탕을 보고 그에 의하여 無念修 또는 無念不味의 保任을 하여 一生에 번뇌와 無名의 習氣을 淨化하여 「大菩提 · 涅槃」을 증득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三世諸佛과 歷代祖師의 通規이기 때문이었다.